은진이는 말했다. 그 말보다 내 관심을 끈 건 은진이의 입술이었다.
웃고 있는 입술이 참 이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입술을 갖고 싶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다. 차가웠다.
나는 무서워졌다. 그리고 생각났다. 은진이는 죽었다.
니가 원하는대로 했어. 너도 내 소원을 들어줘.
나와 같이 가자.
새빨간 입술을 가진 은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은진이의 손길에 저항하려 했지만 은진이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어-!!!
소리가 되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은진이의 손이 풀렸다.
나는 다른 소리가 들려옴을 알았다.
나를 놓은 은진이는 내게서 떨어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그녀는 멀어졌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깨어난 곳은 양호실이었다.
수업 중인지 현영이와 다른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양호선생님이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웠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릴테니 그냥 집으로 가거라."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나는... 은진이를 배신했다......
"그리고,"
나가려는 나를 양호선생님이 다시 불렀다.
"이런 말 하는 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꿈이었다고 생각해라. 지나가면 다 잊혀질꺼야."
그냥 친구였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정신없이 걸었다. 나를 바라보던 은진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입술은 차가웠지만, 그 눈은 살아있을 때와 똑같았다.
내가 가버리려고 했던 그 때처럼, 그녀의 눈이 울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은진이의 볼과 입술을 만졌던 골목을 지나쳤다. 은진이의 집이 저 멀리 보였다.
대문 앞에 어제와 같이 서 있었다. 그러자 은진이가 볼을 붉히며 대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제처럼 가만히 서 있다 집으로 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열려 있는 대문을 밀고 나는 은진이의 흔적을 찾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런 일을 당해서인지 집은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열어보며 은진이의 방을 찾았다. <노크를 해주세요> 라는 팻말이 달린 방문이 있었다. 나는 그 방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 방은 창문가의 화병이 인상적인, 늘 꿈꿔오던 소녀의 이상적인 방이었다.
나는 그녀가 잠들었던 침대에 올라갔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얀 커텐을 밀고 햇살이 들어오길 바랬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나는 다시 커텐을 쳤다.
이렇게 잠들었을까.
나는 은진이가 누웠던 것처럼 그녀의 베개를 베고 누웠다.
베개에서 딱딱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나는 베게를 만져보았다.
안에 노트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비밀 일기장이었다.
말을 걸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그 애만 보면 심장이 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입을 연 순간, 난 비난 받을 것이다.
그 애가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니?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애까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는 그 애를 발견했다.
나는 은행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애는 내 손을 잡고 은행나무로 달렸다.
나뭇잎을 떨어뜨려주는 그 애를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구나.
집으로 오던 길에 그 애에게 입을 맞췄다. 욕심을 부린 거 같아 많이 미안해졌다.
나는 그 애와 함께라면 둘이라도 상관 없었지만,
사랑스러운 그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맞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애 곁에서 영원히 지켜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베개 안으로 넣어두는 대신 내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의 눈빛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런 그녀를 두려워한 내 자신이 한심해서, 이런 나를 사랑해준 그녀에게 미안해서 나는 그녀의 침대에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나 울었을까, 또 다른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방 모서리에 그녀가 무릎을 안고 울고 있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 나는 팔을 내밀어 그녀를 안아주려 했지만, 그녀는 닿지 않았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닿지 않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게 다시 기회를 줘.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앉았다. 그녀의 눈물이 내 교복상의를 적셔갔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미안해를 연발했다.
그녀가 얼굴을 부비댔다. 이제 울음을 그치겠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너랑 입 맞추고 난 다음에 고민했어.
너와 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난 몰랐으니까.
미안해. 나는 니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미처 몰랐어.
달려오는 차를 봤어. 피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냥, 이렇게 니 옆에 있어서 니가 나를 못 느끼더라도 너를 느끼고 싶었을 뿐이야...
니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래서 니가 많이 미웠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녀가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가지마. 가지마.
나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그녀는 처음처럼 웃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에서처럼 그녀가 다시 돌아와 두 손을 맞잡고 같이 가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녀가 내 품을 빠져나가기 전 속삭였던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난 항상 니 곁에 있어.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깨웠다. 경계의 눈을 한 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의 교복과 명찰을 한 번 살펴보더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봤다.
너는 누구니? 혹시 은진이 친구니?
죄송해요. 은진이가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요.
그 말만 하고 나는 나왔다. 무너지듯 쓰러지던 그녀의 어머니는 곧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 이렇게 내 곁에 있는걸. 나는 내 옆에 있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 지어주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어둠이 내린 학교 안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볼품없이 서 있었다.
나는 손으로 은행나무 아래 쪽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손이 시렸지만 일기장을 보관하기엔 이 곳이 가장 적당할 꺼 같았다.
고마웠어, 은행나무야. 내년엔 더 많은 은행잎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줄게.
그녀의 일기장을 흙으로 덮으며 나는 은행나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체육관 창고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얼마 전 체육대회에서 썼었던 사다리와 밧줄을 찾았다. 다행히 모래가 그대로 묻은 사다리와 밧줄이 한쪽 벽면에 나를 위해 준비된 듯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다시 은행나무로 되돌아왔다.
곁에서는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괜찮겠어? 많이 아플텐데.
괜찮아. 너랑 계속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뭐.
겁낼 것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이것은 은행나무가 소원을 들어주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나의 선택인 것이다.
밧줄을 나무에 묶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살아 생전, 내 마지막이 될 말을 내뱉고, 밧줄에 몸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너와 나는 떨어질 수 없다는 걸.
그건 은행잎이 들어주는 소원이 아니야. 운명인 거야."
아침 조깅을 하기 위해 그는 학교를 찾았다.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라고 해도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그는 그래서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여중을 이용하고는 했다.
늘상 그랬듯 간단한 조깅복을 입은 그는 운동화를 신고 학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안여자중학교]라는 팻말이 달린 교문을 지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은행나무였다. 그러나 그 날은 무엇인가가 달랐다.
그는 그 곳에서 가만히 은행나무를 지켜보았다. 은행나무 뒤편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햇살은 강하지 않았으나, 그는 눈을 감았다.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 아래 한 소녀가 목을 매단 채 웃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해보였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할게요~~~
아, 주인공이 여자였나여?
헉.. 예상과는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네요^^
나도 주인공이 남자인줄 알았어요.슬프네요...ㅠㅠ
역시 여자였어 읽으면서 여자일거야 라구 계속 생각했었는데... 근데 이게 해피엔딩인가?
음 역시 여자필이 났지요..
아...동성애를 다룬 소설이였군요.
...어떡해요ㅠㅠ Kapwa 님 못됬어! 이렇게 슬퍼지게 해도 되는거냐고요..ㅠㅠ
역쉬~ 예상대로군여~ 웬지 上편이 애절하더라니..ㅠ.ㅠ
난 이게 상하인줄 모르고 상에서 끝난줄 알아서 지금에서야 봤는데 애절하네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