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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코 5,1-20
하느님은 돼지들에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
영화 ‘거짓말’(2015)은 허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밖에서는 거짓말만 하고 다닙니다.
자신은 그런 가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피부관리사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일을 마치면 고급 집을 살 것처럼 둘러보기도 하고
비싼 차와 전자제품을 산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핑계를 대며 다음에 오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매우 부잣집 딸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없는 돈으로 비싼 차를 타며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신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배달되어 돈을 날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쫓겨납니다.
홧김에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여드름 짜는 일이나 한다며 솔직하게 말했다가 모든 게 끝장나고 맙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지옥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허영심 하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어떻게 본성을 타락시키고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이미 마귀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무덤’은 우리로서는 ‘지옥’의 상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인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마귀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느니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여러 다른 욕망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예수님, 돈의 욕심을 버리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편안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돼지와 같은 인간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허영심 대신 당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봉헌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봉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과 싸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5,1-20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는 이방인들 가운데 게라사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돼지를 떼로 키우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추방하는 능력을 발휘하셨는데,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님 부재와 현존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다 보니 공동묘지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에게 붙은 악령은 한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령의 이름이 특별하게도 군대였습니다.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들어있다 보니, 수시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폭력적이다 보니 발에 족쇄를 채우고, 손은 쇠사슬로 묶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낮으로 무덤과 산으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는 자해행위뿐이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주님 부재 시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가 주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중심에 계셔도 부족한 판인데, 다양한 우상들, 이런저런 악령들이 떡 하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부재하실 때, 즉시 그 자리에는 악한 영이 자리를 은근슬쩍 자리를 잡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현실, 우리 공동체의 현실은 얼마나 음산하고 비참한지 모릅니다.
마치도 칙칙한 무덤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소리소리 지르고 으르렁댑니다.
별것 아닌 일에 핏대를 올리고 폭력이 난무합니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경우에는 사슬이나 족쇄가 필요합니다.
극한 분열과 대립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은혜롭게도 군대라는 악령이 들린 사람은 죽기 일보 직전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악령 들린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어, 말씀 한 마디로 그에게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화되었습니다.
음산하고 칙칙한 죽음의 분위기에서 화사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즉시 반전되었습니다.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 29. 월)(마르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1-13).”
1월 29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인데, 마귀를 쫓아내신 일 자체는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일이고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야기 중간에 들어 있는 돼지들 이야기는 많이 이상합니다.
여기서 ‘돼지들’은 그 지역이 이방인들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고, 유대교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마귀들이 예수님께 청한 것은, “인간들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한 것입니다.
마귀들이 돼지들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귀들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니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곳에 돼지들이 아니라 다른 가축들이 있었다면, 마귀들은 그 가축들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신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서 돼지들을 죽이신 것은 아닙니다.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은 일은, 말하자면 집단 자살을 한 것인데, 그것은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혐오하고, 그래서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돼지들 속에 들어간 마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돼지들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어떻든 결과는 ‘선’입니다.
그래서 돼지들은 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선의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7).”
게라사인들의 ‘반응’도 많이 이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역에서 마귀들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기만 하고, 또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낸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복음서 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1) 게라사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까 그들은 예수님도 싫어했을 것입니다.
2) 그들에게도 분명히 마귀는 두려운 존재였겠지만, 그 마귀들을 쫓아낸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으니 그럭저럭 마귀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생긴 변화가 낯설었을 것이고, 그 변화가 유대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4)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생긴 경제적인 손해가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돼지 떼의 주인들은 예수님께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욕하면서 쫓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5) 그들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사람들, 그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았을 것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게라사인들과 많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만, 또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게라사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 데에 크게 불편한 것도 없으니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사는 모습,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면, 먼 나라의 일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습,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관한 복음을 들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 라고만 생각하면서 비웃는 모습 등.
그렇게 무심하게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귀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사람들 속에 숨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