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거제 지세포성
대경일보 기사 입력일 : 2021.08.03.
기자명 안병철 기자
경남 거제도는 고대로부터 한, 중, 일 해상교통 요충지였다. 남해안을 따라 일본 대마도 방향 구로시오 난류가 지나기 때문이다.
고대 항로는 바람과 해류를 타고 오간다. 일본과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교역도 오가는 해류를 이용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여, 몽 연합군의 일본 출병이 이뤄지기도 했다. 세종 원년(1419년) 6월 조정은 왜구의 본산인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 단독 해외원정군이 꾸려진다. 원정군은 이종무 장군을 위시한 병선 227척 1만 7300명 규모였다.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한 원정군은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상륙한다. 왜구 114명을 참수하고 왜선 129척과 가옥 1,940여 채를 불태운다. 서남해안을 들쑤시던 왜구의 본거지를 모조리 토벌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 약탈은 숙지지 않는다. 조정은 거제도 해안에 긴 방어체계를 갖추게 된다. 구. 영등성, 구. 율포성, 옥포진성, 지세포진성, 구조라진성 등이 이때 쌓은 성곽이다. 그중 대마도와 49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세포진성은 남단 최전방 전초기지로 우뚝 자리매김한다. 세종 23년(1441년)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한 것이다. 성종 16년(1485년)에는 해안에 보루(堡壘)를 쌓는다.
이어 5년 뒤인 성종 21년(1490년) 9월 보다 방어기능을 강화한 석성을 쌓는다. 인종 원년(1545년) 장정 2만 5000여 명을 동원해 쌓는다.
사방 체성에 성문과 성루를 올린다. 해자를 파내는 대대적인 축성작업도 이뤄진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체성이 이때 쌓은 성곽 흔적이다. 지세포진은 왜구 방어만 주목적이 아니었다. 세종 23년 (1441년) 일본과 계해약조(조어금약)를 맺는다. 인근을 드나드는 왜선은 증명서가 필요했다. 이 때 증명서 발급 등 행정업무도 지세포성에서 시행했다. 조선통신사 일행도 지세포성을 거쳐 귀국했다. 그런데 정작 임진왜란에는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초반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간은 유명무실한 성곽이었다. 전쟁 초기 지세포 만호는 한백록이었다.
한백록은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한산대첩 때 입은 부상으로 곧 순직하고 만다.
이후 만호 강지욱(姜志昱)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패해 성이 함락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전후인 선조 37년(1604년) 지세포진은 인근 옥포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설치된 때는 효종2년(1651년)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마침내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진의 운명을 겪는다. 당시까지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건물 모두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된다. 마침내 조선후기 지세포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세포진성은 경남 거제시 일운면 선창마을 동쪽의 비탈진 산기슭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는 방향은 서남쪽 선창마을 집단상가에서 지세포선창길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조금 가파르고 지그재그 계단이 이어진다. 이 길은 성곽 남서쪽 체성에 닿는다. 차량은 일운면 소재지에서 지세포봉수대로 올라가는 임도를 이용하면 된다. 해안을 바라보며 달리는 임도 중간쯤 왼쪽에 안내판이 서 있다. 좌회전 후 임도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달리면 성곽 뒤쪽이자 동쪽 체성에 닿는다. 지세포성은 조감도상 해안을 내려다보며 놓인 거대한 소쿠리 형태를 띤다. 해안을 자연 해자 삼아 동, 남, 북쪽 산지와 절벽을 이용한 것이다. 체성은 계곡을 가운데 두고 해안을 뺀 나머지 ‘ㄷ’ 자형 산기슭을 따라 쌓았다.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분류된다.
성곽은 둘레 1096m, 높이 3m 최대 폭 4.5m로 파악됐다. 체성은 지세포 동쪽 선창마을 뒤 계곡에서 해안으로 튀어나온 곳에서 서쪽을 향해 쌓았다. 동, 서, 남쪽에 성문 터가 있다. 동문 터에는 ‘ㄱ’ 자형 옹성도 쌓았다. 동쪽 체성밖에는 남북 방향으로 땅을 파고 양쪽에 석축을 쌓아 만든 제법 깊은 해자(垓字)가 있다. 체성 위로 중간 중간 망루 흔적도 보인다. 동쪽 체성에는 줄지어 박힌 주춧돌이 보인다.
외벽은 맨 땅위에 굵은 받침석을 두고 그 위로 쌓아 올린 형태로 조선전기 성돌 쌓기 수법을 보인다. 체성은 무너져 있지만 그 위로 마 매트가 놓여 걷기 쉽다. 남쪽 체성 밖으로는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 갈수록 체성은 점점 가팔라진다. 동남쪽 각루가 있었을 법한 지점에 ‘추락주의’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동쪽 체성에는 무너진 치성 흔적 두 곳이 보인다. 마을이나 해안과 가까운 서남쪽 성벽은 일부 복원한 흔적이 보이지만 이곳은 아직 복원을 안한 듯 무너진 그대로다. 옛 체성 모습이 충분히 짐작된다. 서쪽과 남쪽 체성은 해안 쪽으로 길게 꼬리를 내린 형태다. 성곽을 소쿠리 모양이라고 상상하면 양쪽 손잡이가 될 것이다. 동쪽 체성 위는 무너져 위험하지만 걷다
보면 옛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체성을 볼 수 있다. 체성끝 각대 지점에서 다시 해안으로 내려간다. 북쪽 성벽이다. 모든 체성이 외벽은 일직선 즉 직벽이다.
그러나 안쪽은 내탁식 토석혼축이다. 흙이 무너지고 깎여나가 지금은 거의 평탄하지만 일부 지형은 과거 사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면은 성안에서 군사들이 성벽으로 재빨리 손쉽게 올라갈 수 있게 하는 구조다. 동쪽 치성이 있는 체성위에 서보니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성안은 채전을 개간해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성안은 최근 들어 해마다 6월이면 라벤더 꽃물결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성안 이곳저곳에 플라스틱 드럼 물통이 여러 개 보인다. 성곽을 따라 걷다 눈을 들어보면 지세포항과 방파제, 그리고 대기업 휴양시설 리조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세포성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