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오늘 하루 죽음을 걱정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잃었다
오늘은 본래 마르타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와 오빠인 라자로도 함께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쨌거나 마르타는 마리아와 라자로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인물이기에 잘 된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치유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자를 넘어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다면 오빠의 죽음에 그토록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슬퍼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에 잡혀있었던 것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관자라는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생존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슬퍼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물론 생존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돈도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소득에 따른 행복도를 조사한 연구에서 일정 소득 이상이 되면 소득은 더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소득이 연봉 7만 5000달러, 한화로 약 8500만 원까지는 소득과 함께 행복도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온 신경이 돈에만 쏠린다는 것이고,
생존에 대한 걱정이 없을 때 돈은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분명 사랑을 실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자기 자신이 아닌 신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더라도 자기의 생존이 아닌 타인의 생존까지 신경 써 줄 수 있으려면 돈이 아니라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태석 신부님이 의사로서 생존을 위해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분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 먹기 위해 다니는 삶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생존을 위해 살지 맙시다. 일단 오늘 죽어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 있는 일이 보입니다.
아니 가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죽음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는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호프집을 인수해 장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장사의 맛을 조금씩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육군 간부식당 관리 장교로 군 생활을 마치게 되고 1993년 전역한 후 그는 다시 요식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때 요식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잘하고 있던 백종원에게 들어온 또 다른 사업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한때 인기를 끌었던 목조주택 사업이었습니다.
100% 성공을 확신한 그는 그 사업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터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는 17억의 빚을 지게 되고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한국에서 자살하면 여러 사람에게 아픔과 피해를 줄 것 같아서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죽기 전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었는데 아이템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 음식의 ‘맛’ 하나가 죽음에 관한 생각을 몰아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2년 동안 하루 4시간만 자며 쌈밥집과 포장마차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부를 누려서 행복한 게 아니라 이자를 감당하기 시작하니까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후 1998년 한신포차, 2005년 새마을 식당, 2006년 빽다방과 홍콩반점 등 여러 사업을 성공시키며 빚을 청산하고 지금은 요식업계 최정상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문어발식으로 주위 소상공인들을 힘들게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꿈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홍콩에서 맛보았던 그 음식 때문에 이런 삶의 가치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철학은 “맛있는 음식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자.”입니다.
또 한국의 요식업을 세계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구독자 50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 채널은 적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요리 비법을 온 세상에 공개하면서도 그것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생존만을 위했다면 이런 비법을 공개하지 않고 사업 아이템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의미와 가치는 ‘나눔’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의 문제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생존과 가치, 혹은 의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말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생존을 위해 살면 가치 있는 삶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존과 무관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생명이요, 부활로 믿으면 됩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자유이지만 일단 믿으면 그분이 존재하시던, 존재하시지 않던 삶은 가치에 집중하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 쫓겨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나무에 걸려 있는 칡덩굴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아래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우물 속에는 큰 뱀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쥐와 흰쥐는 매달려 있는 이 칡덩굴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데, 입 주위로 끈적한 액체들이 떨어졌습니다. 맛을 보니 꿀이었습니다.
칡덩굴 사이에 있는 벌집에서는 꿀이 한두 방울씩 그 사람의 입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죽음에 직면한 처지를 잊고 그 꿀을 받아먹었습니다.
밤낮으로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뱀 세 마리는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 위에서는 성령의 꿀이 떨어집니다.
그 맛을 보면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잊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사나, 오늘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사나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오히려 내일이 없다고 사는 사람의 삶이 더 물질적으로도 윤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활이요, 생명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아낌없이 나누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삶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수록 커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편히 쉬실수 있는 쉼터가 되고 있습니까?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세파와 존재의 무게에 지친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언제든 편안한 쉼터, 시원한 생수가 콸콸 샘솟는 오아시스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고마우신 주님께서, 그리고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편히 쉬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처럼>
2023. 07. 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처럼>
나날이
주님처럼
사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죽을 것입니다
나날이
주님처럼
죽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살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주님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