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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두려워 말라
본문 : 이사야 41:8~16
<본문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너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의 한 장로님은 대표기도를 하실 때마다 본문의 요절인 이 10절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1에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 사랑하는 성천의 식구들을 위로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기대합니다만 온전한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어 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위로가 됩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으시고, 두려움과 놀라움과 낙담과 좌절 가운데서 일어서시는 우리 성천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10절 상반 절에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13절 중반 절에 또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14절 중반 절에 또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 말라.”고 세 번에 걸쳐서 강조하여 명령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0절의 비슷한 말인 “놀라지 말라”라는 말씀까지 포함하면 네 번에 걸쳐서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려워 말라고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실까요? 필요 이상의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축복이 되지 않고 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세계에서는『라마단』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9월을 코란이 내려진 신성한 달로 여기고, 이 한 달 동안 일출에서 일몰까지 매일 의무적으로 단식합니다. 라마단 때의 단식은 신앙고백·기도·희사(喜捨)·성지순례와 함께 이슬람 5대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30여 이슬람국가와 그 밖의 나라에 거주하는 8억 이슬람교도들은 이 기간 중 여행자·임신부·어린이·병약자를 제외하고 일체 음식을 먹지 않고 술·담배와 성생활도 금지하며 성지순례를 하기도 합니다. 어느 해 라마단 기간에 성지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몰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폭발물이 있다’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망치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압사를 당하고 강으로 떨어져 죽곤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다가 폭발물에 대한 두려움이 놀라움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무조건 도망치다가 그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두려움은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닥칠 위험을 대비해서 가설해 놓으신 경보 장치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이 변태적으로 작용해서 공포심이 되고, 사단이 그것을 이용하게 되면 우리의 생을 위협하는 무서운 사단의 무기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18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의 두려움이나 공포심은 반드시 제어되거나 처리되어야 합니다.
<루마니아의 반체제 운동가 범브란트 목사님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기회를 살려서 성경책이나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성경책을 정독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 하라’는 말씀이 몇 번이나 있나하고 살폈습니다. 놀랍게도 365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택한 성도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네 번만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1년 12달 365일, 날마다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우리들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인 우리 모두에게는 일반적으로 세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미래의 불상사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순종하여 이 모든 두려움들을 몰아내고 제어할 수 있는 우리 성천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해답을 얻겠습니다.
I.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은 깨끗한 생활을 통해서 제어되고 치료되어집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누이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런 자를 축복하시고 계십니다. 잠언 1:17에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128:1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 31:19에서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원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서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혹시 벌을 주시고, 보복하시고, 저주하시지 않으실까하는 하나님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대체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죄를 지적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본문에서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혹시 벌을 주시고 멸망시키지나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이 확장되고 공포심이 계속되면 신앙생활의 정상인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정상을 벗어나 신앙생활이 고통스러워지는 기형적 신앙생활이 양산되고 결국은 사단이 바라는 대로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명하신대로 하나님께서 혹시 벌을 주시지나 않나 하는 공포심을 극복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이런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요? 창세기 3:8의 아담과 하와의 예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범죄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8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이 하나님과 기쁨으로 교제하고 대화했던 것과는 달리 두려워서 동산 나무 상이에 숨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혹시 벌을 주시지나 않을까, 심판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주의 종들의 얼굴을 피하고, 교회를 기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단은 바로 그런 틈을 타서 조소하고, 고소하며 사로잡아 쓰러뜨립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있기도 전에 마귀의 괴롭힘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런 비극이 없기 위해서는 죄 짓지 않은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죄를 지었을지라도 빨리 회개하고 주홍 같은 붉은 죄도 눈처럼 희게 만드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틈을 타서 붙들고 역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을 빼앗기고 두려움과 공포심에 붙들리고 얼굴에 평화가 사라지게 되는 이유는 성결한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지피기 때문입니다.
II. 미래의 불상사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제어되고 치료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있습니다. 혹시 직장에서 내어 쫓기는 것은 아닌가? 사업이 쇠퇴하지나 않을까? 노후대책은 제대로 세워질까? 사랑스런 자녀들이 교통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은 잘 살아갈까? 미래 불상사에 대한 많은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분명하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이사야는 170년 후 바벨론 제국의 몰락과 함께 정치적 변혁 앞에서 포로 신세로 “지렁이 같이” 한번 짓밟히기만 하면 끝나버릴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믿을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예견되는 미래의 불상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미래도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네 가지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유기적 관계에 있는 하나님임을 믿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잘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한 유기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8절에 “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택한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10절에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무관한 관계면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유기적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도와주는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본문에는 “도와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세 번은 확증을 의미합니다. 증인도 세 명을 세웁니다. 10절에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내가 너를 도우리라”고 했습니다. 14절에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이가 신발을 정리합니다. 빨래를 개어줍니다. 어린 아이가 조금만 도와줘도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우리들의 미래에 벌어지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누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전능자로 믿고 부모가 약속하면 다 믿는 것처럼>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으면 약속하신 대로 도와주십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셋째는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붙들어주신다는 말씀도 세 번 강조됩니다. 9절에 “너를 붙들며”라고 했습니다. 10절 끝에도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13절에도 “너의 하나님이 너의 오른 손을 붙들고”라고 했습니다.>
<서울호산나교회를 개척하여 섬길 때에 이 장로님 손자가 군포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머리가 깨어졌습니다. 인도에서 자신이 어머니 손을 붙들고 옆으로 버팅기다가 자동차 도로로 튕겨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달려오는 택시에 치어 머리가 완전히 깨어져서 대수술을 하고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아이 손을 붙들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하느냐하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붙들고도 놓칩니다. 시험에 빠집니다. 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면 끄떡없습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겠다고 세 번에 걸쳐서 확증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에게 우리 손을 붙들어달라고 손만 내어밀면 됩니다. 기도의 손만 내어밀면 됩니다. 그러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걱정도 다 사라집니다.
넷째는 끝이 좋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말씀합니다. 살짝 밟기만 해도 터져서 죽는 존재인 지렁이의 이미지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15절에 보면 그렇게 약한 이스라엘을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삼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렁이와는 정 반대의 이미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고, 작은 산들로 겨같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믿는 자의 나중을 강하게 하십니다. 나중을 좋게 하십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맹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는데 그때 나중에 낸 포도주는 이전의 포도주보다 훨씬 좋은 극상품의 포도주였습니다. 연회장도 ‘다른 집과는 달리 나중에 낸 포도주가 더 좋다.’고 극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언제나 나중이 더 좋아집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역사가 이어지는 성도들은 나중이 더 좋아집니다. 끝이 좋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굿바이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어 장래 불상사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III. 사람에 대한 공포심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치료됩니다.
<본문 11-12절을 보면 야곱이 두렵게 된 이유가 사람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노하던 자” “다투는 자” “싸우던 자” “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야곱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는 이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야곱과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두려워지는 것은 관계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잘 아는 부부가 있는데 아내의 외도로 인해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외도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법원에 내지를 못했습니다. 아내가 외도한 사실을 알게 된 날 폭행을 했는데 그것을 아내가 진단서를 끊어 법원에 제출하고 남편을 오히려 상습폭행자로 몰고 가면서 3억의 위자 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 무섭다”고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두렵게 되었습니까?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면 사람은 두려운 존재로 돌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려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괴상한 동물들을 애완용으로 기릅니다. 뱀도 애완용으로 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뱀을 목에 걸고 다니고 뱀과 함께 잠을 자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뱀을 사랑하기 때문에 뱀도 두렵지 않습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개도 무섭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누구나 사랑하면 두려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고 사랑하지 못해서 관계가 깨어지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관계만 회복되면 사람은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좇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대인 공포증 없이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결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끝이 좋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물리치시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서 사람에 대한 공포심을 물리치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는 축원합니다.
16절 하반 절에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고 하신 것처럼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넘치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간증하는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시카고 무디교회의 목회자며 저명한 라디오 설교자였던 폴 레이더(Paul Rader, 1879~1938)가 평소에 즐겨 쓰던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소년이 길가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는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 애가 저렇게 난리지? 혹시 저 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는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그 구멍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애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칠 때마다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행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던 그 애는 행인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미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해야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기에 우리가 그분에 대해 열광하는 것을 보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보이는데, 세상의 비웃음이 뭐 그리 큰 문제이겠습니까?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반응합시다. 우리를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반응합시다. 찬양합시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교제합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