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해남 충무사 전경 사당 앞에 넓은 마당이 있다.
|
| | |
▲ 충무사 삼문. 솟을 삼문에 공포장식을 하였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한 8월 초 해남과 진도로 역사여행을 떠났다.
해남하면 육지의 끝이라는 땅끝마을이 있고,
그 땅끝마을에 이르기 전에 진도와 해남의 사이는 가깝지만
물길이 사나운 위험한 바다협곡이 있어 그 물길을 울돌목이라 이름하였다.
예전에는 반드시 배를 띄워 그 험한 바닷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길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서
이제는 험한 바닷길에 작고 나약한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진도와 해남은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오직 그길 뿐이었으니,
그 천혜의 자연을 헤쳐나가는 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이었고,
그 바다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자니
바다의 심성이 어찌 변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이를 잘 활용하면서 살아왔다.
울돌목은 말로만 들어오다 처음 가보았는데,
과연 울돌목은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섬과 섬사이에 흐르는 물길은 293m 남짓한 가까운 거리였고,
바다는 마치 강물처럼 파도도 없었지만,
물길을 살펴보니 가운데 쯤에는 마치 계곡의 물처럼 힘차게 흐르고,
그 물길이 태양과 달이 끌어당기고 미는 조수의 힘에 의해서
하루에 2번씩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니 물길이 바뀌는 순간에는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때도 있어,
이런 때에는 새로 설치한 멋진 진도대교가 바닷물에 거울처럼 비치기도 하였다.
올돌목이라 이름 지어진 이유는
물결이 하도 험해서 바닷물이 마치 우는 듯 하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 울돌목의 언저리에는 420여년전 정유재란당시
조선시대를 살면서 겪었던 임진왜란중 가장 처절했던 싸움이 벌어졌고,
그 중심에는 한국인의 영원한 영웅인 이순신장군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많은 장수들과 이곳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던 수사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가장 치열했던 전투장소인 이곳에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으니,
이를 충무사라 부른다.
충무사는 최근에 지어진 충무공의 사당이다.
그 건립년대는 1964년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충무공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인데,
그 충무사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의 중턱에는 평지를 다듬어
이곳 해남땅에서 우수영의 지방관백으로 백성을 다스리던 수사들의 공덕비도 많이 있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바쳐 싸우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그 가운데 나라를 팔아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유학보내고 공부시켜 대를 이어 학계를 주름잡고,
정계에 진출하여 호의 호식하면서 살고 고관대작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는 뭔가 크게 잘못된 나라다.
요즈음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 본다면,
일제강점기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자손들은
관직과 학계와 경제계를 휩쓸고 있고,
나라를 되찾겠다고 재산팔아 군자금 대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자손은
전세방에서 겨울이면 냉골인 좁고 지저분한 단칸방에서
근근히 목숨을 연명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다. "친일파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런 말이 낫설지 않게
우리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이니,
너무도 안타깝고 한심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더운 여름 막바지 더위에 지친 8월 초순 해남땅을 답사하다
이순신장군을 모신 사당 충무사를 돌아보며 오늘날 한국현실을 빗대어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