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마태 17,14-20)
Amen, I say
to you,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말씀의 초대
신명기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주님 한 분뿐이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그분만이 유일한 사랑이 되셔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자녀들에게 거듭 가르쳐 주어야 한다(제1독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신명기의 핵심인 이 가르침을 신명기가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중요한 계명은
내 마음에 잘 새겨 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집에서도 길에서도 누워 있을 때도 일어나 있을 때도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어야 합니다. 잊지 않도록
손과 이마에도 표지를 붙이고,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붙여 놓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지시
사항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라는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어려서 배운 것이 몸에 배어들어 오래가기 마련이지요.
‘아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아 보이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열성을 보면,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모두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음악이나 미술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성장한 청장년의 경우, 언어는 물론이고 음식을 만들거나 바느질, 농사일, 그 밖의 여러 기술도
어려서 배운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습득한 기술은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잊히지만, 어려서 배운 것은 한참 지나도 다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 교육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믿음을 익히고 실천에 옮긴다면 혹여 잠시 냉담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머리로는 믿음을 버린다
하더라도 몸으로는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조기 영어 교육 또는 영재 교육의 관심과 열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쏟을 수만
있다면 …….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커서 배운 신앙 교육은 머리에만 머물기 쉽습니다!
-조재형신부-
올 여름, 예비 신학생들의 여름 행사가 거의 끝나갑니다. 고2는 신학교 체험을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함께 기도하고, 산보하고,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학생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다닐 신학교에서 미리 생활을 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고1은 순교자의 길을 따라서 도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영광의 길, 권력의 길, 명예의 길이 아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 날,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사제의 길이
겸손의 길인지, 나눔의 길인지, 순교의 길인지 되돌아보았습니다.
중등부는 작년에 이어서 통합으로 여름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음악’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올해는 ‘성서’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야기였습니다. 내년에는 ‘자연’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중등부에서는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여름 수련회를
기획하였습니다. 학생들이 그런 재미와 감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꿈, 이상,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올해는 수련회 도중에 부모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부모님들께서 무릎을 꿇고 아이들에게
안수를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양의 유교 사상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안수를
주고,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안수를 통해서 부모님들께서도 많은 것을
느끼셨고, 아이들도 좀 더 진지해졌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로 누군가에게 안수를 해
주었고, 축복을 해 주었지만 정작 저 자신은 축복을
받거나, 안수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안수와 축복이 필요한 것은 사제인 저 자신이었는지
모릅니다. 체면 때문에, 위신 때문에, 부끄러움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사제가, 부모가 안수를 받는 것은 지극히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저 넓고 깊은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이의 모습이 되셔서 안수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무와 연장을 주면서 배를 만들라고 하면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잘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드넓은 바다를 보여주고, 배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의욕을 가지고 배를 만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다를 건너고 싶은 목표가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비 신학생들에게 단순히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바다를 건너가는
과정임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이 모든 행사가 잘 마쳐질 수 있도록 늘 기도를 함께 하시는 성소
후원회 회원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임원진과 지구장님들께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잠시 저를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적인
예수님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마다 않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음의
힘
-이수철신부-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화당송
후렴의 고백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말
그대로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삶이 실로 위대한 성공적 인생입니다.
살기위하여
믿어야 하고 믿어야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감동하시는 것도 우리의 믿음입니다.
얼마전
읽은 동방수도승과의 대담 중 공감한 대목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이것은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존재의 기본적 주제다.
생각해
보라.
부모들은
와서 그들이 그들 자녀들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 불평한다.
나는
그들이 자녀들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실제 우선적 문제가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우선적
문제는 그들 자녀들이 살아계신 하느님과 믿을 만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진공(vacuum)은 어쩔수 없이
네가
명명할 수 있는 마약, 혼음, 음주, 나태 등 같은 악덕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정립될 때,
다른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그들의 해결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물이 일하는 방법이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마음의 무한한 진공상태의 공간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 아닌 것으로 채우려니 계속되는 배고픔에 목마름에 결국은 중독이요 폐인입니다.
하느님께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세상적인 것들에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후배나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믿음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모든 문제 해결의 첩경임을,
또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뤄주는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와 더불어 ‘평화와 기쁨’, ‘위로와 치유’, 그리고 ‘정화와 성화’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 노력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힘을 키우기 위한 세 측면에 걸친 묵상입니다.
첫째,
끊임없이 ‘사랑하라’입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숨
쉬듯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들 교육에 우선적인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 신앙 고백의 첫 문장입니다.
흔히
첫 글자를 따서 ‘셔마(들어라)’라고 부릅니다.
분도규칙의
서두 역시 ‘들어라’라로 시작됨이 흡사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를 사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새길 뿐 아니라
이
말을 자녀들에게 때마다 거듭 들려주고, 곳곳에 볼 수 있도록 써 놓으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과 일치만이
가정
교육의 핵심이자 살길이며 만사 해결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끊임없이 ‘고백하라’입니다.
역시
끊임없이 사랑을,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해야
믿음도 사랑도 살아납니다.
성경의
언어들은 대부분 사실언어가 아닌 고백언어입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망각의 사람들입니다.
잊어버리기에
끊임없이 고백을 반복함으로 사랑을, 믿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바치는 매일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시간은
그대로
하느님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 사랑을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미사
주례하든 않든, 잘 써지든 안 써지든, 매일 쓰는 저의 강론 또한
하느님
사랑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말씀의 은총’이
나를,
공동체를, 신자들을 지켰다는 언젠가의 깨달음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셋째,
끊임없이 ‘실행하라’입니다.
사랑은,
믿음은 저절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랑의
고백은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믿음을 실행할 때 비로소 수행자修行者입니다.
렉시오
디비나 역시 ‘들음-묵상-기도-관상’에 이어
‘실천’이
붙어야 비로소 렉시오 디비나의 완성이 됩니다.
우리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고백은 하루의 삶으로 확산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끊임없는 사랑과 믿음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기도하고
일하고 독서하고 환대하고 침묵하고 정주하고 하루의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사실
우리 하루 삶중 수행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수행을 통한 ‘마음의 순수’요 ‘내적자유의 삶’에 증진되는 ‘믿음의 힘’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여전히
오늘날의 세대에도 해당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첨단문명의 디지털 시대라도
퇴화하는
사랑과 믿음의 능력이라면 그
문명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오히려
편리함과 신속함이 사람에겐 독이 될수도 있습니다.
다음
복음의 제자들과 주님의 문답 역시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라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공이산이란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중국의 고사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철석같은 믿음의 사람을 도우신다는 뜻이 함축된 고사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약한 믿음, 부족한 믿음으로 귀결됩니다.
계속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선사되는 믿음의 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아멘.
믿음은
곧 실천
-차풍신부-
“네 믿음을
보여라!” 또는 “제 믿음을 키우고 싶습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럴 때마다
고민입니다.
나의 믿음의 크기는
얼마만한지, 어떤 모양인지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믿음은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란 말을 ‘겨자씨 한 알 만한 실천’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겨자씨 한 알 만한
아주 작은 실천이 없다면 어떤 큰일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강한 믿음과 굳센 의지와 용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아무리
제 안에 믿음이 있다 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주장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의지는 알아도 실제로 행한 것은 없으니 그 믿음의 여부도 믿음의 크기도 알 수가 없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으로 실천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차곡차곡 쌓인
믿음은 선한 행동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크신 능력이 나를 통해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마태 17,17)
-오상선신부-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가는
것같고
제대로 안돌아 가는
것같습니다.
개인도
공동체도
사회도
국가도
제대로 길을
못찾고
비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예수님은 이
세대가
믿음이 없는
세대여서
그렇다고
질책하시네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를 누리고 사는
이
세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해 낼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서로간에 신뢰가
없고
이익만
따집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공동체는 거추장스런
짐으로
다른 사람은 나의
협력자가 아니라
이용할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관계를 맺을
뿐입니다.
이렇게 위로는
하느님과의
믿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들 간에는
신뢰가 깨어짐으로써
이
세대는
풍요속의 빈곤을
겪고
비뚤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은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하느님과 신앙의
관계를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살겠다는
표시를 합니다.
오늘 십자성호를
그으며
우리의
믿음을
한번 성찰해 보면
어떨까요?
-한상우신부-
믿음이
약한
제모습을
인정하며
받아들입니다.
믿음이
약한
제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위로하는
것임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치유와
정화의
모든
방향성은
믿음을
향합니다.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겨자씨 한 알만
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언제나 믿음의
초점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출발지도
도착지도
처음도
마지막도
믿음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믿음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리해야 할
위치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고쳐주시려
오신
주님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처와 아픔,
어두움을
뛰어넘는 강한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