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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행불행은 없고 사랑만 있는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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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21 01:21
- 행불행은 없고 사랑만 있는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에 대해 얘기하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어떤 존재입니까?
순하고 순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악을 모릅니다.
그래서 악한 짓을 꾸며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자기에 대해 음모를 꾸며도 눈치채지 못하는 숙맥입니다.
여러분은 숙맥이 뭔 뜻인지 아십니까?
원래는 불능변숙맥(不能辨菽麥) 곧 콩과 보리도 구별할 줄 모른다는 뜻의 말이지만
숙맥이라고 줄여 쓰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어린양은 세상사 측면에서는 너무도 순진하여 칼을 들고 오는 데도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완전히 무지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세상사에 대해 모르고 악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여
자기 목자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사에 대해서는 숙맥이지만 하느님 나라 신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악에 대해서는 악인들보다 잘 몰라도 선과 선하신 하느님에 대해선 더 잘 압니다.
어제 독서 지혜서는 악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지요.
“그들의 악이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이 너무도 잘 아시는 하느님을
지도자들은 율법을 안다는 것 때문에 모르고 그래서 그분이 보내신 당신을
오히려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아무튼 어린양은 세상과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은 잘 알고 그 뜻에 순히 따릅니다.
순진할 뿐 아니라 어린양은 순합니다.
어린양이 순하다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뜻에 순한 것이기에
희생양이 되라는 하느님 뜻에 거역하지 않고 순히 따릅니다.
그렇다면 희생양이 되라는 하느님 뜻에 순히 따른 어린양은
우리가 볼 때 불쌍한데 어린양 자신은 어떨까요?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불행해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희생양이 되신 우리의 어린양께서 행복하실까? 불행하실까?
이런 것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큰 잘못이고 잘못을 넘어 불경일 것입니다.
주님께 슬픔과 기쁨,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사랑만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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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수치를 치유해 주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수치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명예와 수치의 질서를 뒤엎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수치를 치유해 주십니다.
2026년 3월 20일 금요일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뒤, 젊은 시절 어떤 폭력적인(abusive) 사제에게서 학대를 받아 다시금 상처를 입었던 심리치료사 제임스 핀리. 그는 그 고통과 깊은 수치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나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셨음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줍니다:
저는 당시 젊은 시절,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그분 눈에 참되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귀히 여기신다면, 저는 더 이상 그 사랑받는 참된 사람인 '나'를 외면하거나 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부르시는 그 진짜 '나' 자신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죠….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길 위에서, 저는 하느님께서 두려움을 억누르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그 두려움과 수치의 마음을 예수님께 가져오라고 초대하신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 마음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히 여길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지침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대한 단순한 신학적 이해를 넘어, 기도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내적 갈망은 저를 일종의 깨어 있는 꿈처럼 이끌어, 달빛이 비추는 밤에 복음서가 전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홀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시던 그 동산에 홀로 있는 저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리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마음의 눈으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찾아 헤매며, 그분께서 부르시는 참된 '나' 자신으로 살아갈 힘이 저에게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중 저는 달빛 아래 빈터 가장자리에 홀로 앉아 계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저는 그 빈터를 건너 그분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순간, 어깨 위에 얹히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귀에 속삭이듯 저의 깊은 수치와 두려움, 그리고 저의 나약함의 짐에 대해 고백해 드렸습니다….
상처 입고 아파하는 제 마음이 할 수 있는 모든 고백을 다 쏟아낸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까이 끌어안으시며 제 귀에 속삭이셨습니다. 그분의 다음 세 마디 말씀이 저를 해방시켜 주었고, 지금도 그 말씀이 제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런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놀라움과 황홀함 속에서, 제 영혼은 예수님과 제가 모두 기다리고 있던 고백을 드려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가까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습니다. "주님,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는 모든 것이 영원히 확정되었다는 깨달음이 생겨났습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은 우리가 마음 깊이 알고 있는 그 부르심에 얼마나 충실한가로 측정되는 아니라는 것을요. 오직 하느님의 사랑의 척도는 끝없는 자비의 사랑이며, 우리의 흔들림과 빗나감 속에서도 우리를 감싸 안아 당신께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CAC의 매일 묵상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제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질문들이 영적이고 따뜻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제 삶의 초점을 깊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에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로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며, 결코 하느님께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수치심에서 치유되어, 날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완전한 어버이이신 하느님께 깊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Janet C.
References
James Finley, The Healing Path: A Memoir and an Invitation (Orbis Books, 2023), 84–8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lianna Gill,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배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를 환대하며 한 공동체 안으로 맞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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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진정한 믿음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펴 주신 작은 불씨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비록 소심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믿었던 니코네모가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합니다. 그의 소심함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셨을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소심하지만 믿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고 전합니다. 어쩌면 그의 믿음은 단순히 소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짧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이해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니코네모와 깊은 영적인 대화를 나누셨던 것입니다(요한 3,1-21 참조).
그리고 군중 가운데에는 단순한 "찬양의 은사"를 지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쟁하기보다는 경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분은 참으로 예언자시다." "이분은 메시아시다." 하고 고백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래아 사람으로만 규정하려 했습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을 그분의 과거에만 묶어 두어 그분의 참된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 미래가 없다고 부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잡으러 보내졌던 경비병들 가운데도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군중 가운데 찬양의 은사를 지닌 이들과 이 예수님의 지혜를 고백했던 경비병들의 고백은 확신에 찬 고백이라기보다는 니코데모와 같은 짧은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들의 고백은 확신에 찬 고백이 아니라 어렴풋한 믿음의 고백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407)는 이렇게 풍자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가장 어리석은 논거를 내세웠습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서 누가 그를 믿더냐?'" 물론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처럼 악의에 찬 마음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한 가지, 피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믿고자 했던 니코데모를 언급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고, 또 비록 소극적이긴 했어도 예수님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는 어떤 강한 역설이 존재합니다. 반대의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던 자들은 결국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들의 뜻을 밀고 나가는 무모함을 택하게 되지만, 여럼풋하나마 믿음의 끈을 잡으려 했던 이들은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역설 말입니다.
니코데모는 비록 다른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진리를 찾는 진지한 구도자로 드러납니다.
그 마음속에 "사랑의 주님"께서 불씨를 지펴 주셨고, "거룩하신 주님"께서 그의 갈망을 키워 주셨습니다. 점차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며 율법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의해 촉발되고 발전되어 가는 그의 내적 성숙과 용기를 잘 드러내 줍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강력한 확신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이해나마 고백하면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주님께 매달리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실패나 어둠, 그리고 심지어 죄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어떻게든 이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는 분이시고, 그 이해의 폭을 넓혀 주시고 그 이해의 깊이를 더 한층 심오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모한 확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
이런 모습이 보이는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들이나 인도적인 삶에 역행하는 죄를 저지르면서 정의와 선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우리 인류 역사 안에는 많이 있었고, 또 지금도 정의와 선의 실현을 외치며 전쟁과 복수를 불사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우리 인류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도 전적으로 외면한 채 말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자 완전한 확신 속에서 주님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믿음의 끈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더 높고 더 넓고 더 깊은 믿음을 점차로 더해 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펴 주신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기에 겸손의 모습을 취하며, 결국은 그 완성도 우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믿음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소심한 믿음에서 출발한 니코데모나 짧은 이해에서나마 주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로 고백했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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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여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참으로 권위 있고 신비롭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제 안에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당신 사랑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거역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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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보급부대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군인도 먹을 것과 무기가 끊기면 싸울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러시아에서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길게 늘어진 전선에 보급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지원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혼자 피지 않습니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가 있고, 햇빛을 받아 묵묵히 광합성을 하는 잎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을 때 비로소 꽃이 피어납니다.
지난 2월 저는 플로리다 키웨스트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즐겁게 쉬고 왔지만, 그 여행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항공권과 숙소를 준비해 준 신부님, 운전해 준 신부님, 음식을 준비해 준 형제님, 늦은 밤 지친 저희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 주신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저는 꽃처럼 즐거웠지만, 누군가는 뿌리처럼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여행의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하느님께 자신의 송사를 맡깁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주님,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억울함과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은 국제사회의 연대를 통해 도움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침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정의는 더디게 보일지라도 결국 하느님께서 세우십니다.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사랑이 실천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자주 혈연, 세대, 지역, 학연이라는 틀에 갇혀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틀을 넘어 모든 이를 품으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좁은 틀을 허무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단식, 희생과 자선을 통해 우리는 ‘보이는 꽃’이 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달라스에도 봄꽃이 피고 있습니다. 말없이 싹을 틔우는 새싹을 보며 묵묵한 충실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뿌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꽃이 되기 전에 먼저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박수 받기 전에 먼저 섬겨야 합니다. 드러나기 전에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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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26
박 베로니카 26.03.21 08:01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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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언자 가운데 한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조금 특별한 유랑 설교가라고 하는가 하면, 사기꾼이요 사이비 교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합해보니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분께서 메시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랜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실 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으로 인정하며,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복음 7장 41절)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잘 나가던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경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저주받던 못배운 군중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하던 이들은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요 석학들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최고 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 뭐합니까?
결국 그들이 목숨걸고 배운 바가 그들 앞길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그 잘난’ 명함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어떤 후보의 명함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없습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별의 별것 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웬만한 이력서 저리가라 입니다.
엄청난 학벌과 화려한 이력 앞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환한 미소로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한다는 말은‘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국민의 충복(忠僕)이 되겠다.’입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신과 변절을 밥먹듯 합니다.
국민은 하나도 바라보지 않고 자신만 바라봅니다.
국민의 충복은 무슨? 국민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나름 엘리트 집단의 최고봉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공인으로서의 품위나 성숙도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유치해서 차마 봐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비참함과 추함은 노력의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 앞에서 부단히 고민하고 성찰해야 마땅합니다.
정확한 식별을 위한 기도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시금 촉각을 곤두세우고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들뿐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도 혐오스럽고 심기가 불편해지는 위선이나 이중성, 허세와 거짓, 천박함의 끝판왕, 언행 불일치의 인물은 어떤 사람인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진실성과 진정성을 갖춘 사람, 품위와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게 너무 지나친 기대라면, 적어도 기본과 상식이라도 갖춘 사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성을 갖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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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7,40–53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은 갈라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분은 참으로 예언자다” 하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갈릴래아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겠느냐?”라며
출신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진리를 향해 열리기보다
자기 확신과 편견 속에서 분열됩니다.
그때 성전 경비병들이 보고합니다.
“저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빛보다
자기 권위가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흩어져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앞에 두고도, 사람은 ‘나뉠 수’ 있다.
성 암브로시오는
신앙의 적은 단순히 무지가 아니라
닫힌 마음의 교만이라고 봅니다.
진리는 귀를 설득하기 전에
마음을 열어야 들어올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공동체의 분열을 두고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고 읽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사람은 기준과 출신과 규정으로 재단하기 시작하고,
그때 공동체는 쉽게 갈라집니다.
이웃종교/생태의 날인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 앞에서
먼저 듣는 사람인가,
아니면 먼저 재단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자연을 대할 때도
‘내 기준’으로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이 말은 단지 예수님의 웅변이 아니라,
그분의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이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말 앞에서
분열을 선택하지 않고
모이는 길을 선택합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가르치듯,
진리는 논쟁으로 이기기보다
겸손과 사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주님,
제가 편견으로 당신을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듣는 마음을 주시고,
사랑으로 공동체를 모으게 하소서.
자연과 이웃 앞에서
겸손한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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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인품 없는 신앙은 허수아비 신앙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요사이 최근에 카톡을 통해 예비 수녀님이 되시려는 자매님과 신앙 관련 다양한 영성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소 식별 과정에 있습니다. 2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상당한 신앙 관련 영성지식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가지고 계시는 걸 보고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톡으로 이야기하면서 가진 느낌을 지난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성미가 뿜어져 나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첫날 이후에도 간간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젠 화장장에서 연도를 하고 있는데 톡이 왔습니다. 그땐 복음에 나오는 성경 영어에 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1장 19절에 나오는 내용을 질문하셔서 중간 중간 설명해드렸습니다. 어제 오전에도 좀 많이 톡을 했습니다. 어젠 제가 자매님께 진심어린 칭찬 정확하게 말하면 격찬과 찬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묵상글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원래 생각한 게 있었는데 변경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자매님과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ㄴ낀 걸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두고 존경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린 보통 존경을 표할 때 대부분 원래는 나이와 상관없지만 통상 그래도 나이가 자기보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만약 나이가 어리면 이럴 땐 '대단하다'라고 주로 많이 표현합니다. 저 역시도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번에 이 자매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의 제 신념과 신조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정확한 나이를 언급하시지 않았습니다. 90년 초반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약 세 살이 에누리가 있어서 저랑 정확한 차이를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최소 20년은 어립니다. 이 정도 나이를 가진 자매님께 제가 지금까지 누군가에 대해 찬사를 드렸어도 이렇게 과하게 찬사를 드린 건 처음입니다. 제가 존경스러울 정도로 찬사를 보내드렸습니다. 첫날 이야기했을 땐 지성미에 놀랐지만 그 이후에 이야기했을 땐 인품에 놀라웠습니다. 감히 인품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매님을 통해 인품을 많이 묵상해봤습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겸손이었습니다. 겸손도 그냥 단순한 겸손이 아닌 그야말로 완전히 몸에 배여 있는 어떻게 생각을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서 이럴 땐 이렇게 내가 대처를 해야겠다고 인식해서 행동으로 나오는 그런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연반사적으로 당연히 나오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엄청 놀랬던 것입니다. 어제는 더 놀나웠던 게 사실 저는 자매님을 향해 어떤 부분에 대해 대단한 면을 칭찬을 했는데 자매님은 그 칭찬을 대화중에 나온 다른 분이 있었는데 그분을 제가 칭찬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화를 하는데 좀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가만 보니 자매님이 제가 자기를 향해서 하는 줄 모르셔서 다시 그 질문에 대한 답장을 톡으로 표시해 " 이 대답은 자매님께 대한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놀라워하시면서 "과찬이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자신을 칭찬하는 걸 정말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그외에도 겸손이 묻어나는 게 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봤을 때 신앙에 입분한 나이와 또 세상 나이를 감한한다면 요즘 현 시대에 정말 보기 드문 신앙인이라고 확신이 들 정도로 감탄을 해 제가 존경을 한다고 표현했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정말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한 게 이런 인품은 신앙으로 길러지는 것인가입니다. 이걸 묵상하기 앞서 자매님이 영세를 받으신 시간을 먼저 보면 이제 겨우 2년 반 남짓된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운전으로 말하면 초보신앙의 수준에 머물 수 있는데 사실 지식이 신앙을 판별하는 건 아니지만 지식만 본다고 해도 가톨릭에서 평생을 한 보통의 평범한 사람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솔직히 평생을 해도 이 자매님 반의 반도 안 되는 사람 수두룩합니다.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걸 우쭐해하지 않고 담담히 상대로 하여금 위축이 되지 않게끔 배려를 하면서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더 감탄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은연중 그런 걸 통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이건 인품도 인품이지만 사실은 지혜롭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겸손과 인품을 갖추었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한데 지혜롭지 못하면 이게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게 교만의 모습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무리 겸손 있게 처신을 해도 지혜롭지 못하면 그만 겸손은 어쩌면 위장된 겸손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다는 걸 보면 정말 지헤는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필요한 게 아니고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척도인 겸손과도 관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냥 할 게 아니라 항상 지혜롭고 슬기롭게 매사 모든 행동에 신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그 자매님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 자매님이 신앙생활을 한 기간만 놓고 판단했을 때 인품이라는 건 신앙의 시간으로 신앙이란 걸 통해 길러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면 그 가설은 거짓 가설이 될 것입니다. 이 자매님의 경우를 보면 신앙에 의한 것보다 신앙 이전에 원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인생관과 또 그동안 세상에 살면서 가진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성장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나 그외 다른 외부적인 환경으로 인해 훈육된 교육, 이런 전반적인 결과물로 이루어진 결정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면 똑같이 신앙을 시작해도 이런 게 준비가 된 사람과 이런 게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 같이 신앙을 시작했다고 하면 시작은 같지만 성장 속도는 완전히 차이가 나게 되는 게 바로 이런 점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인격은 신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성장하려고 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이건 바로 신앙 이전에 우리는 신앙과도 별개인 것에서 신앙을 잘 성장시킬 수 있는 인품이 되도록 신경을 써야 그나마 좋은 신앙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보나 세상 사회학에서 보나 인품의 결정은 어떻게 발생되는지에 관한 학문적인 자료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 다르지만 바로 방금 언급한 이 사실은 어느 쪽이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결론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우리가 단순히 믿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신자, 그 신자도 다름 아닌 제대로 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일반적인 신자의 형태인 주일미사 참례, 신심단체활동 그리고 신자로서 지켜야 하는 교회가 권장하는 규범 그와 같은 것만 해서는 훌륭한 인품을 소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자칫 허수아비 신자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신앙인이라도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고 품격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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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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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15 추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7,40-53).”
1)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라는 말은, “저희는 그분의 말씀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껴서 몹시 놀랐다는 뜻입니다.
성전 경비병들과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그 힘에 자기들이 압도당하게 되자 놀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또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놀라기만 하고 끝났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에서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 계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고,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2) ‘니코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등장했었던 사람입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3,1-2)”
‘바리사이’이며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48절의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3)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라는 니코데모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지 같은 것만 문제 삼아서 예수님을 안 믿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는 조작되었다고, 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사도들의 그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족보나 출생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나 자신’이, 또 ‘내 인생’이 얼마나,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현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새 인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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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00 추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예전에 한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말입니다. 마음 속에 자리잡은 탐욕이 나 자신을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배워 알고 있지요. 인간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자신이 굉장히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사실 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려 행동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는 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육체적 욕망에 따라 잘 먹고 잘 살려고, 즉 ‘생존’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너무 커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당장의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나중에 큰 손해를 감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탐욕’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는지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 때문에 자기들의 ‘종교 지도자’로써의 체면과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이 불편하고 기분 나빴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이익과 손해라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분이 지니신 ‘신적 본성’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머리로 안다고 해도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는 이유를 붙들고 늘어지며 완강히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행동과 기적들을 ‘표징’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이들은 성경에 정통하지 못해도, 율법을 잘 몰랐어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분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적 ‘권위’가 있음을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이 그랬고, 수석사제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이 그랬으며, 마음으로 예수님을 흠모했던 니코데모가 그랬지요. 그들의 마음 속에는 구원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고, 주님을 통해 실현될 참된 행복의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갈망과 희망 덕분에 짙은 어둠 속에 앉아있었음에도 구원의 빛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마음 속에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한 일들이 나와는 상관 없는 ‘남의 일’, 나에게 특별히 이득될 게 없는 ‘별 볼일 없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잘 살펴야겠습니다. 그 믿음이 차가운 머리 속에만 머무르다가 바짝 말라 사라지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그 믿음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는 내 마음 안에 간직하고, 그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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