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소설 한권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슬픈 미나마타’라고 번역되어 나온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고해정토(苦海淨土)’이다.
이시무레 미치코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다. 참 좋은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읽히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보기에는 이 작가야말로 ‘새로운 작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근대의 일본문단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모두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 작가들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도 대학출신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일본의 근대문학은 거의 완전히 대학 출신, 그것도 소위 명문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 돼왔다.
이것은 근대 일본문학의 큰 특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지식인 중심의 이야기, 엘리트 특유의 세계 인식이나 자의식이 지배하는 문학이 주류를 형성해 왔다.
나쓰메 소세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있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작가들이 극히 엘리트적인 언어, 서구화된 논리와 이성적인 언어로 세상을 보고, 인간 경험을 보는 공통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반서구적인 논리를 펼 때도 마찬가.
전통적 일본 정신의 부활을 외치면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을 때 군국주의 프러시아 장교복 차림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시마는 천황주의자이되 굉장히 서구화된 엘리트다.
일본 문학의 이런 경향은 지금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높이 평가하는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나 재일조선인 작가들은 예외인 듯하지만, 따져보면 그들도 결국은 엘리트 작가다.
좀더 주변부의 소외된 삶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비판정신에 있어서는 돋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비판적 정신 역시 엘리트의 언어와 논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물론, 엘리트 문학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이게 시효가 끝났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1960~70년대를 거치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계보를 이어받는 엘리트 작가들의 임무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고도경제성장에 의해서 소비주의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엘리트 작가들의 진지한 작품이 설 자리가 없다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고도산업사회가 된 상황에서 근대 초기의 비판적 지성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현대사의 큰 역설의 하나는 서구화· 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서 성취해낸 순간 그 결과가 바로 수습하기 어려운 재앙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일 수 있는데, 어쩌면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심하게 앓아온 동아시아 사회가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이 제구실을 하자면 이런 역설을 직시해야 한다.
근대문학의 오랜 습성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생각해왔고, 문학이라고 배워왔던 모든 것이 사실은 근대주의 논리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근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오히려 이런 맥락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외적이라고 생각되는 작가가 있다.
그게 바로 이시무레 미치코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근대의 엘리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면, 이시무레는 그 근대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묻는 작가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도성장 이후의 대표적인 작가가 아닌가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는 사실상 문학다운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보았다. 아마 그가 이시무레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문학의 역사적, 문명사적 의의를 간파할 시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좀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시무레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다.
현재 이시무레의 작품은 몇편이 서양말로 번역돼 있다. 서양인들 중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꽤 있다. 그런데 그런 서양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일본 독자들도 사실은 별로 믿을만한 독자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독자들은 대개 이시무레를 공해문제에 민감한 작가 정도로 보고 있기가 쉽기 때문이다.
실은 전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작가다.
그녀의 소설 ‘고해정토’를 출판하면서 ‘슬픈 미나마타’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런데 이렇게 제목을 변경함으로써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놓쳐버렸다. 이것은 공해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도, 환경보호를 얘기하는 소설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더 깊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시무레 미찌코는 야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작가가 되었다.
그녀가 문학을 보는 시선은 근대적인 것도 아니고 일본적인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객체와 육화되는 순수한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