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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Activist, 비느하스
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1. 비느하스는 누구인가?(출 6:25)
구약성경에 보면 세 명의 비느하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제일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부터 소개한다면, 에스라 때에 에스라를 도와 일했던 사람의 아버지 이름이 비느하스이다(스 8:33). 그리고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무엘이 어렸을 때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 이름이 비느하스이다(삼상 1:3; 2:34; 4:4, 11, 17, 19; 14:3).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비느하스가 이 글의 주인공으로 그 또한 제사장이며, 출애굽기 6장 25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고 그가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느하스는 아론의 네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출 6:23) 중에서 엘르아살의 아들로 아론의 손자요, 모세의 조카이다(참고: 대상 6:4, 50).
아론의 후손으로 비느하스는 자연스럽게 제사장의 반열에 속한다. 민수기 3장 32절에 보면 비느하스의 아버지인 엘르아살은 ‘레위인의 족장들의 어른이 되고 성소를 맡은 자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상 9장 20절에 보면 비느하스는 “그 무리를 거느렸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무리’라는 것은 성막을 지키는 문지기들로서, 그들을 관할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바알 브올 사건의 영웅(민 25:1∼18)
바알 브올 사건이 나오는 민수기 25장은 민수기 22∼24장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다. 민수기 22∼24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호수아를 시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적인 강성함을 보고 겁을 먹은 모압 왕은 전쟁 대신 발람이라는 이방인 술사를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 번 저주하도록 시키는데, 하나님께서 발람의 세 번의 저주를 세 번의 축복으로 전환시키시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람은 모압을 향한 궁극적인 심판까지도 예언하며 메시아에 대한 중요한 예언까지도 하게 된다. 민수기에서 가장 감격스럽고 은혜스러운 부분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22∼24장의 발람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민수기 22∼24장은 이스라엘이 죄의 대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모압 왕의 음모로부터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서두를 열고 있다(1절). 이것은 단순한 음행이 아닌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 브올에게 부속된지라.”(2∼3절)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바알 브올’이라는 신이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겼던 주(主) 신의 이름이고, ‘브올’은 장소 이름이다. 즉 ‘브올’이라는 곳의 신을 ‘바알 브올’로 명명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브올’이라는 장소가 다름 아닌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선택한 곳 중의 하나였다: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에 이르니”(민 23:27∼28)라고 되어 있다.
결과는 당연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여호와 앞에 매어 달고 바알 브올에게 부속된 자들을 죽일 것을 명령하셨으며, 염병으로 백성들을 치셨다(9절 참고). 그러한 와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진행되는데, 민수기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6~8절)고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백성들이 울고 회개하고 있을 때에, 그것도 지도자인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 여인과 음행을 자행한 이스라엘 남자도 상식 수준을 넘어선 행악의 극치를 보여 주었지만, 또한 제사장인 비느하스가 그들의 음행 장면을 덮쳐서 두 사람의 배를 창으로 꿰뚫은 사건 또한 우리로서는 어떻게 비느하스의 행동을 받아들여야 할지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유대인 해석에 따르면 비느하스가 그들의 생식기를 찌른 것으로 보고 있다. 죄에 걸맞는 형벌이라고나 할까. 다행인 것은 본문이 알아서 해석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10∼11절).
또한 염병이 그쳤다고 되어 있는데, 이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이었다는 것(9절)은 염병이 그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멸할 수도 있었던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로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12∼13절).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손은 영원한 (대)제사장의 위치를 누리게 된다(대상 6:4∼15; 왕상 2:26∼27- 엘리는 비느하스의 직계가 아니었음).
후에 이 사건을 계기로 미디안을 칠 때에(민 25:17; 31:1∼4), 비느하스도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모세가 매 지파에 일천 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라고 기록하고 있다(민 31:6).
민수기 26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 2세대의 인구 조사를 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26:64)라고 기록함으로 25장 사건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만 사천 명”, 25:9)이 제 1광야세대들의 죽음을 기록한 마지막 장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끝까지 죄를 짓다가 죽어 갔다는 안타까운 인상을 남긴다. 마치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새로운 리더로 부상한 것처럼,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은 새로운 세대에게 거는 기대감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이러한 비느하스의 행동이 저에게 “의”(righteousness)가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저희가 또 바알 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시 106:28∼31). 그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Activist(행동 요원)였다.
3. 요단 가에 쌓은 단(altar)이 일으킨 사건의 해결사(수 22:10∼34)
세월이 흘러 비느하스가 구약에서 다시 등장할 때에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호수아를 리더로 하여 정복을 마치고, 땅의 분배까지도 다 끝난 상태에서 일어난다. 전쟁이 마치고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 속해 있는 세 지파들(르우벤, 갓, 반[半] 므낫세; 15절)에게 귀환 메시지를 한 후(수 22:1∼9) 그들을 돌려보낸다. 그때 그들이 가면서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단을 쌓고 돌아가는데, 그것이 상당한 크기였다는 것이 “볼 만한 큰 단”(10절)이라고 기록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곳은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어야 함을 신명기를 통하여 여러 번 강조하셨고(신 12:5∼6, 11, 14, 18, 26), 이미 여호와의 단은 ‘실로’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요단 동편 지파들이 세운 단은 당연히 배역한 행위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 때문에 요단 서편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12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요단 서편 지파들이 진상 파악을 위해 대표단을 구성하여 요단 동편으로 보내는데, 그때 선택된 인물이 비느하스이며, 그와 각 지파들을 대표하는 두령 열 명이 함께하게 된다(14절).
그들이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이렇게 과격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통하여 배운 교훈의 결과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두 가지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사건만 언급한다면 그것이 바로 위에 기록된 민수기 25장의 ‘바알 브올’ 사건이었다: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수 22:17∼19). 출애굽 제 2세대에게도 바알 브올의 사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끔찍한 사건이었으며, 그들은 여호와께 배역한 결과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알 브올’의 영웅이었던 비느하스가 여기에서도 문제의 해결사로 뽑힌 것이다. 진상 파악의 결과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단을 세운 이유는 강을 경계로 둔 지파들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유대감을 돈독히 하며, 함께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설명한다: “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열조가 지은 여호와의 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28절).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에서 하나님을 ‘함께’ 더 잘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이 단을 그것의 증거로 세운 것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요단 동편, 서편 지파들(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경외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인하여 서로 이러한 오해들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비느하스는 내전이 일어날 뻔한 이 중대한 사건의 아름다운 해결사로서 일을 잘 처리하고 은혜로운 결말을 맺는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방백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러 회보하매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거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 하지 아니 하였더라.”(31∼3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activist가 되어야 한다. 민수기에 나타난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하심을 대변하여 행동에 옮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대가로 그의 자손은 영원한 (대)제사장의 위치를 누리는 특권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비느하스에게 배울 점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신정 사회가 아닌 엄격한 준법 사회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법의 절차 없이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마음대로 행동에 옮기라는 것으로 교훈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메시지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혈기가 많은 한국인들의 성정으로 개인적인 문제를 영적인 의분으로 착각하여 마구 행동한다면 기독교의 입지는 더욱더 곤란해질 것이며, 사회는 질서가 잡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혼탁해질 것이다.
여기에서 비느하스의 행동을 신약적이고 현대적인 표현으로 옮긴다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요즈음 ‘정화’, ‘정의 실현’, ‘공명’이라는 용어들이 붙은 감시 기구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사회를 공명정대하게 만들기 위하여 각 분야에 관계된 행동 요원들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가 혼탁해져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세상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명을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activist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정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한 가치와 정의, 인격, 인간 관계와 도덕관들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가치체계로 자리잡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빛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가시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저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구나를 보여 주는 삶이다. 또한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분명하게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점점 ‘가치 중립적’이고 ‘도덕 중립적’(절대 기준을 부인하는 것)으로 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움츠려들지 말고, 더욱더 말씀 중심(Scripture-centered)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외치는 하나님의 activist들이 되도록 헌신해야 한다.
둘째, 우리 모두는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굳이 구약을 이야기하다가 신약의 이 말씀을 인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며’(고전 9:23), 하늘나라의 ‘상’ 얻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절제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9:24∼26).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 9:27).
어떻게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상 받을 자격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그 예로써 과거 구약에 일어난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다(고전 10: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도하에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식물인 만나를 먹었으며, 기적으로 낸 ‘신령한 음료’를 마셨고, 온갖 신령한 경험을 다 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백성들이었으나 결국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민수기 25장의 ‘바알 브올’ 사건을 언급하며(고전 10:8),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라는 것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구약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되어졌다’(고전 10:11)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삶을 절제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조차도 그것을 ‘두려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조심스럽게 삶을 경영하여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연이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고 있다(고전 10:12).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삶을 절제하고, ‘우리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진노하시는 분이신가를 보면서 또한 경계로 삼아야 한다. 민수기 25장 사건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가르쳐 준다. 자기 백성을 복 주시고 지키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지만(민 22∼24장), 죄에 대하여는 분노하시는 분임을 철저히 보여 주신다. 이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가 이미 죽어 나갔고, 비느하스의 끔찍한 행동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려던 것을 멈추신 것을 보면 죄를 미워하시는 강도를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죄에 관한한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민 25:11)을 품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최대의 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기독교인들은 ‘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야 한다. 우리는 현재 ‘전쟁 중’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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