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패배주의(Revolutionary Defeatism) 이론의 존재를 일단 주지하셔야 합니다.
혁명적 패배주의는 제1차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그 기본틀이 잡힌 이론인데, 당시 맑시스트계열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계급투쟁론 + 제국주의론 + 국제주의] 의 세 가지 면모가 (어느 면에 있어) 가장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그래서 그만큼 무시무시한) 형태로 발현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본 골자는, 쉽게 말하자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각자 자기 국가를 쳐부숴라)"입니다. 즉, 여러가지로 터져버릴 조짐이 보이는 대전쟁(제1차세계대전이 될...)의 조짐은 맑시스트들에 있어 자본주의를 멸망시킬 "예언된 최후의 전쟁"의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실제로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전쟁이 되었지요... 제2차세계대전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따라서, 당시 제2차 인터내셔널의 주요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모았는데:
(1)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및 그 대립관계로 인한 것이다 (제국주의론)
(2) 자본가들의 땅따먹기 전쟁에 노동계급이 협력하고 희생될 이유가 없다 (계급투쟁론)
(3)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의 지배의 도구로 이용되는 국가체제를 거부하며 국제적으로 단결해야 한다 (국제주의론)
(결론) 따라서, 상기 3가지 요소를 고려한 바, 예상되는 대전쟁에 있어 노동계급이 취해야 할 행동은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이 전쟁에결코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각자 자기가 속한 국가를 패배에 이르게 함으로써 전쟁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전쟁에 돌입한 모든 국가를 동시에 패배시키고 오직 전세계 노동계급만이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 이게 왜 진실로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이고, 그만큼 무시무시한 이론인가를 이해하시겠죠.
아무리 맑시즘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시기라고 해도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오늘날도 여전히 마찬가지고) [국가]라는 틀을 머리 속에서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애국주의를 경계한다든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거부한다든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내던지고, 오직 다 같은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만을 갖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깨부수기를 종용하는 것이니까요. 제아무리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유대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러한 혁명적 패배주의는 반대편 시각에 있어서는 '능동적인 배신행위'이자 '직접적인 국가반역행위'로 생각되는 것이었죠.
결과적으로, 현실은 시궁창. 노동계급은 전쟁이 발생하자 혁명적 패배주의에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반동으로 돌아서며 일제히 애국주의의 물결에 합류 - 역사발전의 현 단계에 있어 인간이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버리고 오로지 계급으로써 자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맑시즘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은 중요한 화두가됩니다)
문제는, 레닌이 바로 러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열렬한 혁명적 패배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종종 레닌을 엄청나게 냉혹/잔혹하고 비정한 지도자로 그리는 프로파간다가 많은데 (예컨데, 황족의 근절을 결정한 에피소드 등을 근거로...), 사실 냉혹의 레벨을 따지자면 "권력을 향한 잔혹" 스탈린과, "이상을 향한 냉혹" 트로츠키 두 사람에 비해 레닌은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 아래 지극히 냉정한 결론을 내리면서도 순수한 맑시스트적 이상을 결코 버린 적이 없었고, 이는 여러 중요한 고비마다 그에게 '넘어서는 안되는 도덕적 선'을 지키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에 뛰어들자마자 줄기차게 레닌이 주장하고 시도한 것이 바로 혁명적 패배주의입니다.
...
사실, 1905년 혁명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을 1917년의 2월혁명, 그리고 결과적으로 1917년의 10월혁명까지 이르게 만든 것이 러시아의 제1차세계대전 참전이었고,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있어 거의 재앙 수준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대한 시각이야말로 당시 각 정당 및 파벌의 사고방식 및 이념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1)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부르주아 정당 까데(KD)는 서구의 동맹국들과의 신의 및 애국주의를 내세우며 러시아가 끝까지 제1차세계대전에 남아있어야 함을 주장했고
(2) 농민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아나키스트 정당인 사회혁명당은 전선에 나가있는 병사들이 곧 농민인 만큼, 이들의 희생과 노고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제1차세계대전을 러시아가 계속 수행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3) 사회민주당의 경우, 사회민주당 우파 및 멘셰비키들은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지만, 그 대신 가능하면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유리한 조건으로 독일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전쟁을 계속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냅니다.
(4) 이에 대해, 당시 모든 정당 및 파벌 중 유일하게 "어떠한 조건도, 이유도 필요 없는 즉각적인 정전협상"을 주장한 것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었고, 당시 상황에서 그것이야말로 민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전선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은 땅되기에 그린 선이 어떻게 이리저리 움직이는가 따위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하루 빨리 죽고 죽이는 전쟁을 끝내기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1917년 혁명 이전까지는 당연히 (4)번 세력의 견해는 아웃오브 안중, (1), (2), (3) 모두 일치단결하여 "어쨌든 지금은 전쟁 계속해야 한다"는 쪽을 택했습니다.
"혁명적 패배주의에 따르자면, 오히려 볼셰비키도 전쟁의 지속을 요구해서 나라를 더 위태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사실 그건 혁명적 패배주의라기 보다는 동정심이나 도덕 같은 것은 아예 내다버린 마키아벨리주의죠.
기본적으로 '혁명적 패배주의'가 맑시스트 이론의 일부인 이상, 전쟁은 그 전쟁으로 인해 증폭되는 사회적 압력, 그리고 민의를 분출시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계기"이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레닌의 생각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자본가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사회가 피폐해지고 노동계급이 고통받는다면 그것을 기회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중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그 현실을 무시하고 오로지 '혁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하여 전쟁의 지속을 외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소리죠. (민중이 힘을 낼 수 있어야 혁명이고 뭐고 있는거지, 그저 민중 열받게 만들겠다고 그 민중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전쟁을 계속 이어지게 만든다는 것은 사회주의자 자격실격이다~ 라는 정도..?)
따라서, 볼셰비키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 앞에 내세운 가장 큰 약속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을 끝내겠다"였습니다.
그 약속 지키려고 감수한 희생이 바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인거죠.
첫댓글 역시 총통각하의 내공은 하악하악(애널 썩킹 스킬시전중)
비슷하게 알고 있어도 이렇게 명료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면 남는 사람은 닥버로우죠 ㅜㅜ
혁명적 패매주의라;.. . 관대한 답변 감사히 읽고 갑니다ㅜ
잘 보고 갑니다. :)
헐 엄청난 생각이네 그러면 레닌 사후 이후에는 전부 다 얼굴철판만 레닌흉내고 개사기꾼투성이인건가요 ㅡㅡ;;;?
동물농장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