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유교 문화를 이어온 성균관이 놀라운 발표를 했다. 다름 아닌 ‘추석 차례상 표준안’이다. 표준안을 보면 수저와 잔, 송편이 뒤쪽에 나물과 구이, 김치가 중간에 몇 가지 과일이 제일 앞에 있다. 보기만 해도 깔끔하고 단출하다. 성균관에서는 한 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추석 차례상을 차려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동안 대부분의 국민들은 추석 상차림을 간결하게 하고 싶어도 행여 돌아가신 조상님께 결례가 될까봐, 후손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봐, 그리고 집안의 어르신들이 싫어하실까봐, 이런 눈치 저런 눈치 보며 망설였다. 그런데 유교를 관장하는 성균관에서 심판을 자처하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최영갑 위원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예의 근본정신을 다룬 유학 경전 『예기(禮記)』의 ‘악기(樂記)’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합니다(大禮必簡).” 예(禮)의 그릇은 형식이고 격식이지만, 그 그릇에 담는 내용물은 정신이고 마음임을 대례필간의 네 글자는 말하고 있다. 더구나 큰 예법일수록 마음을 더욱 중시한다고 했다. 형식은 간결하고, 마음은 그득하게 말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빚어진 명절의 후유증이 너무 컸다. 성균관 측은 이런 고백도 덧붙였다.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 차별이란 용어가 난무했다. 심지어 명절 뒤끝에는 이혼율 증가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을 모두 유교 때문이라는 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 유교의 중추 기관인 성균관은 이러한 사회 현상이 잘못된 의례문화에 기반을 둠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관행처럼 내려오던 예법을 바꾸지 못했다.”
제사와 명절 차례 등은 모두 유교 문화다. 이번에 성균관에서 내놓은 추석 차례상의 가이드라인은 여러 모로 놀랍다. 명절 때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전을 부치느라 고생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은 차례상에 꼭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또 차례상에 음식을 올릴 때,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등을 따졌는데 그런데 이런 기준이 예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퇴계 이황의 종갓집 제삿상을 보면 밥과 국, 전과 포, 과일 몇 개를 준비할 뿐, 상다리가 휘도록 차리지 않는다. 원래 명절 차례상은 간결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돈을 주고 양반을 산 사람들이 부쩍 늘면서 자격지심에 차례상과 제사상을 거하게 차렸다고 한다.
종교의 역사도 그렇다. 처음에는 마음과 정신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걸 지키기 위해 제도와 격식이 생겨났다. 마음과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형식과 제도만 남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건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이 역시 처음에 안식일이 생겨난 이유는 망각해 버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격식만 남아버린 것이다.
이걸 뚫어본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추석 차례상도 마찬가지다. 추석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추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백성호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