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고 틀린 게 아니다.
각성 스님 | 마곡사 공주포교당 주지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 그는 내(我)가 아니다. 그는 나의 자아(我體)가 아니다.
-상윳타니까야-
지난 겨울 어느 날 늦은 강의를 마치고 밤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기 위해 일시에 서둘러 빠져나온 승객들과 한데 엉켜 택시 잡기란 쉽지 않았다. 요행히 내 차례가 되더라도 행선지가 마포라서 장거리 손님을 고대하며 기다렸던 기사님이 애써 한숨을 삼키며 내색하지 않으려는 체념이 무안하기도 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얼기설기 골목의 지름길을 더듬어서 만리재를 넘어가던 도중에 1톤 트럭이 지척 거리에서 멈춰 섰다. 한 중년 부인이 내리더니 우연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인적이 끊긴 시간에 고갯마루에서 걸망을 맨 잿빛 승복의 출현에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고개를 내려가고 있는데 나의 등 뒤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다보니 그 여인이 언덕에서 빈도를 애처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복음의 미션을 던졌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로 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필자가 겪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해야 할 것인가. 병적 증상으로서 신앙은 미신과 맹신 그리고 광신이 있다. 우선 긴급하게 제어되어야 할 태도는 단연 광신의 사회적 폐해일 것이다.
흔히 우리말에서 ‘다르다’를 ‘틀리다’로 잘못 쓰곤 한다.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해 서둘러 오류로서 부정하고 싶은 의지의 판단 개입이 낳은 일상의 언어 습관 탓이다. 여기에 다시 ‘좋다’의 가치 판단이 부가되면 점입가경의 왜곡된 인식을 낳는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덮어놓고 맹목적으로 틀린 것으로 정죄하고, 좋으면 미치도록 좋고 싫으면 죽기보다 더 싫은 부침의 심리현상이 우리 일상의 생사生死이다. 무명無明이 배경이 되어 행行이 조건화되고 행이 동기화되어 식識이 유전流轉하는 생사고苦의 문제 상황이 활성화된다. 여기에 믿음이 결부되면 미신은 맹신을 낳고 맹신은 곧 광신을 낳는다.
만리재의 풍경은 분명히 광신도의 배타적 신앙 양식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승복을 입은 타종교의 종교 지도자에 대한 교양인으로서 인간적 예의에도 어긋나는 몰상식한 행위였다. 하지만 광신적 배타주의의 긍정적인 속살을 들여다보면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 고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잿빛 서울 하늘 아래에서 그녀는 진정으로 나를 안타깝게 염려했으며 구원을 간절히 빌었다. 무관심한 거리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손을 내미는 은총의 순간이었기에 화낼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고단했을 노동의 시간의 끝자락에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신비한 종교체험의 차원에서 ‘나와 너’는 만났다.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견해와 가치를 존중해주는 공감과 소통의 결핍은 안타깝다. 어우러지는 회통의 성숙된 태도를 길러야 한다. 뒤집어 입어도 되는 양면 외투가 있는데, 그녀의 속 살림은 아름다웠으나 바깥 살림은 비루했다. 그녀가 베푼 영적 환희와 자비심을 걸망에 가득 안고 고개를 내려왔다.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