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제 노인과 소년을 팔아먹도록 하자
이송우
십오 년 징역형 아버지 면회를 다녀오던 여덟 살 노인이 내 방에 들어왔어 수업 준비물 챙겼니 허리띠 잘 꿰었고 신발은 밖을 향하도록 해 노인은 아비 없는 나와 남편 없는 어미를 걱정했어 교사 월급 빠듯한 어미의 외상값을 갚기 위해 선생님께 전할 학생회비를 빼돌리라 지시하곤 노인은 아비처럼 공부해서 입신하라고 방과 후 독서 지도를 했지 누구와 어울리지 않도록 나는 공부해서 감옥 가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노인을 거스르진 않았어 노인마저 떠난 텅 빈 방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
티없이 해맑은 소년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은 여전해 겉과 속이 똑같은 욕망에 충실한 프로이트의 원초아를 읽었을 때 소년이 살짝 웃었어 뭔가를 들켰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더라고 문을 열면 허풍선이 남작 Baron 철들지 않는 Peter 라만차의 돈키호테 Alonso 청년 Karl이 차례로 돌아다보는 방 소년은 누구도 뭐 하나 부럽지가 않았어
애비 에미 다 팔아먹었으니 이제 뭘 팔 거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곁눈질로 노인과 소년을 살폈지 내가 팔 거라곤 노인과 소년만 남았거든 그때 그토록 환하게 웃는 노인과 이토록 새침해진 소년을 처음 본 거야 노인은 이제 내 걱정하는데 질렸고, 소년은 본격적으로 놀아보고 싶었나 봐 흠 그래 이제 노인과 소년을 오또케 팔아먹을까?
유신의 기억 3
- 수인번호 3208
3208,
이 숫자가 무어냐?
우체국 직원에게
그것은 우리 아빠 미국 주소라고
자랑스레 답했다
고개를 젓는 직원을 뒤로하고
어린 삼 남매는 산을 넘어 돌아왔지만
그날 빡빡산은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
어머니가 알려준 수인번호 3208
한국으로 이사한 미국 동네 주소라 믿었는데
이 숫자가 뭐예요?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미국 가신 아버지 주소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맞아, 그건 라성 우편번호가 분명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보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거짓말, 거짓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우체국에서 되돌려받은
소포를 든 누나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고
동생도 덩달아 말이 없었다
관찰자의 시각
젊은, 아마도 20대 패션 마케터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들었다. 200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을 20세기의 사람이라고 한단다. 그 말속에서 어떤 ‘올드함’에 대한 조롱을 느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명명에서 시큼한 냄새와 추레한 모습에 대한 비난을 연상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20세기의 사람’인 나는 모던과 포스트 모던 사이에서 살았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사람’은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구분이 전혀 의미없는 양자의 세계에서, 독립된 실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19세기가 낳은 구조주의라는 은하이다. 그 은하에는 일원 결정론으로 대표되는 구조주의와 그에 대한 반격이 오갔다. 나는 아무도 서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포스트 모던 주장에서 매력을 느꼈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그래서 ‘올드’한 이론들에 더 많이 이끌렸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20세기의 사람으로 만들었나?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 덕분이다. 그러나 이제는 ‘결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회가 왔다.
감옥만큼 근대성을 강렬하게 복사輻射하는 것은 없다. ‘수인번호 3208’을 가슴에 단 아버지로 인해 내 유년기는 분열하고 단절되다가 폭발했는데, 그 번호는 아주 오래도록 내 심장에 주홍 글씨를 새겨두었다. 이렇게 강력한 ‘토대’가 나를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했으나, 나는 결코 어떤 극단에도 내 몸을 완전히 내어주진 않았다.
20대 30대 40대를 겪으며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나를 관찰한다. 양자의 운동에서 관찰자의 시각은 중요하다. 광자의 불규칙한 운동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하는 시선을 내가 느낌으로써, 나는 감옥의 근대성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역마살을 타고났다. 인신사해寅申巳亥라는 역마 중 세글자를 지지地支에 두었으니, 얼마나 시작하는 힘이 강하고 떠돌아다니는 습성을 타고났을까. 생각해 보면 회사 생활을 하며 참 많은 곳을 출장 다녔다.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하고는 안 가본 대륙이 없다. 게다가 백두대간 산행을 수차례 하며 한반도 남쪽의 산하를 따라 걸었고, 지금은 택시를 몰며 서울 곳곳을 쏘다니고 있다. 나란 인간은 얼마나 운명 친화적인 사람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결심한다. ‘그래 이제 노인과 소년을 팔아먹기로 하자’고. 21세기를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