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회개 이젠 그만하라”
개신교계에서 회자되는 명설교가 있습니다.
2007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의 대표 설교였습니다.
설교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사랑의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였습니다.
당시 옥 목사는 69세였습니다.
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운 10만 개신교인을 향해 옥 목사가 던진 설교의 키워드는 ‘회개’였습니다.
그것도 다른 이의 회개가 아닌 ‘교회의 회개’였습니다.
#궁궁통1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는 일종의 큰 잔치였습니다.
세상을 향해 한국 교회를 알리고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대규모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대표 설교를 맡은 옥한흠 목사는 가슴을 치면서 교회를 겨누고, 목회자를 겨냥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존경받지 못하는 건 거짓 회개 탓이다.”
행사가 끝난 다음 날 저는 사무실로 옥한흠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풀고 싶은 물음이 있었거든요.
“왜 잔칫날, 회개를 이야기했나?”
그렇게 물었습니다.
옥 목사의 답은 이랬습니다.
“내 얘길 해선 안 되지 않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교회의 회개’였다.
그걸 하나님이 주셨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전하기가 너무 어려운 말씀이었다.”
왜 어려웠을까요.
“100주년은 기념 페스티벌 아닌가. 예수님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도 한국의 목회자, 똑같은 입장이 아닌가.
차라리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잘못했다’는 간증을 하라면 쉽다.
혹은 나는 깨끗하다, 너는 왜 그런가 하며 정죄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간증도, 정죄도 아닌 설교의 자리였다.
그래서 밤낮없이 기도했다.
설교는 20분, 준비에는 20일이 걸렸다.”
마주 앉은 옥 목사를 바라보며 제가 느낀 건 솔직함과 용기였습니다.
하늘 앞에서 솔직해지고, 내 뜻과 상관없이 하늘의 뜻을 전하는 커다란 용기였습니다.
#궁궁통2
저는 첫 단추를 물었습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옥 목사가 답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예도 하나 들었습니다.
“가령 시골의 촌부가 시저 같은 시대의 영웅 앞에 섰다면 뭘 느꼈겠나.
초라함, 체면 안 섬, 비참함이었을 거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의 실존 자체가 더럽게 느껴진다.
죄가 없는 사람일수록 그걸 더 강하게 느낀다.
바로 거기서 교회도 회개해야 한다.”
교회에 가면 종종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어봐도 회개는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는 왜 교회의 회개를 유달리 강조한 걸까요.
“주위를 보라. 교회는 날마다 회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회개가 필요한 걸까.
바로 회개가 형식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교회의 회개가 형식이 됐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요.
“생각해 보라. 교회에서 ‘주님,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면 시어머니를 사랑해야 맞다.
그런데 변함없이 미워하고 있다.
이런 형식적인 회개가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위선’이 된다.”
이 말 끝에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라.
거짓 아닌 진짜 회개를 할 능력을 잃어버리진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못 받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사느냐 죽느냐의 책임은 100% 목회자에게 있다.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의 질적인 성장이 절실히 필요하다.”
#궁궁통3
옥한흠 목사의 이 메시지는 16년 전에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옥 목사의 설교가 여전히 유효한 메아리로 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물음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저에게 옥 목사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사람은 회개를 통해서 깨끗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걸 성결(聖潔), 즉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그 성결은 형식을 통해선 닿을 수 없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다.”
옥 목사가 왜 그토록 회개를 목놓아 외쳤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그가 말하는 회개는 거룩함,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아감,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격이 줄거나 없어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안에 온전히 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성호의 궁궁통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