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장 1 - 6절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6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종교색이 짙은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민족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헤롯당 사람들은 매국노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 안디바에게 아첨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신분을 유지하려고 했던 사람들이고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헤롯당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그룹이 하나가 되어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도저히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은 무리들이 하나가 되어서 힘을 합해 예수님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현재에도 이런 영적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종교다원주의 같은 이론을 가지고 기독교를 몰아세우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외치는 고집불통의 종교이고 타협도 없는 종교라고 매도를 하면서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는 논리로 거침없이 기독교를 몰아세우고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하나 되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설사 고립이 되고 외톨이가 되고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절대 위축되지 말고 꿋꿋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지키고 있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자신들의 전통과 모순이 되는 부분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그런 충돌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치료를 할 수 있는 대상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로 국한을 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지금 당장 응급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고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어긋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렇게 질문을 하시면서 논리적으로 말씀을 하시니까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헤롯당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을 지켜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추종을 했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인물로 간주를 했던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이유이지만 예수를 막아야 한다는 동일한 목적 때문에 이 두 부류는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잘못된 안식일에 대한 정의를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 동안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안식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날처럼 생각해 왔었습니다. 여행도 하지 말아야 하고,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하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하지 않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100%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 해 왔던 불의한 일들을 하지 않아야 이제부터는 공의의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나 열정이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취지에서 보면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면에서 보면 잘못된 모습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사실 소극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극적 명령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소극적인 인생을 살겠다는 것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적극적인 명령도 지켜 행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적극적인 명령 중 대표적인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소극적인 명령인 반면 그런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명령은 더 많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이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가 안식일이나 주일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바르게 지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는 것이 옳으냐” 이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이 손 마른 사람이 오른 손에 병이 들어있었다고 자세하게 진단해 주고 있습니다. 오른 손이 굳어 있었다는 것은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하루 소망 없이 겨우 겨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데 그것이 안식일이라서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순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게다가 손 마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도록 원어 성경에서는 시제를 밝혀주고 있는데 완료수동태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냐면 이 사람의 손 마름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 불의의 사고를 통해 손에 병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다른 날에 “와 보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영역 안에 우리는 이 문제를 적용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옳으냐? 하지 말라는 것만 안 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라고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생활의 반절도 되지 못하는 소극적인 명령을 겨우 지키고 사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적극성을 가지고 하라는 명령들을 지키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전도하라, 찬양하라, 용서하라, 베풀고 나누라…. 이런 수준이 되었을 때 우리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주신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말씀대로 살아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매순간마다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옳은 일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고, 오늘도 선한 일, 생명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