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첩 예쁘단 소문에 ‘흑심’
끈질긴 구애 끝 궁에 들여 첩 쫓겨난 뒤에도 태종 몰래 밀애 본분 잃은 세자, 자리마저 뺏겨
태종 16년(1416년) 1월 어느 날,
세자 양녕은 곽선의 첩 어리가 아주 어여쁠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도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다.
곽선은 은퇴한 고위 관료들에게 관행적으로 제수되는 중추부 부사(副使)로 재직 중이던 자였다.
어리는 나이 많은 양반의 어린 첩이었던 것이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은퇴한 양반의 첩을 넘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양녕은 세자된 입장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당장 어리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어리는 멀리 파주에 있었기 때문에 일은 흐지부지됐다.
그해 12월, 어리가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소식을 들은 양녕은 비단주머니를 징표로 내주며 다시 어리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태종 17년 1월쯤이었다.
세자가 보고 싶어한다는 전갈에 어리는 “저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양녕은 휘하의 환관들을 거느리고 어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세자께서 납셨다”는 환관의 전갈에 집주인 이승이 나타나 엎드렸다.
이승은 곽선의 양아들이었다.
양녕이 “빨리 어리를 내놓아라”라고 윽박지르자 이승은 마지못해 어리를 내보냈다.
양녕은 이후 이때를 회고하며 “어리는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부러 그런 꼴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도 양녕은 어리에게 한눈에 깊이 반해버렸다.
양녕이 어리를 데려가기 위해 말을 대령하라 했지만 이승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양아버지의 첩인 어리를 보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자의 명을 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녕이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어리를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협박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양녕은 손수 어리의 옷소매를 잡고 말에 태우려고 했다.
어리는 “알아서 타겠다”며 스스로 말에 올랐다.
그 길로 양녕은 어리를 데리고 광통교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함께 동궁으로 돌아갔다.
동궁으로 가던 그 어스름한 밤길에 양녕은 더 깊이 어리에게 매혹됐다.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뒷날 회상했다.
양녕이 어리를 데리고 갈 때 온 도성 사람들이 모여 구경했다.
양녕은 어리를 궁에 들인 것을 태종에게 숨겼지만 한달도 되지 않아 들키고 말았다.
태종은 세자 주변의 간신배들을 엄벌에 처하고 어리는 출궁시켰다.
그때 세자는 어리의 인생이 가엾다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이를 딱하게 여긴 장인 김한로가 자신의 집에 어리를 숨겼다.
세자는 태종 몰래 어리와의 밀애를 즐겼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발각됐다.
태종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어리까지 쫓겨나게 되자 세자는 태종에게 글을 올렸다.
‘왜 왕은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 자신은 한명의 어리도 거느리지 못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날 저녁 양녕은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금지된 사랑에 빠져 세자의 본분을 잃은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