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민소연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민소연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
심사평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 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운씨의 ‘여름의 앙카’는 흰 눈과 붉은 꽃의 색상 대조가 고양이와 말의 상상적 모자이크를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로 승 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다고 평가 되었다. 노수옥씨의 ‘가난한 접시’는 밀도 높은 기억과 표현이 마지막까지 특징으로 거론되었다. 오랜 향기와 시간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접시를 다룬, 구체적 기억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민소연씨의 ‘드 라이아이스’는 전언의 구체성과 표현의 개성, 착상과 비유의 구현 과정이 매우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되었다. 특별히 드라이아이스가 가진 물리적 속성과 사랑의 제도적 결실인 결혼의 상징적 속성을 연동하면서 펼쳐낸 희뿌옇고 서늘한 감각이 탁월하게 다가왔다. “영원한 타인”과 살갗이 들러붙는 과정을 발견한 순간이야말로 ‘결혼기념일’의 가장 큰 페이소스이자 빛나는 선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당선작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개성적 언어로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이룬 경우가 많았음을 덧붙인다. 응모 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드린다. - 안도현·유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