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
41-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카르멜 산
위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물리친 엘리야는 이제벨의 복수가 두려워서 도주해야 했다. 절망에 빠져 잠이 든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빵과 물을
먹게 하신다. 그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까지 간다(제1독서). 에페소서는 속량의 날이 올 때까지 하느님을 본받기에 힘쓰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제2독서). 빵의 기적을 보고 당신을 따라온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빵을 먹는 이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전멸시켰지만, 자기를 잡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제벨의 복수가 두려워 도망칩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만에 지쳐 주저앉았습니다. 더 이상 살 힘도, 의욕도 없이 그저 싸리나무 아래 누워
주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아직도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까지 가야 합니다. 호렙은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난 산입니다. 엘리야도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이르기까지, 가는 길이 어찌 이리 험난하기만 할까요? 엘리야 같은 인물도 자신의
못남을 탓하면서 죽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우리가 어찌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느님 계신 곳까지 달려갈 수
있을까요?
열왕기는 그
힘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 엘리야는 싸워 이겼지만 결국 그의 힘은 바닥났습니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대단한 싸움을 치른 그가 자기도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초라한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그에게 빵을 내려 주시어 밤낮 사십 일을 걷고 당신을 찾을 힘을 주십니다. 그가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한
이후에는, 낙담하여 이제벨을 피해 줄행랑을 치던 그의 ‘도주로’가, 이제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한 ‘순례 여정’으로
바뀝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오늘 우리를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고 당신 앞에 불러 주신 주님, 신앙의 여정을
계속 걸어가도록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영원히
산다는 것
-박재식신부-
저는 정말
여름을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여름에 정치인들과 여러 국가 정책들을 보면서 더 힘들고 짜증이 나는 상황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전해지는 소식은
하나같이 싸우거나 속이는 내용입니다. 아니면 부도덕한 행태를 알리는 소식입니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입니다.
여러 좋지
않은 소식 중에서 요즘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공권력, 국가 기관이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했다는 소식입니다. 헌법 18조 ‘통신의 자유’에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개인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헌법이 무너진 사회이고, ‘인간다움’의
근본적 사유와 행동의 자유가 박탈당한 참담한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뉴스를 보며 우리의 생활 습관도 반성해 봅니다.
2013년
4월 26일부터 5월 16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순례한 사람들의 조언보다는 미국에서 발간된 안내책자를 기준으로
순례 계획을 짰습니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국 사람들이 머물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 대부분이 묻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왜 혼자 여행하시나요? 무슨 일 하시는 분이세요?” 이런 질문들
말입니다. 혼자 조용히 선교사로서 삶을 정리하고 새롭게 한국에 적응할 준비를 하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우연히 만나는 한국
사람들의 ‘신상털기’는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사실대로 답을
하면 계속 말을 걸어올 것이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고심 끝에 고육책을 찾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하고, 한적한
시골 성당 숙소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걷다가 9일째 되던 날 토산토스(Tosantos)라는 시골 마을 성당 숙소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5년째 봉사하고 있는 스페인 사람 마리아ㆍ후안
부부를 만났고, 숙소 2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순례객들과 ‘떼제기도’를 함께 바친 후 “서로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산티아고에서
볼리비아인 연인에게 청혼을 준비하는 미국인 변호사의 사랑 이야기,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2년간 식당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는 끼아라의 이야기, 페루 태생으로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며 경제학을 공부하던 데이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자유롭게 말했고, 순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도
기도드렸습니다. “10년 동안 페루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저를 사제로 받아주고 제가 화를 내도 너그럽게 받아줬던 페루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페루 가족을 위해 순례 마지막 날까지 매일 묵주기도 100단을 봉헌하기로 하느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며 페루의 가족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진정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말씀하시면서 ‘외적인 빵’에 갇혀 있는 유다인들에게 참된 빵의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는 말씀을 통해 영원한 삶이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님 말씀과 일치하려 노력하고, 조금씩 예수님과 일치를 향해 나아가고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페루의
가족들이 그립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미소가 떠오릅니다. 비록 가난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용서와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제게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입니다.
행복합니까?
살 맛이 납니까?
-김옥수신부-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어린이와 청소년의‘주관적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로 나타났답니다. 그것도 6년이나
연속으로.
그럼 우리
교우들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교우
여러분 행복합니까? 신앙인이라 행복합니까?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어떤 복을
받았나요?
그래서
미사가 끝나고 성전 문을 나설 때는 받은 복 때문에 기쁘고 발걸음이 가볍나요?
그러면
당신은 행복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그 말씀을
알아듣도록 배웁니까? 배우려고 노력합니까?
배워야 알
수 있고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믿음 위에서만이 복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고
싶습니다. 믿도록 좀 알려주십시오.’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주님은
나를 만드시고 내가 잘 되도록 바라십니다. 그래서 자꾸만 도와주시려 나를 당신 가까이로 부르십니다. 잘 사는 데 필요한 것을 넘치도록 주시려고.
바로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사제는 외칩니다.
그래요. 우린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을 믿고 바로 이 자리에 초대받았으니... 이제 그 복으로 이 한 주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생기가 돌고요. 살 맛이 납니다.
주님을
받아모시고 받은 복으로 희망을 안고 기쁨에 가득 차 주님의 성전 문을 나설 수 있는 복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길
기원합니다.
일어나
먹어라
-이원태신부-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기와 열정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죽음의 위협 앞에서 지쳐 쓰러진다.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주님, 이것으로 충
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19,4) 죽음의 위협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실망
인가?
예언자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인가? 어쨌든 한순간의 실의와 절망이 자신을 죽음으
로 내몬다.
그도 평범한 한 인간임을 보여주는대목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의 처지를 알고 계신다. “일어나 먹어라.”(1열왕 19,6) 엘리야는 하느님
께서 내려주신
빵과 물을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밤낮으로 사십일을 걸어 호렙 산에서 하느
님을
만난다(1열왕 19,6-8참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운 힘과 미래를 주심으로써 심연에
서
허우적거리던 그를 구해내신다. 이에 힘입어 엘리야는 마지막 날까지 예언자로서의 소명
을 다 한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의 위력이다.예수님께서 선언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
다.”(요한
6,48)
육신의
배고픔을, 세상의 온갖 욕망들을 채워주시기 위한 빵이 아니다(요한 6,26참고). “마
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이사 61,1) “그루터기에서 햇순이”(이사 11,1) 돋게 하시는 위안
과 희망의
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다. 상처입어 신음하는 사람을, 어둠에서 절규하는 사
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탄식한다.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 공감한다. 힘듦이, 고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누구나 이렇게 탄
식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절박함의 고통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탈출 2,23-25참고). 외면하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표징을 통해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다윗처럼 노래할 때가 올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
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유다.
공병우 박사
같은 분이 그리운 시대
-박영식신부-
공병우 박사는
1906년에 태어나
1995년
3월
7일 아흔에
세상을 떠난 한국 최초의 안과의사였다.
그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유산은
눈먼이들의 복지를 위해 써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유언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최소면적의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공병우
안과의사는 콘택트렌즈와 쌍꺼풀수술을 우리나라에 도입했을뿐만 아니라 한글과 눈먼이들을 사랑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38년 눈병
치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씨를 만나 한글의 우수성을 알게 되어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발명했다.
한글
텔레타이프,
한영 겸용
타자기,
세벌식
타자기를 발명해 보급했다.
공병우박사는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
옷과 신발을
해어질 때까지 입고 신으며 돈을 아껴 맹인 부흥원을 설립하고 맹인을 위한 타자기와 지팡이를 개발했다.
시간을 귀하게
여겨 5분 이상
머리를 깎는 이발소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공부를 하며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는지에 달렸다고 했다.
공 박사는
80대에도 마음과
행동은 20대처럼
‘영원한
젊은이’로
살았다.
늘 공부하며
사는 삶,
남의
눈치보다는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삶,
늘 약자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또한 공병우
박사는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공병우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과 삼청교육대로 악명높은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독재정권(1981-1988년)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공 박사는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악랄한 독재자의 만행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감한 분이었다.
우리는
약자들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공병우 박사는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에 지금 하느님의 품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신 당신의 몸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는다.
이
말씀은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
19; 1코린
11,24)라는
성체성사의 말씀을 떠올린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희생 제물로 바친 당신 몸을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어주신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위해 당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예수님과 하나 된다.
우리도
영성체 때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주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할 힘을 받는다.
성체신심이
지극한 성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몸과 마음속에 임하심을 강렬하게 체험했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실체변화의 신비 속에 빠져들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성체신비에
스며든 사람들은 제2예수
그리스도로 변한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고에 시달리고 억압당하는 이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주 생각하면 우리의 뇌세포가 건강해지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창의력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영생이 우리 몸과 마음속에
깃든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내가 얼마나 열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는지에 달렸다.
하루
종일 예수님을 생각하면 제2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늘
사랑을 품으면 박애주의자가 되고,
늘
학문을 생각하면 학자가 된다.
이와
반대로,
늘
자신을 생각하면 자기중심주의자가 되고,
늘
돈을 생각하면 황금만능주의자가 된다.
공병우
박사는 예수님을 본받아 약자들을 위한 사랑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그는
눈먼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자애로운 의사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젊음이 얼마나 공부를
하여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는지에 달렸다고 말한 대로,
영원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살아 있다.
그의
모습은 예수님처럼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유산은
눈먼이들의 복지를 위해 써라.”
하고 말하는
모습이다.
그는
예수님처럼 독재와 과감히 맞서서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모습으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죽기 전까지
늘 공부하는 모습,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한 모습이 오늘도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날마다
서로 인사를 하거나 고맙다고 말하거나 칭찬하거나 웃는 모습은 영원히 친절하게 인사하는 모습,
고마워하는
모습,
칭찬하는
모습,
늘
웃는 모습으로 남는다.
자기
말을 하기보다 이웃의 말을 먼저 들어주는 모습,
순서나
길을 양보하는 모습,
쓰레기를
먼저 줍는 모습,
용서를
비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지금
이러한 모습이 나의 영원한 모습이 된다.
이처럼
훌륭한 모습은 늘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는 데 달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증명할 것인가?
예술,
작품,
일,
업적,
지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다(A.
카뮈)
사랑이
감성,
이성,
의지를
총동원한 전인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해서 남긴 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명상하던 내용입니다.
이 복음서는
6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찬이 지닌 의미를 예수님이 말씀하는 양식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신앙인들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믿음과 그분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모이면,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남긴 유언에 따라,
성찬을 함께
거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성찬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는 바를 더듬어 되살려내어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성찬전례 전에 하는 말씀전례의 기원입니다.
그 과정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또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탈출 16,4)
고사(故事)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호렙 산으로 향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하느님이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먹이신다는 또 하나의 고사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베푸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자유의 땅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베푸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
곧 성찬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자녀의 참다운
자유를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말씀에
못마땅해 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모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발견과 더불어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새로운 생명을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삽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들은 함께 모여서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회상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새롭게 알게 되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은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곧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신앙공동체가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은
인간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어 그분의 인간관계를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은,
죽음을 넘어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현재의 삶을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아끼고,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재물과 권력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합니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자매들은
소중하지만,
우리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성찬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자신만 잘되도록
비는 마음이면,
정화수 떠놓고 빌면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원하던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루가 6,27)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여
자기를 위한 공덕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미운 짓을 한 사람도 그 미운 짓만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은 지극히 작은
사람도 소중히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도
예수님을 대하듯이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중심으로,
또 우리의 편의만
생각하며 살면,
우리 주변에 죽음이
발생합니다.
대자연도 훼손되어
죽고,
우리의 이웃도 외면당해
죽습니다.
대자연도 우리가 그것을
가꾸지 않고,
우리의 편의 위주로 마구
대하면 생명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강,
새들이 살지 못하는
하늘이 되고 맙니다.
바빠서 이웃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은 이미 지워졌습니다.
잘 있는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귀찮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새로운 삶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롭고 가난하고 장애를
지닌,
이웃들을 정성껏
보살핍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 준 그 사랑을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 생명이 발산하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생명을 외면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시면,
우리의 행보에도 사랑과
보살핌이 보일 것입니다.
부족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우리는
사랑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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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