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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묵상글 ( 사순 제5주일. - 주님께서 뜸 들이시고 늑장 부리시는 뜻은.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2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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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22 05:09
- 주님께서 뜸 들이시고 늑장 부리시는 뜻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사순절의 끝으로 달려가는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 아주 쉽지 않은,
그러나 담고 있는 뜻은 너무도 심오한 얘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시고,
죽은 뒤에는 나흘이나 지나서 방문하신 겁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셨다면
아플 때 즉시 방문하고
죽기 전에 찾아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이렇게 원망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주님께 대한 신뢰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인간적인 사랑이나 하고 보여주려고 오셨다면
애초에 아프지 않게 하셨을 것이고 죽지 않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병과 죽음에서 구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병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희망을 지니며 살게 하고,
죽고 난 뒤에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자로를 살리실 때 늑장을 부리시고,
뜸 들이신 것은 숙성된 희망과 숙성된 믿음을 위해서이고,
라자로 예를 보며 우리도 그것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완전히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어야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반쯤 죽다가 다시 살아나니 부활도 미완성이거나 불완전합니다.
이것을 영과 육에 적용하면 육신과 함께 육도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육적인 영(정신)이 반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하느님의 영께서 내 안에서 완전히 살아계시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뜸 들이시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 곧 육이 죽고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참 희망을 안고 살고,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보시고도 뜸 들이실 때
이러한 희망과 갈망을 실제로 우리가 지닐 수 있느냐 그것이고,
평화롭게 참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기도하고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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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계성을 선택하기 - 열한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누가 여러분을, 당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사랑해 주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명예와 수치의 질서를 뒤엎으신 예수님
관계성을 선택하기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공공 신학자 레이첼 헬드 이반스(Rachel Held Evans:1981–2019)은 교회와 가족으로부터 신앙, 성적 지향, 성별 규범을 넘어섰다는 이유로 수치와 거절을 경험한 이들을 향해 이렇게 격려의 말을 전합니다:
저는 내쉬빌에서 만났던 한 젊은 여인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채로 저를 따로 불러, 어머니가 자신을 걱정하고, 논쟁하며, 자기에 대해 깊이 실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성경은 분명히 여성은 그런 직무를 맡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하면서). 저는 또한 스무 살 무렵의 젊은이들이 모여, 신학이나 정치, 교회 제도에 관한 의견 차이 때문에 겪었던 어색한 개입, 감정적 폭발, 극적인 단절의 경험들을 서로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손주들의 세례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습니다(세례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이 '생물학 입문(Biology 101)' 수업을 듣고 진화를 받아들였을까 두려워, 자녀들을 대신해 사목 상담을 예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부모에게 커밍아웃할 용기를 낸 한 젊은이가 아버지로부터 "이건 네가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가슴을 찢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헬드 이반스는 신앙과 실천에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의 행복과 공동체 안의 포용을 지켜 주었던 부모님의 헌신을 기립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저는 깊이 공감은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부모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학이나 정치에 대해 항상 의견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언제나 사상의 획일화보다 우리의 관계를 지켜 나가는 것을 우선시하셨습니다….
그분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저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제가 허풍을 떨고, 격렬히 성토하며, 단지 흔들기 위해 어리석게 배를 흔들었을 때에도, 부모님은 저를 문제나 수치, 두려움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반응이 내 신앙을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지켜낸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저지르는 가장 파괴적인 실수 중 하나는, 공유된 신념을 공유된 관계보다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데, 우리가 경배하는 하느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잃지 않으시려 죽음을 선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두 같은 의견을 갖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References
Excerpted from BRAVING THE TRUTH: Essential Essays for Reckoning with and Reimagining Faith, 328–330. Reprinted with the permission of the publisher, HarperOne, an imprint of HarperCollins. Copyrighted © 2026 by Rachel Held Evans and by Sarah Bessey.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lianna Gill,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배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를 환대하며 한 공동체 안으로 맞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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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된 사랑은 죽음마저도 능히 이깁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은 빛과 어둠에 관한 것이었고, 오늘 복음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언제나 역설적인 방식으로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유다로 가시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권위자들이 그분을 붙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시자, 토마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고, 그 죽음을 통해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님의 삶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역설로 가득합니다. 단순히 '삶과 죽음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세 신학자 요한 타울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고통 속에서 평화를,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쓰라림 속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참된 하느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죽음 안에서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장면에서 우리는 죽음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을 봅니다. 단순히 '삶이냐 죽음이냐'라는 선택은 역설이 아닙니다. 역설은 바로 죽음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아니오, 옳음/그름, 선/악'처럼 둘을 철저히 분리하는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반대편으로 몰아가고, 결국 적으로 만들 뿐입니다. 겉으로는 명확하고 강한 것처럼 보이며, 과학적 논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컴퓨터가 바로 이런 원리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허구적입니다.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착한 사람은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설(fiction: 허구)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나쁜 사람도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사를 오직 '양자택일'로만, 즉 이원주의적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전쟁을 위한 지침서나 허구의 이야기일 뿐, 생명의 복음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죽음을 피하려 애쓰며 삽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조차 '죽음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죽음 대 생명'의 대립적 사고일 뿐,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로마 6,3). 세례는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파스카 신비입니다.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도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부활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나 원수로만 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우리 삶은 때때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고통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깊은 연민을 느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시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고 나서 그곳에 함께 있던 유다인들이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셨다."고 전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겪을 때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 저자는 우리에게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통이나 슬픔 중에 있을 때 그분께서 더더욱 가까이 계셔 주시며 우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드러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인 것입니다.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 부활 사건의 전조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이 두 부활 사건이 지니는 참된 메시지는 "참된 사랑은 죽음마저도 능히 이긴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대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은 사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는 하나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품고자 마음을 모으고, 또 그 사랑을 우리 삶 속에서 육화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의 핵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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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 늘 우리는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또한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아나톨 프랑스)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요,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요한11,24)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 8,2)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여전히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임에 대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시며,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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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어”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그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영화 ‘국제시장’이 있습니다.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화물선의 선장은 배에 있는 화물을 모두 버리고 만 사천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남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배 위에서 4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배는 성탄 전날 거제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체험한 선장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선장이 되고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평생 수도원에서 살던 수사님은 뉴저지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 흥남 부두에서 살아남았던 문재인 대통령은 훗날 수도원을 찾아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과 고통의 현대사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 대교구 소속인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은 한국의 최광희 마태오 사제를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주교 서품식을 앞두고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년간 교회는 주교 임명자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였고, 지켜보았지만, 건강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교 임명자는 교회에 주교 임명에 대한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을 수락하는 것은 교황님의 권한입니다. 교황님은 최광희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을 수락하였습니다. 서울 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사목 서한을 통해서 최광희 마태오 주교 임명자의 사의 표명이 교황님으로부터 수락되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주교 임명자에서 최광희 사제로 다시 돌아온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 역시 최광희 마태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사목의 현장에서 기쁘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 나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돌’이 있을 것입니다. ‘체면이라는 돌, 자존심이라는 돌, 욕심이라는 돌, 미움이라는 돌, 시기라는 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돌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교우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이민의 길에서 눈물로 시작하신 분들, 병원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신 분들, 사업의 실패와 가족의 상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신 분들이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파도를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때마다 끝인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루가 주어졌고, 또 길이 열렸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사목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송별 모임도 하고,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그 일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취소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마치 무덤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제게 약이 되었습니다. 제 교만을 깎아내리고, 제 조급함을 다듬어 주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저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셨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른 길로 저를 미국에 보내셨습니다.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그때의 취소가 없었다면 지금의 은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상처였지만, 지금은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배웠습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은 결국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음을 돌아보며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쁘게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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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라자로는 소생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 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타니아에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라자로가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특별합니다. 절친이 위중하다는데,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시지 않고 늑장을 부리십니다.
머무시던 곳에 이틀간이나 더 계신 다음에야 라자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 일행이 라자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라자로는 이미 운명했고,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고인을 매장한 후에도 일주일간 장례식이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오빠를 여읜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러 와있었습니다. 성격 급한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큰 유감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말에는 꽤 날이 서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런 간청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외치십니다. “돌을 치워라!” 죽은 라자로에게도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잠시 후에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으스스했습니다. 다들 혼비백산해서 뒷걸음질 쳤습니다.
소생한 라자로는 염습한 그대로, 수의를 뒤집어쓴 채, 뒤뚱뒤뚱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라자로의 소생 사화는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그분은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에로 시선을 돌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라자로의 무덤과는 비교가 아예 안 되는 영광과 승리의 장소입니다. 라자로는 소생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우리 인간에게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낡은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린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신과 의혹의 무덤에 누워있던 우리도 이제 그만 훌훌 털고 무덤 밖 환한 세상으로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오랜 방황과 깊은 상처와 수치스러운 죄의 무덤에서 일어나 화사한 봄날, 부활의 삶으로 건너와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과 함께 하는 제 인생은 언제나 따스한 봄날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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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1,1–45
라자로가 병들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신 이의 죽음 앞에서
지체하십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사랑하신다면 왜 늦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마음에도 익숙합니다.
“주님, 왜 지금이 아니었습니까?”
마르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가볍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서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분의 눈물은 무력함이 아니라
사랑의 진실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으시고,
그 슬픔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복음을 읽을 때
말씀을 단지 “정보”로 두지 말고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만남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에게 성서는 사건의 기록을 넘어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길입니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라자로는 어디에 있는가?”
예로니모의 눈으로 보면
그 무덤은 단지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오늘 우리 마음 안의 ‘닫힌 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마르타는 말합니다.
“주님, 벌써 냄새가 납니다.”
회복은 늘 이 지점에서 멈춥니다.
내 안의 상처, 실패, 죄책감은
“이미 냄새나는 자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이 외침은 단지 라자로를 향한 소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도 말씀하십니다.
“나오너라.”
숨고 싶던 자리에서,
절망의 습관에서,
미움과 자기비난의 무덤에서.
영성 주간의 일요일,
우리는 성체를 모시며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보다 크신 분이며,
그분의 말씀은
무덤을 열고
사람을 다시 공동체로 돌려보내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라자로가 풀려 공동체로 돌아가듯
우리도 묶인 것을 풀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으로 파견됩니다.
주님,
제 마음의 무덤 앞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나오너라” 하시는 말씀에
두려움 없이 응답하게 하시고,
저를 묶고 있던 끈들을 풀어
새 삶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성체로 제 안에 오신 당신이
오늘 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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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인 라자로의 베타니아 집은 예수님에게는 무척이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어느 때 방문하더라도 환대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편안한 장소이었을 것입니다. 때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안히 환대해 주는 가족과 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가족들과 친밀하고 친근한 관계를 맺어왔고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였다고 느낍니다.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정과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이였기에 오빠 라자로가 중병을 앓게 되자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이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11,3)라고 소식을 전해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 머물던 곳에서 이틀을 더 보내시며, 다만 “라자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자로의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1.4)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메시지의 또 다른 울림입니다. (요9,3 참조) 더욱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11)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라자로가 그냥 잠을 잔다고 오해하여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11,12)라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라자로는 죽었다, 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헤아리셔서 그리고 사랑하는 벗인 라자로의 중병의 소식을 듣자마자 베타니아로 달려가시지 않았을까요. 경험적으로 한恨은 한으로 치유할 수 있듯이, 죽음은 죽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어설픈 상태는 상태를 더 악화할 수 있기에 밑바닥까지 내려갈 때만이 그 상처로부터 바닥을 치고 오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온전히 죽을 때만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족을 사랑하시지 않았기에 지체하고 머뭇거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사랑했기에 그 자매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면서도, 라자로가 죽음의 문턱을 온전히 넘어서야 만이,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 수 있고 이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슬픔으로 조급하거나 성급하게 처신하지 않고, 주님의 때 곧 영광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알면서도 차마 하느님 구원의 때를 앞당기지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으로 이틀 뒤에야 베타니아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11,21.32)라는 안타깝고 아쉬운 심정의 표현입니다. 어찌 그 말의 의미를 주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 마르타를 위로하며 그리고 당신이 이제부터 하려는 의도를 넌지시 드러내시며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시지만, 마르타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라자로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심을 통해서 주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모든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예수님의 참 위로와 구원의 기쁜 선포입니다. 그러기에 현재도 베타니아의 마르타의 집(=작은 경당)에는 이 말씀이 새겨져 있고 그 집을 방문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물었던 것처럼 너는 이것을 믿느냐?, 고 묻고 있습니다. 〔저희 고난회 베타니아 공동체에서 라자로의 집은 멀지 않아서 자구 방문했던 경당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마리아와 그곳에 와 있던 사람들의 우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을 보시고 그렇게 울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무덤을 열어 나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37,12)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실현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애통한 마음으로 북받치신 상태에서 라자로의 무덤에 다가가시어 무덤을 가로막은 “돌을 치워라.”(11,39)하고 말씀하신 다음, 큰 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11,43)고 외치십니다. ‘라자로’는 본래 ‘무력하다’, 는 의미이며 이로써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무력한 존재라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단지 라자로만을 무덤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너무도 나약하고 힘없는 모든 인간 존재를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그의 여동생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에도, 선뜻 베타니아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체하신 것입니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생명으로 다시 불러내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에서 풀려 난 “라자로를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11,44)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은 분명 삶의 마지막 자리이며 어두운 절망의 장소이지만, 이 삶의 마지막 자리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작의 자리이며, 어둠의 절망 가운데 빛을 향한 희망이 시작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으로 썩어 문드러진 냄새가 진동한 죽은 육신이 영으로 다시 살아날 때 향기로 가득 찰 것입니다. 혹여 우리에게서 죽음의 썩는 냄새가 난다면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을 치웠듯이 마음을 가로막는 돌을 치워 성령께서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비우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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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세상을 향한 빛과 희망의 삶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흰 수의를 온몸에 감은 채 무덤 문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라자로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수천 년 된 이집트의 미라가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 기적은 단순한 놀라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삶의 기초가 되는 믿음의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절망이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어떤 명의라도 인간을 죽음에서 구해낼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사건은 주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이미 완전히 죽은 상태였고 부패가 시작되어 생명은 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한 마디에 다시 생명이 돌아왔고, 수의가 감겨 진 채로 무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권능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단지 잠시 머무는 세상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1,26)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지녀야 합니다.
성령을 지니기 위해서는 더 이상 육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로마서 8,10)
이제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단호히 육체의 욕망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나흘 만에 살아난 라자로의 기적에 감사드립니다.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 희망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희망이며,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도록 이끄는 은총의 초대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영원한 영광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 희망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날 육을 따라 사는 세상은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며, 자연과 세상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참된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보십시오.
1.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까?
2. 내 삶에서 ‘다시 살아나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3. 무너진 믿음과 식어버린 사랑, 포기해버린 마음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습니까?
4. 나의 선택과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성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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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친한 신부들과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식당에서 어느 신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뭐 먹을지를 다른 신부가 묻습니다.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무거나 시켜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뒤에 음식이 나왔는데 정말 ‘아무거나’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신부는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문했지만, 저만 이상한 ‘아무거나’를 먹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를 시킨다면 원하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원하는 음식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똑같지 않을까요? 말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과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용서의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곧 하느님께 전달하는 주문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 진심으로 필요한 것을 주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문 전에 다른 주문을 먼저 하곤 합니다. ‘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왜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거야?’, ‘왜 저 사람들은 문제투성이야?’ 등의 다른 주문은 안 됩니다. 제대로 주문해야 합니다. ‘아무거나’를 말하면 정말 ‘아무거나’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대로 주님께 주문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했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인간적인 무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타가 마중 나옵니다. 그녀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고 대답하면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먼 훗날의 사건입니다. 이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하시면서, 먼 미래에 일어날 현상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마르타가 이야기하지요(요한 11,39).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 시신 곁을 맴돌다가 냄새가 나는 나흘째가 되면 영영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타의 말은 곧 인간적 희망이 단 1%도 남지 않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돌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말씀에 죽음이 굴복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관계, 그 관계 안에서 오래 굳어 버린 상처, 희망이 사라졌다는 기억, 신앙이 식어버린 자리…. 그래서 주님께 제대로 주문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절망할 뿐입니다. 혹시 마르타의 말처럼 “주님,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주저하면서 갇혀 있는 우리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십니다. 내 안에 있는 무덤을 열고 나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잘못 반성에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른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주님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님께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죽음은 삶보다 더 보편적이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모든 사람이 사는 것은 아니다(앤드루 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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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라자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으니.”(시편130,8)
방금 흥겹게 부른 오늘 복음 화답송 후렴이 오늘 복음을 요약합니다. 오늘 3월22일은 사순 제5주일, 주님 부활 축일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서의 이 주일은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셋째 수련식을 거행하는 날로 말씀의 배치도 참 적절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일곱 표징사화 가운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라자로의 소생 사화입니다. “라자로의 죽음,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 순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세례받아 새생명의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는 또 하나의 라자로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라는 라자로 이름 뜻도 참 맘에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라는 구절이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은 후반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마치 때로 절망과 어둠의 자기 감옥의 동굴 무덤에서 죽은 듯 살아가는 우리를 상징하는 듯 싶습니다.
“돌을 치워라.”
우리 모두 빛과 생명의 통로를 막고 있는 숙명의 업보같은 무거운 돌을 치우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죽은 사람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과연 나에게 절망과 죽음의 부패한 냄새는 나지 않는지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발효인생을 살 때는 향기이지만 부패인생을 살 때에는 악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의 빛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마르타가 잠시 방금전 예수님과 주고받은 주옥같은 대화를 잊은 듯 합니다. 마르타는 우리 믿는 모두를 대변하니, 우리 또한 마르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대로 마르타의 주님께 대한 한없이 깊은 신뢰와 사랑이 짙게 배어있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런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답입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그대로 때로 자기 감옥의 동굴 무덤 안에서 절망과 죽음의 어둠중에 살아가는 또 하나의 라자로인 우리 모두를 향한 명령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탈리타 쿰!; 일어나라!” 소녀를 살리실 때의 말씀과, “에파타!; 열려라!”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실 때 말씀과 더불어 오늘 말씀도 평생 화두로 지니고 사시기 바랍니다. 절망과 죽음의 어둠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될 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말씀을 상기하며 즉시 <구원의 출구> 예수님을 향해 뛰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완전 자유의 몸이 되어 하늘 보며 두발로 걷게된 라자로입니다. 그대로 에제키엘 예언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백성인 또 하나인 라자로인 우리를 두고 하시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빌론 유배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이지만 동시에 오늘은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땅이 상징하는 바 내 구원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나 이제 무덤을 열겠다.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며,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놀랍게도 이미 받은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고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역시 놀랍게도 사도 바오로를 통해 이 말씀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영혼중의 영혼인 성령을 통해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달으니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는 모두 또 하나의 구원받은 라자로입니다. 어제 새벽 수도원 하늘길 산책시 구원받은 라자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그 감격의 <하늘의 왕자되어> 고백의 시를 나눕니다.
"왕도 대통령도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아침 저녁 하루에도 임 그리울 때마다
하늘보며
하늘 기운 숨쉬며
가슴펴고 당당히
하늘길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오솔길
<땅의 파수꾼> 배나무들
사열받으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되어
나는 듯
걷는다
날마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2026.3.21.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에>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 베타니아 공동체는 바로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베타니아 공동체 형제자매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우리는 모두 또 하나의 라자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더욱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도록 합시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 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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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진신님
■ 분별력 있는 평신도의 은총인 순명
평신도는 주임신부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저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교회법, 신자의 의무와 권리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의 고유한 책임을 의식하여 거룩한 목자들이 그리스도를 대표하느니만큼 신앙의 스승들로서 선언하거나 교회의 영도자들로서 정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적 순명으로 따라야 한다."
순명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순명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에는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주임신부의 어떤 조치에 반발하여, 마음속으로 비난하다가 고해를 보고 이후에 신부님께 따로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설명을 듣고 순명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실은 올바른 순명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설득하면 순순히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말미암은 교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나의 뜻을 내려놓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지 개인의 납득 여부와 순명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제 아무개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임을 안다면 나를 설득해야만 받아들이겠다는 어리석은 마음은 갖지 않게 됩니다. 그분은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설명하지 않으실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과연 순명은 단순히 말을 잘 듣는 것과 다른 개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로 능동적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순명하는 이를 줏대 없는 무기력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자기네들은 똑똑하며 심지어 분별력이 있어서 순명을 할지, 하지 않을지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본당에서 사제에 대한 원색적 비난(1코린 9,3-4.12)을 하고 다니며 나쁜 영향력을 끼치고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할뿐더러 더 나아가 신앙을 무너뜨리는데(1코린 8,10-11.9) 일조합니다. 코린토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나를 심판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변론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1 코린 9,3-4.12)
지식이 있다는 그대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본다면, 그의 약한 양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수 있게끔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 코린 8,10-11.9)
영적 필요에 의한 청원이 아닌 원색적 비난을 하는 것은 입으로 죄짓는 일이며, 듣는 사람도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상황을 저지하지 않을 경우 비난을 하는 자의 입 닫게 하지 못한 죄로 일정정도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죄짓는 것도 부족해서 타인도 끌어들여 죄짓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걸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제는 본당 신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사제를 경계하게 됩니다. 목자라면 본당에서 자기 한 몸 편하게 있다가 떠나는 게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열심한 사목을 해야 합니다. 설령 그로 인해 본당 신자들에게 박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희 신부님의 경우 그러한 박해를 은총으로 생각하십니다. 인간의 뜻에 맞추어 살랑살랑 비위를 맞추고, 인간적인 영광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께 영광을 받길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평신도가 사제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평신도는 해당 사항이 없긴 합니다) 순명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사제보다 더 많이 알든, 더 뛰어나든 중요한 건 우리는 사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과 같은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여 순명하지 못했을 때는 제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옳다고 여길 정도로 마음이 완고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기꺼이 주시려고 하는 순명의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억지로 따르는 게 아닌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밤 중에도 그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 눈물이 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고, 순명이라는 의로움의 열매를 주시는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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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00 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43-44).”
1)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5-26).”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신 일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희망하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사별에 대한 슬픔, 죽음에서 비롯된 절망감과 허무감과 무력감 등에 짓눌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찾는 것이 바로 ‘종교’이고, 그런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9-11).”
신앙생활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음에도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3)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라자로가 잠들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죽음은 ‘긴 잠’과 같은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라는 말씀은, ‘긴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일은, 즉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당신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라는 말씀은, “죽은 라자로를 내가 살리겠다.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라자로가
죽을 때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너희가 믿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쁘다.” 라는 뜻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권한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삶’입니다.>
43절의 ‘큰 소리’ 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위와 권능이 있는 음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으로서 명령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라자로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란, 사람을 살리려는 ‘주님의 의지’와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의 의지와 능동적인 응답’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이고, 나를 살리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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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2. 사순 제5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06:55 추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드러내시는 장면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예루살렘 도성의 주민들을 보시며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음이 안타까워 우시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으로 예수님께서 평소 무척이나 가까이 지내시며 아끼고 사랑하시던 특별한 한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그의 죽음이 슬퍼서 우신 게 아닙니다. 그분이 하고자 하셨다면 얼마든지 그를 중병에서 치유하여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여주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음에도, 그들은 점점 더 놀랍고 확실한 ‘표징’을 요구하며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걸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완고한 고집에 사로잡힌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죽어서 이미 부패가 시작된 사람을 되살리는 정도의 큰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그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참된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몸이 썩기 시작하는 ‘완전한 죽음’에 이를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은 당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끝까지 희망할 수 있는 ‘신앙인’이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그 제물로 삼으셨는데, 비록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긴 했지만 당신께서 사랑하신 이들을 그런 고통과 슬픔 속에 방치하신 것이 가슴 아프고 미안해서 눈물을 흘리셨던 겁니다.
그러나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사랑하는 오빠가 큰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다고 미리 알렸음에도,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하시며 결국 오빠를 죽게 만드신 그분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주님을 향한 원망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에 대한 믿음까지 거두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을 수는 있지요. 게다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는 ‘주님’이시자 온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자신의 온 존재를 투신할 정도로 확고한 ‘신앙’으로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세상 종말의 날이 되면 죽었던 오빠가 부활하여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또 다른 고통과 시련들을 마주하게 될 때 당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단순한 믿음을 넘어 확고한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하십니다.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그저 머리로 ‘아는’ 수준에 그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온전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진리가 우리를 세속적인 가치관과 죽음에서 풀어주어야 우리가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믿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부활’은 먼 훗날 언젠가 이루어질거라 기대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믿고 따름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분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순명을 통해 내가 마주하여 겪어나갈 ‘현재’가 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존재를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지요. 그것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아야 할 참된 신앙이며, 우리가 그런 신앙을 지니고 살아갈 때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지니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 마음이 탐욕과 집착이라는 돌, 고집과 편견이라는 돌, 걱정과 근심이라는 돌, 시기와 질투라는 돌로 꽉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그 돌이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가리면, 우리 마음은 슬픔과 절망, 오해와 편견, 두려움이라는 짙은 어둠에 사로잡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그 돌이 너무나 크고 무거워 혼자 힘으로 치우기 어렵다면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되면 그 돌을 치울 힘을 달라고 당신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돌을 치워내야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맘껏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영적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살아나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이리 나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의지와 행동으로 무덤 밖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건 주님께서 그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그분을 참으로 믿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다면 모두가 ‘살아있는’ 존재,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참된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지요. 주님을 믿고 사랑했던 라자로는 그의 이름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 입어 죽음을 이기고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서라고 부르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무덤, 게으름과 나태의 무덤, 걱정과 근심의 무덤이 우리 영혼을 썩게 만드니 어서 빨리 거기서 나오라고 재촉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며 즉시 따른다면 이미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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