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症發作 一步直前章= 광증 일보 직전장 ◎ 濁한 정신은 제대로 된 생각을 엮어 내지 못하고 타성(다른데 물들은 습성)에 젖어(換)幻態나 非他的 想念만 그려낸다.이를 갖다 글로 옮기는 것은 無用한 落書次元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그렇더라도 미친개 광증내듯 휘갈겨 보는 것이다. 人不知以不慍 不亦君乎 이는 論語 書頭에 있는 말이다. 나에 말을 일으키기 위해 잠깐 이끌었을 뿐이다. 사람이 心的인 갈등에서 비롯됐다할 수 있는 理想과 現實相間에서 心想이 괴리되어 奇異한 몸가짐이나 行動을 해서 남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지탄을 받음이 자기를 내세우는 평범한 표현방식가지곤 不充分타해서 또 그 반응이 시원찮다고 이 과격한 성냄의 표현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해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어이 유덕하고 촉망받는 者라 할 것인가?
「내라!。」하는 그 모습 어딘가가 내라함이 부족함이 아니던가? 그래서 봐준다는 것도 그 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고만큼 알아줌일 것이다。갈고 닦아 다듬으면 自然 빛나리니。하필 밝은 곳 나서길 원하며 빛을 구하러 능선에 오를까? 삶이 역겹더라도 수신제가의 일편이러니 생각해서 지난 자취를 돌이켜 볼진제 저만치서서 이만치가 내라하면 내라함이 스스로 돋보여 보일 것이다. 92年5月 十六日時 ◎ 曆의 具成形態 및 行事日程 제정 및 그 名分設立 性格에 대하여 삶에 힘이 들면 휴식을 취하는게 극히 당연지사다 일하다 피로하면 지치기전 쉬는게 당연하다。언제? 아무때나 말이다。사람이 집단이나 사회를 형성하여 생활을 영위하다보니 위계질서가 필요한 것이다。그러므로 이를 위해 律을 定하다보니 휴식 또한 필요한 것임으로 어느시기엔 휴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任意로 定하게 되는 것이다。그 任意로 정한다는 것은 어떠한 秩序律則(宇宙、또는 自然變理 및 時空論理的인 準則 理神의 形態 內面形成을 파악 그 얽힘 追從하는 논리적인 想則 사람들의 事物의 형태나 변화를 갖고 天命 운운한다)에 의한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가 추종하는 신앙의 사상적 또는 主義 이론적 논리를 빙자하여 어느 日時는 무엇을 할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이 중에서도 어느 신앙 단체에선 그 휴식하는 날을 갖고 意見이 紛紛하여 파당이 갈리어 저마다 제 주장이 옳다하니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듦을 금할 길 없다할 것이다.
그냥 일하다 힘들면 휴식하면 될텐데 말이다。그렇게 되면 그 가르침에 위배된단 말인가?(힘쓴 다음 힘을 보충하기 위해 제때에 휴식치 못한다는 그런 파괴적 가르침은 아마 어느 사상에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公私로 매여 個個人마다 임의로 쉬지 못하는 수도 허다하다.그렇담 좀 참던지 아니면 미리 당겨規則을 定한 때에 쉬면 될것이다。허나 萬物이 자연섭리로 인한 生息이 분분하여 晝夜로 다르니 그 중 사람들은 대개가 낮에 일하고 밤에 잠자며 휴식을 취한다. 그렇게 하여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어느날을 定하여 쉬기로 한다. 그날을 定한다는 것이 그 집단을 형성하는 우두머리가 자기의 임의 생각대로 하던지 아님 여럿의 衆志를 받아들여 하여 쉬던가 한다. 즉 사람이 필요에 의해 쉬는 날을 만들은 것이지 누가 그 어떤날을 쉬어라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런데도 개중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앙을 빙자하여 어느날은 쉬고 어느날들은 일하는 날들이니 하니’이 모두 삿된 생각에 의해 진리를 궁구하고 만들고자하고 그 이상(理想)과 사상을 설파 전파하여 여타에게 注入시키고자 하는 삿된 정신에 노복이 된 귀신들린 사람들의 두목들에 의함인 것이다。所謂 일주일이란 律을 누가 定했는가? 이는 徒是 사람의 삿된 정신이 定했지? 하늘이 定했을까? 땅이 定했을까? 그러니 믿음에 사로잡힌 西洋의 부질없는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아무 근거없이 믿는 신앙을 빙자해서 망녕되어 定한 것에 불과할 뿐이로다. (※ 소위 저들이 말하는 피조물이라 하는 것도 창조섭리라 하는 것에 의하여 律로 정해져 만들어져 있을 것이거늘 우리가 사는 地球自然燮理 또한 그러할 진데 저들의 主張이 무슨 自然法則에 근거가 있단 말인가? 西曆의 一月一日이 自然律에 근거한二十四節候 中 동짓날로부터 열하루나 열이틀의 날이 되어서
根據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알기론 일주일이란 것은 일곱 날과 밤을 뜻함인데 일곱 날과 밤에 무슨 귀신 씨알이가 붙었단 말인가? 나의 글이 어떤이들의 비꼬는 듯한 뜻으로 되어 돌아감은 옆에서 보는 비판적 눈으로 볼적에 시각차가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매사 하는게 못마땅해 보이는 것은 내 심기가 바르지 못하고 편치 못해 시기 등의 비뚤어진 심사나 나의 성장한 환경이나 현실적인 나의 처한 입장을 세태에 비기어서 피해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곤 할지 몰라도 이는 徒是 운명이고 賦與된 성격이라서 칼로 쳐죽인다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무엇을 동조하기에 앞서 나와의 利害得失이 앞서는 것은 그만큼 삶의 역경을 딛고 왔다는 뜻이다。혹이 이런 면으론 필자더러 생활력이 강하다 한다。이야기가 딴곳으로 흐르는 것같다。아뭉튼 각설하고 時空논리로 볼때 七이란 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건 사실이다。今日이 日曜日이고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것은 人間이 定한 것이 사실이거늘 그에다(자연섭리) 찍어다 붙인다한들 될 듯한 일인가? 來日부터라도 世人을 제압하는 어느 힘센 者가 오늘부터 다시 정하니 오늘을 토요일 내일은 지금률이라는 것을 뒤죽박죽해서 수요일 모래는 새로운 명분의 돼지일 등으로 정하여 시행한다면 그만인 것이다。그리고 해뜨면일하고 해지면 쉬고 노는 날은 따로 없다。그러나 나만은 날마다 편히 먹고 쉬며 즐긴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군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만약상 이의를 제기 대어들었다가는 그저 그만 위압적인 힘으로 닥달을 내고 요절을 내어 박살을 내고 부숴치워 남은 여럿에게 본때를 보여줘 공포에 벌벌떨게 할것이다。以上의 말은 필자의 痴情한 面을 내보여서 西人의 얇은 꾀책과 같은 行爲事를 잠깐 거들먹 거렸을 뿐이다. 세상에 제손에 쥔 새도 죽일지 살릴지 몰라 남에게 물어보는 사람과 같은 무리들 중에 잉어가 뛰고자 하니까 버들치가 먼저 뛰어선「어이- 날보라지 내가 먼저 뛰었어--。」또는 쇠뿔 상간에 쥐가 앉아있다가 내려 뛰면서 내가 먼저다 하는 것과 같은 귀신논리 부르짖는 사람이 나온 것을 참으로 가상히 봐줄 것인가? 높이 추앙해줄 것인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실태하는 사람의 모습처럼 잠시 글 흐름을 뒤틀어서 앞글을 썼을 뿐이다. 이는 아마도 군단의 움직임에 첨병의 역할을 한것과 같을 것이다。앞의 先覺先知는 계속 끊임없이 나올 점차 거대해져 나아가는 뒤와 뒤의 첨병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일곱이란 數 를 알았는지 삿된 진리의 정신들이 잘도 뜯어다 맞추듯이 하였고 그저 아무날이나 놀면 될걸 가지고 이 날 놀을까 저 날을 휴식하는 날로 정할까를 제대로 하질못해 그걸로 믿음의 宗主를 삼아 서로가 옳다하고 잘되길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니 이래도 필자를 사탄의 졸개로 몰아붙일 것인가? (※ 정리때 생각= 제삼자의 눈으로 볼적엔 아무것도 아닌줄 몰라도 그들이 여기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다. 아주 믿음을 뿌리채 뒤흔드는 중요한 것인 것이다. 이런 것을 본다면 필자의 글흐름이 큰 과오를 犯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뒷 힘이 없어 아주 겁먹은 표정의 말이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聖典같은 理論敍述冊을 읽어 본것 같으나 그 內容이 하나님이라 하시는 분이 세상 만든 이치를 빌어 법則얘기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으로 하나 번잡스러워서 지금은 다 잊고 말았다.)그 일곱이란 數 全體를 봤을 적엔 물론 하나만 한 뜻이 停滯다.그러나 그것이 섞여 있는것이지 어디 뚝떨어져 따로 있는건 아니다. 즉 여섯은 움직이고 하나는 가만히 있으나 섞여있어 萬有現象이 興起하는 것이다。즉 여섯에 의해 하나가 現相하나(어떤 無現無感知體의 虛實象) 여섯이 不絶變動함으로 이끌어 다시 그 하나를 나타나게 하니(※ 말이 그렇지二元作用이 아니다 그냥 空相=一相으로부터 누수相은 同一視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無現한 軸點의 空化 現相이다。이 또한 말이 그렇지 軸이라 지칭한게 축이 아닐 수도 다른 여러가지를 뜻할 수도 있다할 것이다.) 끊임없는 번복현상일 뿐이다. 가령 농도를 나타내는 수치의 여섯냥의 푸른 물감에 한양의 붉은 물감이 섞여있는 것과 같아 모두가 푸르른 것 같아도 붉은 물감의 성분이 그에 있어서 空化를 일으킨다는 뜻이다。比率이 六對一이라 할 것이나 實在에 있어선 六對一이 아니라 그 全體의 比로 볼제엔 六十 또는 달리 昭明數를 되볼 수도 있을 것이나 六十 四十八이면 이루게 되고 즉 四十八만 갖고도 충분한 것이요 四十八은 또한 八空處器에 배당되는 數로써 六에 對比 八이란 뜻이요 八은 中外 七十二가 둔갑한 數요 七十二는 또한 八各空에 乾坤九片이 배당되었다는 뜻이다. 이러므로 그 비율은 六對八로 보는게 정확하다 할 것이다º다 쓰고도 또 한무덕이는 원래 그냥 있는 것이라해서 十四一心이라 하는 것이다。이것은 인쇄 활자판으로 한 내용을 여러 장으로 찍어내는 거와 같고 이가 빠졌는데도 또 똑같은 이가 빠질 새 없이 나와 있는거와 같은 이론이란 뜻이다.) 얘기가 어떻게 자꾸만 엉뚱한 곳 저 뒤 꽁무니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같다。이는 길이 머니 말에 힘이 붙혀서 쉬고만 싶어서일 것이다. 아물튼 저 쪽도 하나 여섯이요 지금도 하나 여섯이다.그러므로 아무때나 쉬어도 일해도 저마다 生體리듬에 맞는다면 지장없다는 뜻이다。만약상 여섯만 있고 하나가 없었다면 상념을 갖고 이리 뒤집고 저리집듯해도 內外面性이 虛한 상태로 돌입한 것이라 고(罟)가 풀린 것이니 여섯은 말이 여섯이지 말하나마나 없는 것이요 무수입문 개념에 든것이라 할 것이다。여섯은 누수(優數)이고 또 여러 누수가 됨을 표현하고 있음이라 누수이면 長短、緩急、遲速이 있어 差等에 의한 정체현상을 일으켜(이 또한 무위유동속의 일과이다.) 하나란 것을 이끌어 내온다。 이미 周圍 六合이 되었다는 것은 一이란 軸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여섯은 누구인가? 願과 願하는 者요 즉 神들의 무리요 그 鬼(氣質)化하는 過程인 것이요(※ 앞에 계속된 주장과 일관성이 결여되 달리 생각이 도는 것은 확증적인 것이 아니므로 尺度를 이렇게도 재어보고 저렇게도 재어 보는 것과 같음이다.) 흘러 움직이는 神중엔 그 능력이 쇠잔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니 그 능력이 퇴폐하면 느려지다 못해 서는 듯이 하여 鬼質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짚히는 것이다。하나는 어디서 왔는가? 원(願)에 의해 제공해는 절로(自)이니 저 쪽에서 빠져나온 것이던、이쪽에서 빠져나간 것이던 저 이가 아닌 것이던 그것만이 닌 것에서 나왔다 할 것이다。그것만은 한쪽으로 같이 化하여 흐르는 것 그것만이 아닌 것은 反作、反彈한 여러 가지相、그 間에서 結成되는 것이 하나란 정체현相이 인다는것 이를 갖다 깨인 또는 깨뜨려진 醒者의 일편이라 할 것이다… 覺相의 주장을 뭐라하던 상관없다。佛이라 한들 또 이 논리를 전도 시켜서 또 이 논리와 상관없다하고 그(一主)것이 저를 生成했다하는 하나님 등 어떠한 명분을 달은 사상주의라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흐름을 궁글리는 정신이 이 삿된 神이요 人間性이요 그 허깨비처럼 여겨지는 육신이 醒者에게서 나온 것이라 한들 둘을 말하는 二元論이라 한들 무슨 상관 있으리 벗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諸事의 行態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저울질 해본다 한다면 每事가 그렇게 되있는 것처럼 느껴지게되니 즉, 그냥 시세흐름에 맡기면 平平하니 감당하는 것이요 원래 나라는 존재 가치를 부정하니 저에게 먹혀줘
同化되는 것이요 原來 나눌게 없으니 저들의 우두머리(끌고 가는 제반껏 여러 가지相 등등)가 없어지길 바라는 것이다.누구를 물러가라하고 나아오라 할 것인가? 감당하기만 하면 균형이 잡혀 없는 것 같은데、그런데도 그 없는 것 같은게 단조롭다해서 싫증나고 권태로와서 기울기를 바라고 부풀기를 바라는 등 변화를 요구하니 人間事 어지럽고 萬有가 시끌하다. 그래도 萬有는 감당하는 제 갈길을 가지만 오직 사람만이 없는 욕망에 사로 잡혀 활동하니 저 벗어친 萬有가 비웃는다. (※ 正體、直體、固體 등 類는 다툼의 늪에서 벗어난 醒象을 뜻하고 技巧부리는 斜仄體가 生命이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이것은 생각이 正斜 二原觀點으로 기울어 그것이 생과 醒相(그냥 生死相)과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가를 관찰해 본것에 불과한 것이다。그 반대의 관련관점을 둔다면 생각이 또한 그렇게 기운 것으로써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실제 그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萬有가 비웃는 소리가 저 살아있다는 바람따라 또는 어떠한 使用作用에 따라 내는 소리요、萬有가 비웃는 상이 萬有象(諸感無觸포함)이다. 이러한 區分관념을 하나(壹)하면 둘(貳)을 가르키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는 없는 것이다。그럼 萬有무리인가? 萬有무리도 없나니라.그러면 도대체 가르키는 要旨가 뭐란 말인가? 數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數란게 뭐를 말하는지 몰라 수란 뜻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이다.모르는데 그外에야 말할 것 있을것인가? 그外가 뭔지도 모르고 그런게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몰라 바보처럼 멍텅구리처럼 있는 것이다。이것은 많이 자랐다 많이 발전했다는 뜻 아닌가? 어떠한 相을 짓거나 가르킨다는 것은 번뇌의 序頭、번잡의 始初로써 모든게 다같이 일어나 있는거와 같다는 뜻이다。그러므로 空相이라 하여도 여러 삿된 번잡한 찬 相을 가르키고 있는거와 같다는 의미이다。어떠한 相이라고 보는 것을 벗어치우라는 뜻이다. ◎ 색갈의 正邪論 무슨 일을 하고자하나 행동은 아니하고 말들만 무성하다면 성과가 없다고, 삿된 정신이 괴이한 覺念을 갖고 무엇을 못그릴까만은 사벽스런 시아비타적 幻影만 그려 내놓고 이러니 저러니 하고자 한다. 세월은 붙들어 논 것이 아닌데 삿된 정신이 육신을 붙들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하여 시간만 허비코자 한다.‘이것이 생활의 일상리듬을 파괴코자이 함이아니던가? 이것이 색깔의 正邪를 거론하고자 함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말하고자 하는 要旨와 엉뚱한 데가 있으니 아마 정신이 되어 話頭를 잘못그린 것 같으나 人身烏首가 또한 미묘한 그림이 되지 않을까이다. 혹자가 말하길 붉은 색은 吉祥을 띈것이라※ 상서로움을 불러오고 상서로움을 예견하게 되는 것이라 하니까? 그 사람됨과 그 정신상태를 또는 그가 숭상하는 바를 사벽스러움(저들 사상이 침입해 들어온 후로 계속 사마니즘적인 것이 로 몰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얼이 숨쉬고자 하는 것엔 魔種으로 몰아부치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은 제도개혁 의식개혁을 가져와 말이 좋은 건 살려 共存이라하지、고유전통 말살책의 칼과 같음인 것이다。)으로 모는 (((소위 잘난체 해봐야 네까짓게 우리가 추종하는 거룩한 이상주의 신앙((※지금 필자의 삿된 정신이 한 쪽으로 기울어가는 생각을 낳고 있다. 신앙 그는 勢를 얻어 커다란 힘을 갖고 있다。힘을 갖고 있다면 설령 교황이 부처에게 절하는 것 같이해도 그는 세상을 두루 편해 놀이다니는 희롱놀이 일 뿐이다。그 ㅡ뭐- 부처가 위대한 성자라서 절한다는 것은 자기도 거룩한 분을 모시는 首長이니 뒤질게 없다하는 뜻을 은연중 내보이는 나도 성자이다하는 自肯心에 찬 주위를 의식하는 가증스런 위선으로써 그런 모양의 위선(僞善)과 진실은 두 몸이 아니다。보는이의 관념과 本人의 마음먹기에 달린것이다。그러므로 위선을 미더움 진실한 으로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이것이 생각이 씹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모순된 생각이라 짚히는 생각조차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作用相인 것이다)이러한 마음가짐의 껍질생각의 겸허한 모양을 짓는 허례의식인 것이다.))과는 견양지차도 더 벌어져 별것 아니다 하는 (주위의 여건조성상태가 그렇게 되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육군참모총장이 말하는 것은 거룩한 훈령같지만 이등병이 같은 말을 되뇌인다면 이것은 훈령지침이 잘 하달 되었고나 하는 정도이다. 설령 그보다 더 훌륭한 착상을 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누가 알아줘서 먹혀줄 것이며 미숙한 면으로 몰릴뿐 누가 크게 신임해서 받들어 줄것인가?)(※ 現한 단계는 그 사람의 위상을 결정한다) 생각에서 말한 것으로써 以上의 여러 잡다한 말들은 필자가 내 못난 열등의식에서 지례 짐작을 갖고 표현한 것이다))) 또다른 흑자가 말하길 그 色이 원래 하늘것이었으나 사탄이 뺏어간(훔쳐간) 色이라 한다。소위 사탄 색깔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처음자가 다시 생각하길 그렇담 사탄이 힘이 더 센것인가? 힘이 더 세다면 그것이 사탄인가? 實力으로써 正邪를 판가름내는 세상에야? 힘이 센것은 하늘 편인것이다。그 하늘이라 하는 것이 유리한 형편을 봐서 자꾸만 옮겨 다녀서 탈이지ᆢᆢㅡ도적도 세력을 얻으면 왕후장상이 되는 法 힘은 갖은 모사들을 끌어들여 더 큰힘을 만들고자 한다. 성공만하면 더 큰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실패하면 쪼글아든 것이 아니라 그 힘家를 다른데로 옮겼을 뿐이다。힘은 대의명분을 만들어낸다。小事에 있어선 명분을 빙자라 한다。즉 이 핑계 저 핑계대는 것이다。강도가 힘을 쓸 땐 사로잡힌 자가 볼땐 힘이 거기붙은 것 같고 그를 잡고자하는 法力이 오면 서로 저울질해서 유리한 편에 힘이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할 것이다. 이것이 시아비타적 주장이 아니라 天地에 있는 色들을 갖다 徒是 누구의 것이라고 관념을 갖는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이다。유리 불리 상황전개 됨을 색깔에다 결부시킨다는 것은 삿된 정신의 사로잡힌 포로、노복이 된다는 것이니 만약 불리한 색이 나온다면 그 근심스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옴을 어찌 감당할려고 색 相을 갖고 논할 것인가? 用途에 따라 多樣性을 띄니 어느 한편 쪽으로만 볼 것이 아닌것이다. 그 시세따라 그 장소 환경 배경따라 입장을 달리 하는 것이니 사람이 더우면 그늘을 찾고 추우면 양지바른 곳을 찾듯이 그 物事象이 一色相이라도 시세를 따라 환경을 따라 立場을 달리 한다 할 것이다。正邪를 결정하는 實力은 時勢(시간이 힘을 실어줌에 따라) 의 편승에 있는 것이다. - 惡이란게 이긴 것같다。나중에 두고보자.한다면 그 시점엔 指目된 惡이란 것이 正인것이니 왜냐하면 저 ㅡ입장을 거부、반항、도전하는 자이거나 패퇴자의 편에 선 자가 볼 적에 그것이 악이라고 보이는 것이지 악이란 입장에 선 나는 惡이 아니라 내 立場을 힘있게 표현하는 정당함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스스로도 自身이 악함을 잘 알면서도 他主張에 同助 하기 싫은 불굴심을 一面갖고 있음에서 억지쓰는 것이라 할 것이고, 감춰져있던 惡性向을 내비쳐 취미로 즐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또 그것은 시세의 편승 내친 걸음이 되서 그렇다 할 것이고 그것은 힘이 있음으로 악이 아니라 그에겐 一種의 향락을 주는 主體성격을 띄는 것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