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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을 제정하시는 하나님
출 12:1-14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흘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출 12:1 [유월절]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이제부터 너희는 이 달을 ㄱ)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로 삼아 계산하여라. ㄱ) 보통 아빕월이나 니산월(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3) 너희는 이스라엘 모든 회중에게 알려라. 이 달 열흘날에 각 집안의 가장들은 각 집안마다 새끼 양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식구 수가 너무 적어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을 경우 이웃집과 함께 식구 수를 계산하여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5) 이때 마련해 놓을 짐승은 양이든 염소이든 관계없지만 흠이 없으며 일년 된 수컷이어야 한다. 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그 짐승을 잘 간수해 두었다가 해거름에 온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이 짐승을 잡아야 한다. 7) 그리고 그 피를 받아다가 그 짐승을 먹을 사람들이 사는 집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라. 9) 그 고기를 먹을 때에는 날 것으로나 삶아서나 먹지 말아라.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도 모두 불에 구워 먹어라. 10)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반드시 불에 태워 없애라. 11) 너희는 그것을 먹을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든 채 서둘러 먹어라. 이것이 나 여호와의 ㄴ) 유월절이다. (ㄴ. 히브리어 페싸흐는 `건너뛰다',`넘어가다'라는 뜻의 말에서 왔다. 12) 그날 밤, 내가 애굽 땅을 두루 다니며 애굽에 딸린 것이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릴 것 없이 처음 태어난 맏아들이나 맏배는 모조리 죽이리라. 그리고 애굽에 있는 신이라는 신에게는 모조리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이다. 13) 내가 애굽 땅을 돌아다니면서 칠 때 너희가 바른 피를 보면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을 그냥 건너뛰어 넘어가리라. 그러면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죽지 않으리라. 14) 너희는 이날을 기념일로 정하여 지켜라. 곧 이날을 여호와께 드리는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벌여라. 그리고 이것을 너희 자자손손에게 길이 길이 알려 주어 지키도록 하여라.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에서 유월절을 제정하여 노예였던 이스라엘 위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유월절 지침(1-6)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유월절 제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지침을 받는 대상을 '이스라엘 온 회중'(3)이라고 칭하시며, 자신의 달력도 없던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유월절이 있는 달을 새해 첫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란 ‘여호와를 예배하는 공동체’를 의미하며, 아울러 국가적인 조직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힘없는 노예들을 예배 공동체이자 한 나라로 세우실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계 21:5).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은 유월절 안에 있으며, 최초의 유월절은 각 가정에서 지켜졌습니다. 이 달 10일에 각 가정이 어린 양을 취하고(3) 가족들이 나흘 동안 어린 양과 함께 지내다가 14일 저녁에 잡았습니다(6). 흠 없는 어린 양이었기에 그 죽음은 더욱 고귀하였습니다.
유월절 식사 지침(7-11) 각 가족들이 양을 먹기 전에 먼저 피를 집 입구 좌우 기둥과 꼭대기에 발랐으며, 가족들은 출입할 때마다 그 피를 보았으며, 잠시 후 심판의 천사가 보고 그 집을 넘어갈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가족을 심판에서 구하였고, 그 고기는 가족 전부를 먹여 살렸습니다. 가족들은 남김없이 다 먹었고 혹 남은 것은 불살랐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의 피와 살은 우리를 구원하고 또한 영원한 음료요 양식이 되었으며(요 6:55), 어린 양은 믿는 우리의 삶의 근거이며 이유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자세로 유월절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날 채비를 하고 급히 먹었으며, 반죽할 시간이 없기에 무교병을 먹었고, 애굽에서의 고난을 기념하며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순종이 조화를 이룰 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피를 볼 때에(12-14) 이스라엘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묻어있는 피를 보고 심판의 천사가 그냥 넘어갔으며, 여기서 유월절의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애굽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천사는 애굽의 ‘모든 난 것’(장자)을 모두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신 것은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출 4:22-23; 사 43:3-4). 또한 이번 재앙은 애굽의 모든 신에 대한 심판입니다. 재생산의 신인 민(Min)과 사랑의 여신 이시스(Isis)를 비롯한 애굽의 모든 신들은 애굽의 장자들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이로써 그 모든 신들이 거짓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적용: 실패한 자, 낙심한 자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세요.
우리 인간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그 죄로부터 구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애를 씁니다. 이 같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유월절, 죽음을 넘어가다
출 12:1-14 / 이윤재 목사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 교회력은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꺽어들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려나무를 꺽어들고 예루살렘 시내로 행진합니다(사진1). 출발은 감람산 정상에서 합니다. 과거 이 자리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던 벳바게가 있던 자리였습니다(사진2). 사람들은 손에 손에 종려나무를 꺽어들고 시내를 지나 성묘교회까지 행진합니다(사진3). 저도 한번 참여했었는 데 얼굴이 다르고 교파가 다른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호산나”를 부르며 행진할 때 참으로 감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처음 만났지만 말이 필요없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다니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예요? 감리교? 장로교? 성공회? 정교회?”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기뻐했고 분위기는 축제적이었지만 예수님이 처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즐겁기만 한 날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날 죽으려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른 것을 아십니까? 고전5:7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우리로 하면 고난주간 마지막날, 토요일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성 금요일은 유대인 절기로 하면 유월절 전날입니다. 요19:14은 이 날을 “유월절 예비일”이라 부릅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유대인 절기로 유월절 예비일, 곧 지금의 성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해마다 유월절 전날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을 잡는 희생제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오전 9시에 양을 준비시킨 후 긴 예배를 드린 다음 오후 3시경에 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예루살렘 갈보리산에서는 또 하나의 어린양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무거운 해머로 양의 머리를 칠 때 갈보리산의 예수님도 창에 옆구리를 찔렸습니다. 성전에서 양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때 십자가의 예수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으며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이 생긴 것은 주전 1500년경,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살이 하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려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바로, 내 백성을 보내시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로는 강팍했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마지막에 장자죽음이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대상은 애굽사람들이 신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신으로 섬기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부수시며 하나님이 유일하고 살아계신 참 신임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지막 장자의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이제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장자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재앙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사람과 똑같이 그 백성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을 살릴 특단의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어린 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양 한 마리씩 준비했다가 니산월 14일에 잡는 것이었습니다. 출12:6-7입니다. “이 달 열나흩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가정마다 한 마리씩 어린 양을 잡아 문 인방과 문 설주에 바르라. 그러면 천사가 재앙을 가지고 왔다가 피를 보고 넘어 가리라”.
문인방은 가로 기둥입니다. 문설주는 세로 기둥입니다. 가로, 세로 기둥에 피를 바른다면 그것은 십자가 형태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출12:13,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중요한 말은 “넘어가리라”입니다. 유월절은 “패스오버”, 곧 넘어가는 절기입니다. 천사가 재앙을 가지고 왔다가 피를 보고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사람들은 피를 바르지 않아 애굽 땅에서 처음 난 모든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감옥에 있는 죄수의 장자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심지어 처음 난 가축까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자는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를 발랐기 때문입니다. 이 날뿐이 아닙니다.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은 이 절기를 계속 지킴으로 40년 광야 생활을 은혜로 넘겨 무사히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유월절에 바른 피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넘어갔고,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넘어 갔습니다. 넘어가고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넘어간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간 것을 믿습니까? 모든 복음의 메시지가 이 진리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유월절의 은혜를 받기 원하십니까?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저와 여러분을 모든 죽음에서, 모든 죄에서, 그리고 모든 절망에서 넘어가게 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넘어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에서 넘어간다“. 이 유월절의 원리는 철저히 은혜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자비를 얻었다는 것 아닙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데 호의를 입었다는 것 아닙니까? 갚을 길 없는 데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살아나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사람보다 더 착했던 것입니까? 조금 나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안 지었겠습니까? 애굽사람들은 죄를 짓는 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대신 죽어 그 피를 문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의 공로나 선한 행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양이 대신 죽어 대신 그 피를 흘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세계 여러 종교와 비교하면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은혜”라고 말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있는 데 다른 종교에는 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요즘 이슬람교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슬람교가 아브라함의 뿌리에서 나왔고 또 유일신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종교적으로 가깝다고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이슬람교 신자를 만나 묻습니다. “이슬람교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샤하다”라고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가 유일한 예언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수입의 2.5퍼센트를 반드시 모스크나 이슬람교 자선단체에 바쳐야 합니다. 넷째는 “라마단”이라고 음력 9월에 30일 동안 동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생에 한 번 모하멧의 출생지인 메카로 성지순례를 가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했더니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면서 모든 이슬람 신자들을 두 천사가 감시하고 있답니다. 한 천사는 오른쪽 어깨에서 그 사람의 선행을 기록하고, 다른 천사는 왼쪽에서 그 사람의 악행을 기록한답니다. 그래서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야 천국에 간답니다. 그런데 그것도 구원받는 방법이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두 가지 구원의 보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지순례중에 메카에서 죽거나 또 하나는 알라를 위한 거룩한 전쟁에서 죽거나. 그래서 뉴욕 쌍둥이 빌딩에 테러를 일으키고 IS같은 과격파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테러지만 그들에게는 순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교리가 없습니다. 코란이 다섯 번이나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영혼도 다른 사람의 짐을 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각자는 각각 자신의 죄를 담당해야 합니다.
불교에 “은혜”가 없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자기 죄로부터 벗어나려면 죽고 살고 또 죽어 수만년을 윤회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를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데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말하지만 삼위일체도 부정하고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합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은혜로 얻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일정수의 전도를 위해 반드시 외국에 가서 가가호호 방문을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 어느 호텔에 들어갔는 데 몰몬경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폈는 데 니파이후서 25장 23절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앎이라”. 성경이 말하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와 타종교, 성경적 기독교와 이단, 사이비적 기독교와 다른 가장 큰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나의 행위가 필요하지만 나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가 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며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은혜라는 것을 믿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있던 리빙스턴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나라에 가서 선교하기로 헌신하셨습니까?” 리빙스턴이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습니다. “헌신이라뇨? 저에게는 헌신은 없습니다. 다만 은혜만 있죠”.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은혜입니다. 한 목사님이 교회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전도자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참 수고하십니다”. 그 집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전도는 수고가 아닌데요. 은혜인데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핵심은 죄없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벧전1:18-19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오직 주의 보혈입니다. “오직 주의 보혈, 주의 긍휼 의지하여 나아가리”. 아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넘어갑니다.
유월절의 원리는 은혜의 원리일 뿐 아니라 신분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자, 천사가 재앙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애굽 사람이라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 착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라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잘 하고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백성이냐?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소속의 문제요 신분의 문제입니다.
아주 옛날에 보았던 사진이 생각납니다.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백악관의 집무실에 모였습니다. 모두 다 긴장된 모습으로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대통령 책상 밑에서 누군가가 놀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대통령의 구두 한 짝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구두 옆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아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사도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 날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제지도 없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편하게 노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백악관의 안전도, 쿠바 위기도 뛰어 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롯이 적에게 잡혀 갔을 때 아브라함이 밤을 새워 추격해 결국 롯을 구원한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자초합니까? 단 하나 이유 때문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조카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 롯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핏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생 라합이 자기 가족을 구원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까? 그는 자기 집에 찾아온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만일 당신들이 여리고를 정렴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을 살려주세요. 만일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당신들을 살려 주겠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의 힘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 그 분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라고 말합니다. 로마시대의 양자는 법적인 보장이 철저했습니다. 내 자녀는 버려도 양자는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내 자녀에게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양자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물려줘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라고 말합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재산, 모든 능력, 모든 보호, 모든 약속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죄사함받고 자녀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건너뛰고 자녀이기 때문에 재앙을 면제받습니다.
믿음은 매일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가는” 유월절의 원리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모든 원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자 천사가 죽음을 넘어갔습니다. 죽음을 넘자 홍해바다를 넘고 광야를 넘자 요단강을 넘었습니다. 넘어가는 믿음의 최종적인 한계선이 죽음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사람은 죽음은 사멸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과연 죽음은 사멸입니까? 다 사라지고 재만 남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인생은 얼마나 덧없는 것입니까? 죽음은 사멸이 아니라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그대로 요단강을 넘는 것입니다. 공간이동입니다. 땅에 살던 사람이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죽음은 존재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이동입니다. “옮겨간 것입니다”. 다 천국에 있습니다.
믿음은 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60퍼센트가 때로 혹은 자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은 1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브레넌 매닝은 그의 책 <부랑아 복음>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이론적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은혜를 부정하고 있다. 은혜의 복음은 선포하고 있지만 은혜의 삶은 실천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집이 아니라 두려움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주의 보혈, 주의 긍휼 의지하여 나아가리”. 이것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을 뿐 아니라 죄로 인한 죄책감도 수치감도 다 넘어갔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수치감은 죄의 쌍둥이 사생아입니다. 죄책감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행했다는 느낌입니다. 수치감은 내가 본래 잘못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할 때 죄책감, 수치감, 다 사라졌습니다.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믿음은 다른 사람의 죄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넘어갔지만 내 죄만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죄도 넘어갔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실수를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용서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용서란 나에게 지은 죄를 덮어주는 것인데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짓는 것 아닙니까? 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만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모욕했다. 나를 중상모략했다”. 나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내 돈을 떼어먹었다. 나를 발로 차고 폭행했다”. 나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용서했다고 말합니다. 동이 서에게 먼 것같이 멀리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한 죄를 우리가 왜 용서못하나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이미 용서했는 데 제3자인 우리가 왜 용서못하나요?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못할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할 때 우리는 비켜서면 됩니다. “나에게 오지 말고 하나님께 가세요. 나는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했으니 나도 용서합니다”.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수도원에서 한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회의가 소집되어 아바 모세도 청함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도 사람들이 오라고 하니까 나타났는 데 보니까 물이 새는 조롱박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조롱박에서 물이 줄줄 샙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바,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바 모세가 말했습니다. “내 죄가 이렇게 줄줄 새고 있는데 어떻게 남의 죄를 판단하겠소?”.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그 형제를 더 이상 심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훈련해야 합니다. 넘어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뭐하고 하든 발끈하지 맙시다. 나를 기분나쁘게 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명백하게 실수할 때 넘어가세요. 한번 넘어가고, 두 번 넘어가고, 하나님은 몇 번을 넘어갔다고 합니까? 일흔번을 일곱 번, 490번을 넘어갔다고 합니다. 490번입니다. 왜 하나님은 490번 넘어갔는 데 우리는 한번 두 번도 못 넘어갑니까? 혹시 못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저녁까지 넘어가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새로 시작하세요. 왜 새날은 어제의 나쁜 감정으로 시작해야 합니까? 그래서 유익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습니까? 넘어가세요. 꼭 손봐줘야 할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이 손봐줄테니 그냥 넘어가세요. 도저히 참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까? 죽을 힘을 다해서 한번 더 넘어가세요. 유대인의 책 <미드라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명했습니다. “나를 위해 반지를 만들되 좋은 글귀 하나를 새겨라. 내가 승리했을 때 자만하지 않고, 내가 절망속에 있을 때 낙심치 않을 글귀 하나를 새겨라”. 얼마 후에 반지가 왔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그렇습니다. 승리도 실패도 곧 지나갑니다. 지금 내가 분노에 치를 떨며 사느냐 죽느냐 하는 순간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지나놓고 보면 “아, 내가 그때 넘어갈 것을” 후회합니다. “포기의 순간”을 뛰어넘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인생은 수많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잘 뛰어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넘어가는 위대한 사건의 출발이 유월절입니다. 어린양이 피흘려 이스라엘이 죽음을 뛰어 넘었습니다. 넘어가는 삶으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어 죽음을 넘어섰고 그가 십자가에 피흘려 우리을 죽음에서, 죄에서, 남의 죄에서, 절망에서, 인생의 고통의 순간을 뛰어 넘어 부활로 가게 했습니다. 넘어가라. 넘어가라. 나도 넘어갔으니 너희도 넘어가라. 홍해를 넘고 광야를 넘어 가나안땅으로 가라. 죽음을 넘고 죄를 넘어 부활의 나라로 가라.
유월절
출 12:1~14 / 조용기 목사
<서론>
“유월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중에 열한째인 요셉이 걸출했습니다. 그가 꿈을 꾸면 특별한 꿈을 꾸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꾸고 형제들 가운데 제일 신앙이 깊었습니다. 그 결과로 꿈을 꾸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을 마음속에 품으면 꿈이 우리를 끌고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스러운 일도 생깁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팔려서 애굽의 종으로 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또 꿈 때문에 그는 모략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가고 죄도 안 지었으면서 옥살이하고 또 꿈 때문에 바로왕을 만나게 되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온 중동을 뒤흔드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밉든 좋든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잘되면 다 그 잘된 울타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야곱이 그 열한째 아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을 알자 모두다 그 아들 인도를 따라서 애굽의 고센땅이라는 제일 기름지고 좋은 땅을 받아서 그 다른 자식들과 다 함께 이사를 갔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을 동안에는 큰소리하고 외국인들이지만 잘 살았어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서 요셉이 죽은지 오래되고 역사적으로 기억이 안 될 정도가 되니까 애굽의 왕이 주의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론>
1.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430년 동안 고센 땅에서 자랐는데 하나님이 축복해 주어서 얼마나 자손들이 번창했는데 정확한 계산은 나와있지 않지만 2백만에서 3백만 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한 사람 밑에서 3백만 가까이 수가 늘었으니 어지간히 많이 늘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로왕이 겁을 내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자기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르니까 더 번창하지 못하게 해야 되겠다. 그리고 아주 고된 일을 시켰습니다.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 고된 일을 시켰습니다.
출애굽기 1장 13절로 1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아주 고달픈 일을 해서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해서 430년 후에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 조상이 상속받은 그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서는 노동자의 일꾼들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아주 값싼 노동력으로 집도 짓고 땅도 개간하고 성도 쌓고 온갖 일을 다 시켰는데 보내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군대도 없고 싸워서 나갈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므로 하나님이 위엄으로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기를 원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기를 오늘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다 밤중에 양을 잡아서 먹을 만한 수를 계산해서 양을 잡아서 양푼에 피를 받아서 우슬초로 문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라. 피를 바르고 그리고 먼 길 갈 준비를 다 하고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어린 양을 삼지 말고 불에 구워서 먹어라. 그날에 내가 죽음의 사자를 온 애굽 땅에 보내리니 임금님의 맏아들부터 종과 짐승의 맏이까지 다 죽겠다. 그 문설주에 인방에 피가 있으면 건너 뛰어서 갈 것이거니와 피가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서 다 죽일터이니 애굽의 역사상 그 많은 사람이 하루저녁에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집집마다 다 맏아들은 죽을 것이고 맏짐승은 죽을 것이니까. 그러니 이 날에는 임금이 급히 저희를 불러서 나가라고 할 것이니 밤에 전부 짐을 짊어지고 나가라. 나가기 전에 이웃에게 애굽 사람에게 금붙이를 구하라. 그리하면 금, 은, 동을 너희들에게 주게끔 내가 명령을 내려 놓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전부 먼 길 떠날 준비를 다했습니다. 짐을 꾸리고 어깨에 걸머지게 짐발을 만들고 그 다음에 양을 염소를 택해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에다가 전부 바르고 난 다음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붙여놓고 불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온 애굽 천지에 갑자기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멀쩡한 자식들이 다 죽어나가니까 애굽 백성들이 모두다 왕을 원망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저걸 안 내보냈다가는 우리 다 멸망하겠다. 바로가 보니까 국민들이 데모를 일으켜서 쫓겨나갈 형편이니까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빨리 나가라! 짐승도 한 마리 남겨놓지 말고 다 빨리 나가라! 그래서 순식간에 430년 만에 그들은 떼를 지어서 광야를 향해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패스 오버~ 한자로 말하면 유월절,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나가는 행사라는 것입니다. 교통순경이 자동차가 쭉 서있으면 후루루~ 지나가라.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면 피가 죽음의 천사들이 오면 지나가! 여기는 죽음이 있었어 지나가! 그리고 피가 없는 집안에는 들어가서 장자를 다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1년 내내 많은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 유월절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에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가 8월 15일 날 해방된 것과 똑같습니다. 그들 절기 중에는 가장 중요한 절기로 이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많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1절로 23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야훼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야훼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밤중에 야훼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야훼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출 12:29~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야훼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0~41) 그런데 왜 유월절 양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중요하냐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 했지만 우리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의 정사와 권세 아래 온갖 고통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마귀에서 해방될 수가 없어요.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죄의 유전을 받아서 태어날 때부터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마귀의 종살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서 피를 십자가에서 흘렸는데 그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께서 그 피를 마음에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마귀가 여러분을 해하려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피를 볼 때에 건너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지고 그 피를 주장하면 예수의 피가 큰 증거 된다고 주장하면 죄가 여러분을 덮치러오면 지나가! 허물이 다가와도 지나가! 병이 들어와서 여러분을 죽이려고 할 때 지나가! 저주와 가난이 진을 치고 들어오려고 해도 지나가! 죽음이 와도 지나가! 여러분 앞에 우주의 교통순경이 들어섰습니다. 그 피가 말하는 거에요. 모든 사망의 세력을 지나가라고 호루라기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에 예수의 보혈을 받아들여서 그 보혈이 마음에 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서 여러분을 자유와 해방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피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2.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비유되어서 십자가 보혈을 마음의 인방과 설주에 바르면 사망의 세력이 떠나고 생명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혈의 용서와 의를 주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고 치료와 건강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시고 영생복락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불러들이고 그 이외에는 다 지나가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유월절, 영어로 패스 오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이 여러분과 나의 가슴에서 문을 지키고 서서 좋은 것은 다 들어오게 하고 나쁜 것은 지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믿고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양을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이 우리의 성찬예식인 것입니다. 성찬 때 실제로 성찬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 잔을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죽은 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양을 불에 구워먹었지 않았습니까? 삶아서 먹지도 않고 불에 구워서 먹어라.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당하는 것이 마치 유월절 양을 불에 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어린양을 불에 구워서 먹고 힘을 얻어 먼 길을 갈 에너지를 얻었지만 예수님은 그 몸을 찢어서 여러분 우리를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로 28절에 보면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 이후 마귀의 시종이 된 인류가 마귀의 정사와 권세 및 마귀의 군대를 짓밟고 극복하고 자유와 해방을 얻은 기념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역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마음을 탁 지켜고 서가지고서 우리를 정죄하려고 하는 율법이 오려고 하면 들어가! 건너가! 그 다음에 마귀가 와서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정죄를 가져오고 죄악의 굴레를 씌우려고 하면 들어가!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물러가! 병도 물러가라! 저주도 물러가라! 실망도 물러가라! 죽음도 물러가라!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오면 다 물러가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 피를 믿고 그 피를 주장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너희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은 주님의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 피를 보고는 기겁을 하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그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도 어린양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은 그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한 것처럼 오늘날 마귀가 온갖 부정적인 힘을 다 가지고 있어도 예수의 보혈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제가 부탁한 것을 실행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꼭 실행하고 있어요.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피로 명하노니 나를 훼방하는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 어제 저녁에도 침대에 올라가기 전에 너희 원수 마귀야 어린양 예수님의 보혈로 명하노니 나를 지나가지 내 곁에 오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 성도들이 이것 할까? 다 까먹어버리고 안할지 모르겠다. 꼭 기억하고 물리치면 여러분에게 고통을 가져올 원수마귀가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패스 오버~ 지나간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마귀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가 많은데 물리쳐 버리면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혈을 주장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예수 보혈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 및 시민이 되어서 마귀와 죽음에서 자유와 해방의 은혜를 값없이 믿음으로 받았으니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으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패스 오버 멤버가 된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군인이 된 것입니다. 무장하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 보혈이 여러분과 같이 하므로 여러분은 죄를 이기고 모든 허물을 짓밟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전혀 환난과 고난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되 여러분은 이길 수 있는 힘을 예수님의 보혈로써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속에는 죄를 이기고 불의와 악행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 속에는 병을 이기고 연약을 이기는 힘이 들어있고 저주와 가난을 이기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는 힘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힘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힘을 여러분에게 주셨으므로 그 힘을 통해서 여러분 마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이 되어야 되고 그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내일의 꿈을 간직하고 믿습니다로 대결하고 입으로 크게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여가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말을 해야 돼요. 기도도 주장도 내 귀에 말이 들리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시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마귀야! 예수님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그렇게 하면 그 말이 여러분 입에서 나와서 여러분 귀에 들어가서 듣고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서 마귀를 이기는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입술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야 돼요.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고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님 말씀을 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느니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느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내가 입술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저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했다. 그러면 그 말이 여러분 입에서 나와서 여러분 귀를 통해서 들어가서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살아서 운동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여러분 입술을 통해서 나가야 살아서 운동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해도 성령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뭍이 드러나라. 말씀할 때 성령님 그 말씀을 가지고 운동력을 발휘해서 창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성과 모양대로 지었으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은 것처럼 여러분도 말씀으로 여러분의 개인의 천지를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주팔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말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병자도 하루에 수천 번 이 말을 하면 계속해서 이 말씀이 들어가서 운동력을 나타내어서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면서 나쁜 병을 죽이는 것입니다. 나쁜 세포를 잡아먹어 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 놀라운 은사를 하나님께 받은 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피가 여러분 가슴에 묻어 있으면 그 피가 여러분 입술을 통해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여러분을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피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옥에서 쓴 편지를 보면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왜 기뻐합니까? 좋은 일이 있으니까 기뻐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내일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고 보혈은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가지고서 여러분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의 복음, 거룩함의 복음, 치료의 복음, 축복과 형통의 복음,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말해야지요. 오중복음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도 전인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마음에 깨달아 알고 마음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봐야 돼요. 아브라함이 하늘을 바라보고 별들을 헤아리면서 자식으로 상상한 것처럼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성경말씀이 다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때 그냥 성경을 보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면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생활 속에 먹고 입고 마실 수 있는 말씀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말씀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여러분 우리에게 참 귀한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에 기록한대로 내놓지 마십시오.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는 대 군대가 이 말씀 속에 있고 모든 해답이 이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입술로 말하면 이것이 여러분 생애 속에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어떤 종교도 수양도 제도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우리를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우리 가슴과 문설주에 발라서 우리를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을 얻고 마귀가 갖다 주는 모든 저주에서 자유를 얻고 여러분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은 보혈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혈의 능력을 통해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는 이 두가지 역사가 우리 속에 꼭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보혈로 해방을 얻고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먼 자는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함이라. 바로 예수님이 어린양 보혈을 우리에게 발라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그 역할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행하는 역사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로 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천당집을 짓는데 예수님은 모퉁이 돌인데 이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은 쓸데없는 돌로써 버렸는데 우리에게는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야 구원이 있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은 구원받는데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불에 구워 먹은 양의 고기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피 흘리는 고통만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불에 굽는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어린양을 불에 구워서 먹어라. 삶아서도 먹지 말고 날것으로도 먹지 말고 불에 구워서 먹어라. 불에 굽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먼 여행을 위한 체력을 얻기 위해서 구워서 고기를 먹으라고 했지만 우리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내려진 그 많은 형벌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이 불에 굽는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아 땅에 곡식을 지어 먹는데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고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데도 고통이 따르고 죽는 고통도 흙으로 돌아가는 괴로움을 겪어야 되고 불화가 있어서 가정에서 부부간에 물고 찢고 싸우고 자식들이 형이 아우를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고 온갖 불행이 다 있었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보혈이 다 극복할 수가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지옥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당함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저주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군중에게서 버림받고,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세상에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짐을 지는 사람이 있으면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고 외롭고 고독한 곳에서 고난당할 때가 제일 괴롭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얼마나 괴로웠기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함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만 말했으면 십자가를 벗어나올 수 있습니다.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안 내려온 것이 희한한 일인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고 군중들은 고함을 쳤습니다. 옆에 달린 강도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증명해보라. 너도 우리도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하라. 예수님은 능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내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를 깨물고 안 내려왔습니다. 왜,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믿는 사람들이 살 것이요 내가 살면 저 사람들이 다 죽는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죽음의 고통을 예수님이 담당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이긴 생명을 우리가 다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예수 영생 내 영생. 나의 모든 나쁜 것은 예수님이 다 가져가시고 예수님의 좋은 것은 내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의 창고를 등에 걸머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피하지 마시고 예수의 죽음을 등에 걸머지십시오. 그 죽음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한 죽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고 당신의 의로움을 허락하시고 여러분의 불의를 짊어지시고 당신의 거룩함을 주시고 여러분의 병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건강을 주시고 여러분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자기의 축복을 주시고 성경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바꿔치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모든 죽음을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예수님이 모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생명을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생각해야 되고 생명을 바꿔치기해서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넘치게 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고 그것을 믿고 그렇게 되었다고 입술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 내 생명이다. 예수 축복 내 축복이다. 예수 건강 내 건강이다. 예수 승리 내 승리다. 그러면 여러분은 매일같이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사는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예수 때문에 심신의 질병도 낫고 하나님과 화평되고 마음의 평화도 예수 때문에 얻고 가난과 저주도 예수 때문에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도 예수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도 예수 때문에 영생 복락의 희망도 예수 때문에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너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꽉 잡고 예수님을 업고 안고 여러분이 그것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산다고 고함을 쳐 말씀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가서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생명의 역동하는 역사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로 말미암아 범사에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여러분을 보고 주님이 얼마나 슬퍼했기에 그 종의 멍에를 대신 짊어졌을까요?
4. 희망찬 가나안을 꿈꾸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평안을 얻는 것이고 장래에 희망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종으로 멍에를 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대신 종의 멍에를 매었기 때문에 이제는 종의 멍에를 허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락 못하느냐.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우는 것도 입술의 말로 축복을 받는 것도 입술의 말로써 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야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으므로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물러가라! 그것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너희 죄악은 물러가라! 너희 유혹은 물러가라! 너희 기침은 물러가라! 너희 질병은 물러갈지어다. 건강하라! 튼튼하라! 씩씩하라! 축복은 다가올지어다. 저주는 물러갈지어다. 가난은 물러갈지어다. 죽음은 물러가라! 생명은 내 것이다. 입술의 고백이 마귀를 향해서 마귀를 쫓아내는 무기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적인 역사를 받아들이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말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고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혔다고 말했으며 죽고 사는 권세가 입술에 있으니 입술을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말 중요해요. 허튼소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허튼소리하면 여러분의 운명을 저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을 여러분께서 골라서 하면 마귀도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말로써 땅에서 묶이는 것입니다. 말을 창조적 생산적으로 하면 하늘에서 똑같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열매를 여러분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영혼이 잘됩니다. 나는 범사에 잘되구요. 나는 강건합니다. 나는 약하지 않아요. 나는 건강해요. 튼튼하고 씩씩해요. 굳세요. 나는 기쁘고 행복해요. 좋은 일이 일어나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요.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세요.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해 주세요. 제가 이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내속에 들어가서 지금 역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알고 여러분 생활에 활용이 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보고만 지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전혀 고난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온갖 고난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식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말씀을 주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장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무장이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도 받아들일 수 있고 마귀도 물리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는 우리가 말씀으로 침노해 들어가면 빼앗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올라가는 천국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예수님이 멋지게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주님이 천국을 주어 놓았어요.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을 주었는데 여기에 침노해 들어가서 여러분 삶을 천국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 천국, 가정 천국, 사회 천국, 천국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나라, 국가가 천국을 누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나라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아니하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와 믿음으로 천국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빼앗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삶이 모두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천국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꿈꾸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모두다 꿈을 꾸는 본성을 주셨어요. 더치 쉬츠 목사님은 『꿈꾸는 본성을 깨우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꿈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함께 꿈꿀 누군가를 원하시며, 하나님 대신 그 꿈을 실행할 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꿈꾸는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꿈꾸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꿈을 꿈으로써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유전자(DNA)속에 꿈을 심으셔서 우리를 꿈꾸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더치 쉬츠,『꿈꾸는 본성을 깨우라』, 2012)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꿈꾸는 유전자를 주셨다. 여러분 적은 꿈도 있고 큰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고 좋은 꿈도 있습니다. 마음에 항상 꿈을 꾸고 있어요. 오늘 여러분이 무의식중에라도 여기 앉아있으면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점포하나 가졌으면 요사이 자가영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어려운데 미용실을 하나 낼까? 백미터 안에 6개 있데요. 요사이 평균.. 미용실이 너무나 많아서... 나는 음식점을 하나 내서 장사를 해볼까? 그것도 꿈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꿈을 꾸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꿈을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꾸면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도 꿈꾸는 자가 꿈 안 꾸는 자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한데 더구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서 꿈을 꾸면 기가 막히지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그것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가까이 가니까 야, 저 놈 꿈꾸는 자가 온다. 저를 잡아 죽여서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요셉 덕분으로 산 것처럼 오늘날 세계 가운데서 꿈을 제일 많이 꾸고 잘 꾸는 민족이 제일 잘사는 민족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꿈을 잘 꾸는 민족인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천당 꿈을 잘 꾸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천당꿈을 잘 꿀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를 잘 안 믿어요. 우리가 꿈을 버리지 말고 개인적인 꿈이나 가정적인 꿈이나 민족적인 꿈을 계속해서 꾸면 그 꿈이 우리를 이끌어가고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주고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도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 꿈을 꾸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꿈을 꾸고 그 꿈을 바라보면 꿈이 여러분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꿈꾸는 하나님의 친구인 것처럼 여러분도 꿈을 꾸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서 여러분 가슴에 문설주와 인방에 당신의 피를 발라 놓고 원수가 오면 보혈을 의지하고 쫓아내라. 생명은 보혈을 통해서 꿈꾸고 받아들여라. 이 땅에서 천국을 침노해서 빼앗으라. 강하고 담대하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죠? 우리 십자가 짊어지므로 그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265장 다 같이 한번 부르십시다.
1.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 하셨으니 /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2.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 온 몸을 피에 담글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3. 심판할 때에 모든 백성 행한 일 대로 보응받네 / 주님의 피로 죄 씻으면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4. 구주의 사랑 크신 은혜 보혈의 능력 의지하세 / 심판의 불이 내릴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꿈을 꾸어요.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슴속에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갖고 바라보고 믿고 말하고 나가십시오. 절대로 부정적인 말하지 마십시오. 꿈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부정적인 말 안합니다.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은 꿈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빈 손 들고 일어날 수 있다. 여러분 말이 꿈을 갖고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게 됩니다. 오늘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 병이 여러분 진을 쳤거든 가라 하십시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못된다. 나는 유월절 양 피가 증거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라! 저주도 지나가라! 여기 있을 곳이 못된다. 너는 불법으로 왔으니까 다 물러가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합법적으로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을 하십시오. 나는 귀에 들리는 말로 축복을 해 줄 테니까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내가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예배 필하고 난 다음 집에 돌아갈 때는 궁시렁 궁시렁 그렇게 말을 하십시오. 너무 큰 소리로 외치면 미쳤다고 하려는지 모르니까 속으로 나는 괜찮다. 나는 튼튼하다. 나는 복 받았다. 나는 승리한다. 그렇게 늘 입으로 궁시렁 궁시렁 하십시오. 굉장히 좋은 성과가 나올 것입니다. 아멘.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2 : 1-20, 에스라 1:1-4 / 박한응 목사
지난주간에는 절기상으로 가을의 문턱이라는 立秋, 末伏도 지나고 또 七夕도 이번 주 목요일입니다. 다음 주일날이 處暑입니다. 그렇게도 지구촌 곳곳마다 천재지변을 일으키고 연일 폭염이 지구를 들끓게 하던 더위도 한풀 지난 것 갔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빠릅니다. 욥은 말하기를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욥7:6)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는 “세월을 아끼라”(엡5:16, 골4:5)고 하였습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지난 주일에 광복절 기념 주일을 지킨 교회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간의 치욕에서 해방이 된 날입니다. 일본의 히로히또(裕仁 1901-1989) 천황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해방을 맞이한 날입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하여 사과는 커녕 반성도 하지 않고 억지만 부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번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베 총리가 발표한 연설문에서도 침략자로서의 반성과 사과는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흡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이라도 일본이 통절한 반성을 한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계속되는 독도의 망언이나 역사 교과서의 왜곡은 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나라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는 말씀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지 금년이 어언 70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때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당시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소위 신세대라고 하는 젊은이들은 당시의 쓰라린 역사나 해방의 감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우리민족은 일본의 압제 하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땅을 잃고, 말과 글을 잃고, 이름까지 빼앗기고, 온갖 자유를 잃고, 이 땅의 모든 자원을 빼앗겼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수많은 문화재를 강탈당하였습니다.
청년들은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젊은 여자들과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군인들의 위안부 노릇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은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려가서 북해도 탄광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 속에서 석탄을 캐다가 이름 없이 죽어갔습니다.
나이 많은 늙은이들만이 남아서 인권도 생존권도 짓밟힌 채 먹을 만한 식량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빼앗아 가고 심지어 밥그릇 숟가락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교회당의 종까지 떼어갔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동원을 하여 소나무의 관솔을 따게 하였으며 짐승도 먹지 못할 콩깻묵을 식량이라고 배급을 주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이에 반대하면 가차 없이 끌어다가 갖은 고문을 하고 급기야는 처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제 36년 간 우리나라에서 죽은 사람과 실종된 사람의 숫자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재산피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놈들은 지금도 독도가 자기들의 땅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고 자기들이 한 행동은 결코 침략이 아니라고 망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우리들은 다시 한 번 그 날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이 광복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이 땅위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뼈저린 전쟁의 수난을 겪어보지 않은 민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역사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외침을 받은 것이 93회라고 하는 분도 있고 300번이 넘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지나간 역사가 얼마나 고통과 괴롬의 치욕의 역사였나를 생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왜 우리 한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수많은 수난을 겪어야만 하는 무능한 민족이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가 산타아나는 말하기를 “뼈아픈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슬기로운 사람은 경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혜로운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8.15 광복은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또한 잊어서도 안 될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날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간의 압제와 온갖 수난과 치욕의 굴레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기적은 바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이 민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정하여 대대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여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8.15 해방의 날을 영원히 기념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사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기억하고 나라와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하여 피 흘려 항쟁한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숨은 애국자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도 전쟁으로 얼룩진 수난의 역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의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첫째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선두로 하여 일가족 70명이 애굽에 들어간 지 430년 만에 200만 명의 인구가 대탈출을 하는 출애굽의 역사요.
또 하나는 BC586년에 남쪽 유다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파사왕 고레스가 해방을 선포함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8.15 해방이 된 후 세계 각처에 흩어졌던 민족이 정든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때에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이나 북해도 또는 동북아시아 등지에서 고국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8.15 해방이 되어서 수많은 우리 동포가 돌아올 때 우리 민족의 감정을 잘 나타낸 ‘귀국선’ 이란 노래가 당시에 유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향산천 그리며…"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올 때의 유월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지켜오는 유월절과 오늘의 우리가 지키는 광복절과는 성서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또 오늘의 우리들은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이 광복절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나의 일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모세의 120년 일생을 통하여 주관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우리들의 일생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보다 한 발짝 더 나가서 하나님은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모두 은혜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1.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는 유월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한지 430년 만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출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대로 모세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시는 대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왕은 듣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더욱 학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9가지의 재앙을 연속적으로 퍼부었습니다.(피, 개구리, 이, 파리, 생축의 죽음,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러나 바로왕의 마음은 더욱 강퍅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게 되었고 이 재앙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구원을 얻어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①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② 양의 고기를 구워서 그 밤에 다 먹되 쓴 나물과 무교병을 함께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③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출발준비를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1) 그러면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은 무엇을 뜻합니까?
유월절에 사용된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은 분명히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오 우리들의 대속의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요1: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과연 흠도 티도 없고 죄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시는 무죄하신 분이신데 인간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같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그 날 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그 심판이 우리를 넘어갈 줄로 믿습니다. <아 멘>
(2) 유월절에는 어떤 행사를 하였습니까?
① 양을 잡아서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삶거나 날것으로 먹지 말고 불에 구워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불에 굽는 것은 곧 성령의 임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②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으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 당시의 고난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써 오늘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③ 발에 신을 신고,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죄악의 도성에서 신속하게 탈출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죄에서 빨리 빨리 탈출하여야 하고 사탄의 올무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머뭇머뭇하면 안 됩니다. 다시 사탄에게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렘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와 같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의 밤에 지켜주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난과 환난의 재앙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며 보호할 때 치료하는 능력이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유월절과 광복절과의 관계(15-2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왜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먹으라고 하였습니까?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고 발효시키지 않은 떡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죄를 의미합니다. 부패를 뜻합니다.
(고전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모든 민족에게 무교병을 먹도록 한 것은 떠나기 전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정결케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불평, 불만, 불신앙의 죄악을 제하여 버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누룩 넣지 않은 떡,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키지는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멀리하고 혼합되지 않은 깨끗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죄악의 요소가 있고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것들은 먹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죄악의 독소가 들어 있는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르고 먹다가 사탄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쥐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모르고 덧에 있는 미끼를 먹다가 잡힙니다. 물고기는 낚시 바늘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미끼를 먹다가 그만 낚시에 걸려 잡히고 맙니다. 아담과 해와는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류의 시조가 죄인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어서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해방을 주셨습니다. 1945. 8. 15.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해방의 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출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학정 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36년 간 일제의 학정 밑에서 이 땅의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과 애국지사들이 피 흘려 하나님께 부르짖어 마침내 하나님이 신원하시사 1943.11.27.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카이로에서 회합을 하고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였으며 1945.8.6.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8.15 해방이 되니 바로 이틀 뒤인 8.17일에 경제인과, 종교인, 교육인, 청년단체등 20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는데 해방이 됨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20만 명은 극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만이 유대인을 학살하려고 세운 50큐빗의 장대에 자신이 달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2) 과거의 쓰라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예>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임금 구천은 오(吳)나라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어 적 왕의 똥을 먹는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구천 임금은 굳게 결심하고 그 결심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용상에 앉지 않고 가시방석에 앉았으며 쓸개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결국은 오나라를 점령하고 그 원수를 갚았습니다.
<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독일의 히틀러가 구라파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당하지 말자. 그리고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석하게 죽어간 600만 명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 기억시키기 위하여 성지 예루살렘에서 수도 텔아비브간의 고속도로의 연변에 600만 그루의 가로수를 심어 애국 혼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한국 국민들은 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피맺힌 외침이 없을까요? 오늘의 우리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지난날들의 기억들을 잊어가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사1:5-6)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광복을 얻은 백성은 올바르게 바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기하여 옛 애굽의 생활을 청산하고, 유월절을 아빕 월이라 정하여 이 달을 정월로 하여 새롭게 역사를 창조하여 나갔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8.15 광복절을 기하여 지난날의 모든 부끄러운 생활과 수치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3.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홍해의 장애물을 넘어야 했고, 사막에서의 목마름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의 침략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서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가는 신앙의 길, 믿음의 길에도 수많은 장애물과 고통과 환난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만이 선민이 사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응답이 왔습니다.
(렘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2)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살길입니다.
이 나라 이민족은 하루속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고 해서 지금 남북한이 정치 놀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망상에 빠져 있는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통일이 되지 않습니다. 또 통일이 된다고 하면 북한 김정은이 바라고 있는 적화통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70년 동안 우리가 그렇게 지켜온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 왔습니까? 그동안 수백억 달러의 현금과 쌀과 비료를 천문학적으로 퍼부어 주었습니다. 금강산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관광객이 가든 안가든 돈을 퍼부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개성 관광이다 백두산 관광이다 하면서 야단을 떨고 있다가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고 이제는 모든 재산들이 압류를 당하고 동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애굽과 같은 죄악에서 빨리 탈출을 하여야 합니다.
① 아직도 죄악의 요소와 자기만이 간직하고 있는 죄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② 게으름과 나태에서 탈출하여야 합니다.
(잠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③ 의심과 불신앙에서 탈출하여야 합니다.
불신앙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불신앙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고,
의심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의심의 사실에 얽매이게 됩니다.
불평, 불만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불평, 불만의 사슬에 얽매이게 됩니다.
의심, 불신앙, 불평은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게 하는 가장 큰 위험물입니다.
결 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은
①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을 막고 있던 홍해를 육지와 같이 갈라서 건너게 하셨고,
② 굶주림의 위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③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④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430년간의 고통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바벨론의 7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8.15라는 해방의 축복을 주셔서 일제의 36년간의 압박에서 벗겨주셨습니다.
해방을 주신 하나님은 6.25의 쓰라린 고통에서도 지켜 주셨고 수많은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고고히 흐르는 강물과 같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 역사 속에 나와 여러분이라는 존재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또 우리나라의 역사도 주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나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귀한 축복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교회의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떻게 살 것인가?(떠나며)
출 12:1-11 / 김명혁 목사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아침 "어떻게 살 것인가?" 란 주제로 20번째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떠나며 삽시다” 이것이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입니다.
1.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년동안 살던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출애굽이란 말을 영어로 exodus 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탈출한다 또는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해서 자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13: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쌔”(눅9:31). 여기 별세란 말의 원어는 exodus 인데 출애굽한다 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고 몸을 떠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4:6).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의 하나는 주변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사마리아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즉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과 나그네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이든지 강요를 당하든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을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떠나 가난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2. 떠남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종교요 애굽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는 기독교의 신앙은 별세의 신앙이요 죽는 신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별세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고 택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별세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하기 위하여 믿고 별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별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바울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 죽음의 신학은 저의 별세 신학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대해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어린양들을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 대신 어린양을 잡아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잡아 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만을 따랐던 사도 바울의 생애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입니다.
3. 떠나면 중심에 서고 죽으면 생명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논리를 뛰어 넘고 실용주의를 초월하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나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와 산지에 유리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도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바울의 죽음은 바울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의로운 죽음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사람들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1956년 1월 고향인 미국을 떠나 남미 에쿠아돌 깊은 산지에 들어가 아우카스(Aucas)라는 야만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이 던진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Nate Saint, Jim Elliot, Ed McCully, Rodger Youderian, Pete Fleming 등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의 죽음은 그들을 영광의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수 많은 아우카스 부족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지금 아우카스 부족이 사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수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이지만 실상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요 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게 되고 죽으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복 55주년 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유월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일입니다. 55년 전 광복의 은혜와 55년 후 민족화해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이 된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서울을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비친척집을 떠나라고 명하시면 아비친척집을 떠나냐 하고 애굽을 떠나라고 명하시면 애굽을 떠나야 하고 세상을 떠나라고 명하시면 세상을 떠나야 하고 몸을 떠나라고 명하시면 몸을 떠나냐 합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잡으며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으며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으면서 우리도 떠남과 죽음의 삶을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떠남이 중심에 서는 길이고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죽게 하시옵소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어린양의 공로
출 12:1-14 / 임덕순 목사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요일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데 이번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올라오셨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시작되는 때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서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노래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맞고 있는 명절은 옛날 애굽에서 해방된 절기인 유월절이었는데, 이번 유월절에는 예수님이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패권국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그렇게 환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밟고 풍랑을 꾸짖으신 그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박멸해 버리고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번 유월절을 특별한 기회로 삼고자 하셨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이었고, 그 방법도 당신의 생명을 죄인들의 죄를 대신한 속죄 제물로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장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유대인들은 들뜬 마음으로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그 금요일에 죽으신 사건은, 유대인들이 지켜온 유월절의 의미를 새롭게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출발을 하는 구원의 역사이고, 이 출애굽기의 중심사건은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은 장차 주님이 오셔서 만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처음 유월절에 관한 기록인데, 주님은 그 유월절에 유월절 양처럼 죽임을 당하시고 그 피를 만백성을 위해서 흘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맞았던 처음 유월절은 애굽 사람의 모든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애굽에 그런 무서운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가정마다 흠 없는 어린양 한 마리씩을 미리 묶어 두었다가, 그날 저녁때에 잡아서 그 피를 바깥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는 구워서 온 가족이 함께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애굽의 장자를 죽이러 온 죽음의 천사가 문에 피를 바른 집은 그냥 지나갈 것이므로 그 집의 장자는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한 애굽 사람의 가정에서만 장자가 죽을 것이요, 그것을 본 왕이 너희를 내어 보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한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끝까지 자기의 것을 삼으려 하며 고집을 부리던 애굽 사람의 집에는 집집마다 장자가 죽었고 왕의 황태자도 죽어버리자 왕은 마침내 항복을 하였고, 이스라엘은 어서 나가라는 명령을 내리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은 사람들은 즉시 그 밤에 해방을 받게 되었는데, 그 밤에 애굽을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날이 해방의 절기가 되었고, 그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 재앙으로 죽은 애굽의 장자는 죄 값으로 죽어야 할 모든 인간의 모습이며,
* 이스라엘을 살린 피 흘려 죽은 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 양고기를 먹다가 얼떨결에 해방 받은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공로 없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애굽에서 해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록 일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죄의 노예로 태어나서 평생동안 죄를 지으며 살다가 죽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가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품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서 구원받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 흠이 없는 어린양을 고를 것,
ⓑ 그 양은 1월 10일 날 준비했다가 14일에 잡을 것,
ⓒ 양의 피를 바깥문에 바를 것,
ⓓ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을 것,
그러면 그 피를 재앙의 사자가 보고, 그 집은 그냥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구체적인 지시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수 있는 흠 없는 분은 오직 예수뿐임을 계시합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우리구원을 위해 미리 준비된 양이셨습니다.
벧전1:18-20은 "너희가 알거니와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느니라." 그리스도는 흠 없는 어린양이요, 창세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미리 준비된 제물이었다는 증언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지칭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라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3) 죽은 양의 피는 양 고기를 먹는 사람의 집 인방에 발라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식인데, 우리 가정은 죄 없는 양이 대신 죽은 가정이라는 표시였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표식이었습니다.(히11:28) 그렇게 하면 양의 피를 바른 그 가정은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얼마든지 많은 죄인도 구원할 능력이 충분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을 구원하십니다.
4) 그 고기는 불에 구워서 먹어야 했습니다. 물에 삶거나 날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명령하셨을까요? 고기를 구울 때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게 되고, 그 냄새가 집안뿐만 아니라 골목을 진동시키게 됩니다. 이것역시 우리 집은 하나님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양을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삶아 먹거나 날로 먹으면 남몰래 먹을 수 있었지만, 구워서 먹으라는 것은 그 사실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이 자기가 신자임을 드러내며 신자답게 살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양을 잡아야 하며 그 피를 문밖에 발라야 하며, 그 고기를 구워서 냄새를 피우면서 요란스럽게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집에 장남이 죽지 않은 것은 어린양의 피를 본 하나님이 넘어가 주셨다는 사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목하신 흠 없는 양의 희생을 믿은 믿음으로 되었음을 숨기지 말고 광포하라는 것입니다.
피를 제공한 흠 없는 양은, 유월절에 죽으신 우리 주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 사람들이 모여서 그 양고기를 구워서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은 그집은 무엇입니까? 그 집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 안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피 뿌린 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집은 거룩한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그 어린양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가정인 교회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피 뿌린 집입니다. 이 교회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피로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1) 노아시대, 홍수로 죄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방주에 들어가 있었던 여덟 사람만 구원을 받았으며, 방주 밖에서는 구원을 받은 이가 없었습니다.
2)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격할 때, 기생 라합은 약속의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단 집안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 집에 모였던 가족까지 구원받았습니다.
3) 유월절에도 문에 피를 바른 집안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고, 약속의 붉은 줄이 매달린 집이며, 문설주에 예수의 피를 뿌린 집으로, 그 집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양의 피는 사람들에게 뿌린 것이 아니라 집의 문에 뿌려졌고, 피 뿌린 집을 떠나서 길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은 그 피 공로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밖에는 비명소리가 난무했고, 사망의 그림자가 왕래하고 있었지만 피를 바른 집 안에 모인 사람들은 평안했고 안전했으며, 찬송을 부르며 배부르게 양고기를 구워먹다가 아무 한 것 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신 우리 주님과, 그분 때문에 생명을 얻은 우리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집이고, 함께 구원 받은 성도끼리의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생명과 말씀이 양식이 됩니다. 주님은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구원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된 양식이 있는 곳은 교회뿐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곳도 교회뿐입니다.
그날 밤 식탁을 중심으로 자기들을 위해 죽은 양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뿌린 집안에서 양고기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은 대로, 여럿이 둘러서서 함께 고기를 먹되 그날 밤에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식구가 너무 적어서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는 경우라면, 이웃집과 함께 양을 잡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날 밤에 양을 먹기 위해 고기 주위로 모였던 사람들은 육신의 가족 중심이 아니라 양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으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 즉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 중심이십니다.
오늘은 성례주일이고,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 벌 받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모인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는 내 살이라” 하셨고, 붉은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을 마시라. 이는 너희와 맺는 새 언약의 피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성찬식은, 애굽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그 유월절 밤에 준비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 삥 둘러서 먹던 그 유월절 만찬과 같습니다. 그들의 양고기는 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주었지만, 오늘 우리가 먹는 이 성찬은 영원한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다시 이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흠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며, 음식을 먹듯이 그분을 내 몸과 마음 안에 깊이 받아 믿어서 지은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을 면하고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인도와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살리시는 주님의 역사와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주님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에 마지막 재앙이 내려지던 그 밤에,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 바깥에 바르고 양을 먹을 수 있는 단위로 구운 양고기 주위로 삥 둘러서서 먹던 한밤중의 식사는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네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였다는 것, 둘째, 그 양의 희생 때문에 자기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 셋째, 양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그들은 이제 양 한 마리 단위의 새 가족이 되었다는 것, 넷째, 그들이 먹은 그 양고기가 그들이 먼 새벽길을 걸어 애굽을 떠날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이 성찬은 주님이 명령으로 제정하신 것이므로 순종하여 참여함이고, 둘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마지막 날에 살린다고 하시며 새 언약을 제정하셨으므로 나는 단지 믿음으로 그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 셋째,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 참여하여 내가 거룩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표식이고, 넷째, 믿음으로 내 안에 모신 주님이 내게 힘과 능력이 되어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을 믿는 확신으로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이렇게 순종과 믿음과 사랑을 재다짐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열릴 잔치에도 참여하도록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은 사람, 주님과 새 언약을 맺은 사람답게 살아갑시다.
피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출 12:1-14 / 조상호 목사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퀴즈를 내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 인체 내에 있습니다. 성인을 기준으로 하면 이것의 길이는 놀랍게도 9,6000Km나 됩니다. 이것은 성인 한 사람을 기준으로 4리터에서 6리터나 됩니다. 이것은 가만히 있지 않고 초속 60미터, 시속으로 계산하면 무려 시속 21킬로미터나 되는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속을 흐르는 액체입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과 산소를 실어 나르고, 노폐물을 가져가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혈장, 혈소판, 적혈구, 백혈구라는 네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피’입니다.
이 ‘피’는 생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심장이 5분정도 멈추어 움직이지 않으면 대부분 뇌사상태에 빠집니다. 따라서 피는 우리 몸을 유지시켜 주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피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유전공학이 사람을 복제하는 수준까지 왔다고 해도, 사실 피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뚱뚱한 사람이나 마른 사람이나, 피부 색깔이 까만 사람이나 하얀 사람이나 노란 사람이나, 모든 사람의 몸속에는 이 ‘피’가 들어 있습니다. 피가 잘 돌면 건강하지만, 피가 잘 돌지 못하면 병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의학계에서는 우리 인간의 생명이 피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에서 언급했습니다. 성경은 피로 젖은, 피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700번이나 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재미있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짜 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 참깨를 틀에 넣고 짜면 무엇이 나옵니까? 참기름이 나옵니다. 들깨를 틀에 넣고 짜면 무엇이 나옵니까? 들기름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피에 관한 책으로, 피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어린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같은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잡은 후, 그 피를 번제단에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의 피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한 마디로 ‘피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피 이야기를 하면 애써 외면을 합니다. 21세기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고상한 이야기나 할 것이지, 천박스럽게 왜 피의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피 이야기를 애써 외면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교훈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보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혈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멋진 십자가를 세워놓은 현대교회가 보혈의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모든 죄와 허물을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의 피에 있음을 믿습니까? 십자가의 보혈에는 모든 죄와 모든 질병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경에는 피의 능력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은 피의 능력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400여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면서 430년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바로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등의 9가지 재앙을 차례로 애굽에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애굽 사람 중 첫 번째 태어난 모든 남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시겠는 작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부터 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이나 염소를 잡은 후, 그 피를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문 좌우 설주’란 도어 프레임 중 양쪽에 있는 기둥을 말하고 ‘인방’이란 도어 프레임의 윗부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이 말씀에 순종하여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신이 Pass Over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 있는 장자나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피를 바르지 않은 집들은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이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기념일로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이 유월절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강조하셨을까요? 왜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유월절 어린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5장 7절 하반절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Symbol)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피의 능력,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죄 사함의 능력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하면 흠 없는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께 속죄의 희생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사하기 위한 완전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습관을 따라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수천마리의 송아지와 염소와 양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는 단번에 정결케 하는 영원한 속죄의 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에는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국적과 인종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보혈에는 부정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중의 하나인 <맥베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멕베드가 왕이 되려고 던컨 왕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밤마다 죽은 던컨 왕의 환영이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힙니다. 맥베드는 잠 못 이룬 밤을 보내면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오! 아라비아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주홍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흰 눈보다도 더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화목케 하는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0절을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십자가의 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뿐 아니라, 우리와 이웃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부터 14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진정한 화목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만물을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R.A 토레이 박사가 지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책에 보면, 자기의 행위로서 평안함을 얻어 보고자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의 종교는 두 글자 종교요, 나의 종교는 네 글자 종교야." 그러자 자기의 행위로서 평안함을 얻고자 노력했던 그가 반문했습니다.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러자 그 친구는 이러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자네의 종교는 영어로 Do종교(자기의 노력으로 행한다는 뜻)요, 나의 종교는 영어로 Done종교(남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다. 자네는 자신의 행함(Do)으로써 평화를 얻으려 하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그 일에서(to be Done) 평화를 이미 얻었다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이웃들과도 더 나아가 만물이 사로 화목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원만치 못한 관계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는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들을 화목의 삶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승리케 하는 능력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우리를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영적 전쟁의 무기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예수님의 이름이 영적 전쟁의 무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영적전쟁의 무기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영적 무기가 되는 이유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정죄하고 참소할 때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성도들과 사탄이 싸움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사탄을 이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2:11).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보혈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떨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보혈 찬송만 불러도 도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오클랜드에서 청년담당 전도사로 사역할 때, 제임스 킴이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오클랜드 대학에서 세계역사를 전공하는 그 형제는 역사에 관련된 책 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나 중국의 각종 신화 등을 달달 외울 수 있을 만큼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형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방안에는 그 형제가 입고 있던 옷가지와 지갑이 그대로 있고, 신발도 현관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흔적도 없고, 이웃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형제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형제가 머무르고 있는 이모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모와 이모부가 나서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했지만, 경찰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교회에도 연락이 와서 청년 담당이었던 저도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그 형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의 이모가 한국에 있는 그 형제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해서 급히 그 형제 어머니가 오클랜드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찾으러 가족이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가족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흘 만에 엉망인 모습으로 그 형제가 나타난 것입니다. 눈동자는 풀린 채 온 몸이 오물이 묻어 있고,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은 반갑기도 하고, 그 동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서 그 형제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무리 물어보아도 입을 절대로 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로 연락이 외서 담임목사님과 교회에 사모님 그리고 모 군사님과 함께 그 댁으로 갔더니 벽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와 담임목사님이 아무리 물어보아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정신 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풀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1시간 동안 찬송가 중에 보혈에 관계되는 찬송을 1시간 동안 힘차게 박수치면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3~40분 동안 안수하며 통성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또 1시간 동안 보혈찬송을 부른 후, 안수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약 4시간쯤 지나자 그 형제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물어보니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 형제의 영이 날마다 눌렸다는 것입니다. 잠을 잘 수가 없고,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혼란스럽고, 나중에는 공부는커녕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매일 다른 Pharmacy에 가서 조금씩 조금씩 수면제를 구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모으다보니 꽤 많은 양의 수면제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수면제를 가지고 지붕과 천장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공간으로 아무도 모르게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사흘 낮 밤을 먹지도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거기에서 죽어가다가 극적으로 깨어나서 보니 목이 말라 물 마시러 그곳에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형제는 자살하라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치유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후 부모님은 걱정이 되서 그 형제를 설득하여 오클랜드 대학 역사학과를 포기하게 하고, 제가 다니고 있던 신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1년 동안 그 형제와 함께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새벽기도에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고, 새벽기도를 마치면서 곧바로 함께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받고, 신학교를 마치면 집에까지 데려다주며 제자훈련을 시키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찬양팀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1년이 지난 후, 군문제도 해결하고 한국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며 한국으로 귀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보혈에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사탄을 누리는 힘과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역사가 있을 때 보혈찬송을 많이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았다. 나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얻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한다."고 자꾸 입으로 자신을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악한 마귀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탄의 세력은 물러가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능력
넷째로 예수의 피에는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질병이 영적이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질병과 문제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과 의술로 고치지 못하는 질병도 고칩니다. 파괴된 가정을 치유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의사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사 필요합니다. 때때로 저도 육신의 질명 때문에 의사를 만납니다. 우리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고치지 못할 병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사가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을 통해 치유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는 우리의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가운데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여러분들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취업비자나 영주권 등의 문제로 이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래도 예수 안에 여전히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다 포기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못해도, 세상은 못해도 예수님의 보혈은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과 가정과 우리 교회에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인해 모든 죄를 사함 받아 하나님과 주위 사람과 화목케 될 뿐 아니라, 날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며 여러분들의 삶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월절의 의미
출 12:1-14 / 박덕기 목사
그 동안 절기 설교와 전도 설교를 하느라 중단했던 출애굽기 강해 설교를 다시 계속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모세와 아론을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게 되는데 1)피 재앙 2)개구리 재앙 3)이 재앙 4)파리 재앙 5)악질 재앙 6)독종 재앙 7)우박 재앙 8)메뚜기 재앙 9)흑암 재앙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 가운데는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신으로 섬기는 것들에게 내린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일 강이 피가 되게 한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을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섬겼기 때문이고, 개구리도 애굽 사람들이 다산의 신으로 섬겼던 것이며, 파리 역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이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섬겼던 신이 태양신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흑암 재앙을 통하여 태양은 결코 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에게도 벌을 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참신이심을 믿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만이 아니라 불교의 석기모니에게도 유교의 공자에게도 이슬람교의 마호멧에게도 벌을 주실 수 있는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참신이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인생들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애굽 왕 바로는 재앙이 내리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척 했다가도, 재앙이 물러가면 또 다시 변덕을 부리는 강퍅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게 됩니다. 이렇게 완악한 자는 언제든지 굽힐 줄을 모르다가 꺾어지는 법입니다. 완악한 바로와 그 왕조도 이제 망하지 않고는 안 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완악한 바로 때문에 왕궁을 위시해서 애굽의 모든 집집마다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이 죽는 참혹한 심판이 단행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악한 자에게 언제나 있습니다.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계속 고집 피우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빨리 말씀에 순종하면 좋을 터인데 끝내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신자들을 많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있으면 빨리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처럼 실컷 얻어터지고 항복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준비하신 재앙, 그것은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다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9가지 재앙과는 비교가 안 되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출 11:5에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위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고 했습니다. 장자가 모두 죽는다는 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장자란 그 가정의 기역의 시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그 가정의 기운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가정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애굽이 망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출 12:29-30에 보면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십계’라는 영화를 보면 그날 깊고 어두운 밤에 짙은 안개 같은 것이 하늘로부터 소리 없이 흘러나와 땅을 휘감기 시작하는데, 그 안개가 휘감는 집집마다 여인의 구슬픈 통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아침이 되니 온 애급 땅에 슬픈 통곡소리만 들리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굽 천지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한 집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사람은 물론 짐승 한 마리도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사람들과 구별하여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곧 유월절 규례를 제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꼭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유월절 규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곧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이 피를 바른 곳은 문 좌우 설주 곧 양편 기둥과 인방 곧 문 윗기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각 집의 출입구에 있는 문을 지탱하는 좌우 기둥과 위에 가로로 댄 기둥을 말합니다. 즉 문을 둘(덧말:㐈)러싼 네 개의 기둥 가운데 사람들이 밟을 수 있는 문지방을 제외한 세 개의 기둥에 모두 피를 바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출12:13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대재앙의 밤에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Pass Ov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모두 죽이실 때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아무런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에 슬픔과 애통이 가득 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서는 한 가정도 곡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유월절 절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유월절에 담겨진 깊은 뜻을 좀더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인들에게는 죽음의 밤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크로스웨이’ 공부를 통해서 배운 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 드라마에서 제 1막은 구약이고 제 2막은 신약인데,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사건이고,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구약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이 유월절에 담겨진 깊은 의미를 몇 가지로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월절 양은 생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장자 재앙으로부터 구원하는데 필요한 유월절 양에 대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 가운데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들었거나 온전치 못한 것은 결코 유월절 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 양에는 완벽한 상태의 어린 양이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월절 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은, 죄인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는 것을 예표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의 토대가 된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월절 희생양이 요구되었듯이,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영적 유월절 희생 제물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영적 유월절 희생 제물은 유월절 어린 양이 흠이 없고 완벽해야 했듯이, 죄와 허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애급 전역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밤이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피를 뿌리고 발랐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애급의 전역에 번개 불과 같이 임하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의 피가 뿌려져 있는 이스라엘의 집안에는 구원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의 집이든 목동의 집이던, 강도의 집이던, 창녀의 집이던 상관없이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안에는 구원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볼 때에 죽음의 사자가 넘어 갔습니다. 유월절 양을 통해 이스라엘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유월절의 양의 피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장차 이 땅에 오셔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절기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면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도 죽음을 면하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피를 믿음으로 바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멸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피 묻은 집밖에 있는 모든 자를 다 심판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피 묻은 문설주 안에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가 피 흘려 세워주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피 묻은 집을 떠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예배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모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피 묻은 십자가 아래 모여 있어야 만이 구원이 확실합니다.
2. 유월절 양은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곧 그들의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그 지긋지긋하고 처절한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이 유월절입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야 하는 그 고통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중노동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원수 마귀의 결박에서 놓여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가난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자유를 이 해방을 선포하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유월절은 최고의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지구상에 지켜지고 있는 여러 절기 중에 가장 오래된 절기입니다. 3500년 전에 제정되어 매년 지켜지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할 때 한 유대인이 잡혀 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공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유대인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던 바로가 죽었습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이 죽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 하는 당신이 오히려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매년 하나님의 절기를 지켜 왔습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언젠가는 당신들에게서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민족입니다. 3500년 동안 지켜진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구원하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리는 매 주일의 예배도 그치지 말고 드려야할 저와 여러분의 절기인 줄로 믿습니다.
4. 유월절은 최대의 절기입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교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남자만 27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10명이 한 마리 꼴로 양을 잡았다면 유월절 기간에 27만 마리의 양이 죽은 것입니다. 당시에 불가사의한 기적은 270만 명이 몰려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잠을 잤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라도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사람입니다. 나를 좀 재워 주십시오!”하면 주인은 두말없이 재워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동시에 270만 이상이 머물 수 있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를 만나는 어떤 날이 가장 큰 날입니까? 주님 만나는 날을 최고의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빠짐없이 그날에는 성전에 모였습니다. 우리도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유월절은 최초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는 7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의 명절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공간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였고, 시간적으로는 이 절기를 중심한 신앙입니다. 유월절은 7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있는 절기입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1년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그때를 1년의 시작으로 정한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자기가 구원받은 날을 기념해서 생일을 육신의 출생으로 정하지 않고 예수 믿기 시작한 날로 정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전과 주후가 나뉘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날마다 주안에서 새날이 시작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6. 유월절은 쓴 나물을 먹는 절기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기쁜 추억이 있고 쓰디쓴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기억은 오래 남기를 원하며 슬픈 기억, 뼈아픈 상처는 속히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과거 아픈 경험을 또 다시 반복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후 이스라엘이 독일에 대하여 한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우리에게 준 고통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픈 기억을 되씹으라고 말씀합니다. 출 12:8에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라고 했습니다.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으면서 애굽의 고통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애급생활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그 고역을 당하던 노예생활을 하며 짐승 취급 받던 생활을 잊지 말라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생활이 마치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을 회개하는 쓴 나물을 먹으십시오. 뉘우치는 마음, 눈물 글썽이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회개하는 것이 쓴 나물을 먹는 것이요, 그러할 때 주님이 내게 오셔서 능력이 되어주시고 늘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너무도 중대한 민족의 최대명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400년 동안이나 애굽의 종살이 하던 데서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애급천지를 초상집으로 만드시던 그날은 과연 죽음의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져 있는 그 집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심판이 없었습니다. 오직 구원만이 있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 노아의 방주, 광야의 구리 뱀, 도피성 제도 등등…….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든 구약 시대에 희생된 모든 양이 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때에 마귀가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갑니다.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인도에 가면 비전도체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천둥번개가 치면 사람들이 그 아래로 몰려듭니다. 그 나무 아래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 그늘은 안전한 포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보혈을 겸손히 의지하십시오. 누구든 좋습니다. 창녀면 어떻고 강도면 어떻고 세리면 어떻습니까? 어린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 곳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죄용서 받고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묻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문설주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가족들이 심령의 문설주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재앙이 넘어가고 저주가 지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심판이 넘어가고 죽음이 지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여러분의 가정에 구원의 감사와 감격과 축복이 넘치시기를 우리의 유월절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출 12:1-14 / 이수영 목사
오늘은 사순절(Lent)의 첫 주일입니다. 교회는 사순절을 부활절(Easter)을 맞이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삼고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순절은 교회가 세례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마지막 단계로 삼은 기간이었습니다. 즉 부활절을 세례 받기에 가장 적합하고 의미있다고 여겼던 고대교회에서는 세례지원자들이 사십 일 동안 금식 등 일상생활에서부터 떨어져 상당히 어려운 준비를 거친 후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와서 사순절은 세례 받을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동참하는 절기가 되었고, 그러면서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서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서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서이든 이 사순절은 달리 말하면 교회공동체의 자기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례가 갖는 의미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확립이라는 의미에 상응하기도 하고 그것들을 예표한 것이 구약에서의 유월절과 이스라엘백성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사순절기간에 유월절과 출애굽의 맥락에서 하나님나라백성의 자기정체성을 찾아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옛날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 땅에서 나오기 직전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는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나가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바에 따라 바로와 애굽백성들이 두려워할 만한 여러 가지 표징과 이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바로는 더욱 마음을 강퍅하게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기를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수밖에 없게 만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무서운 재앙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한날 밤에 애굽땅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맏아들들이 모두 죽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바로의 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짐승들의 첫새끼들까지도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셔서 이 죽음의 재앙에서 구출코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죽음의 재앙을 면하며 애굽 땅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새로운 삶을 향하여 갈 수 있기 위하여 취해야 할 몇 가지 행동지침을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준비사항으로서 모세와 그 형 아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명령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며 그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본문 2절에서 보는 대로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이 달"이라고 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곧 출애굽이 이루어질 그 달일 터인데 그 달을 이제부터는 한 해의 첫 번째 달로 삼으라는 명령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에는 가을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연력을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cf. 출23:16, 34:22), 이제부터는 가나안 말로 아빕월이라고도 하고 그 뜻을 따라 이삭월이라고도 하며 훗날 바벨론 식으로는 니산월로 불리웠던 오늘날의 3월과 4월 사이에 해당하는 이 달로부터 새해를 시작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 일종의 건국연호를 정하는 일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들처럼 늘 "소화 몇 년"이라고 연도를 지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는 단기를 사용하여 "단기 몇 년"으로 연도를 표시하곤 했던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나라 땅에서 거하며 다른 민족의 억압아래 노예처럼 학대와 착취, 고통과 오욕 속에 살던 상태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자주독립국가로 옮겨지게 된 이스라엘은 마땅히 타민족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새 시대 새 삶의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에 앞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 중 유의해야 할 둘째 사실은 본문 3∼7절에서 보는 대로 각 가족마다 "흠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 먹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굽사람의 집집마다 장자들을 치실 때 이 어린양의 피가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집들은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넘어감으로써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안전하게 살아남았고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고유명절인 유월절이 유래하게 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타민족과 구별되게 하시기 위하여 명하신 표지였고, 택하신 백성이 자유와 독립과 복된 삶을 향하여 안전하게 이끌어 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셋째 명령은 본문 8절에서도 간단히 언급되었지만 15∼20절에서 길게 반복되어 주어진 바와 같이 무교병을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한 주간 동안 집안에서 누룩을 다 없이하고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을 먹을 것이며, 만일 유교병을 먹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질 것임을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출애굽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룩을 제거하라 하신 명령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누룩은 지난해의 소출에서 오는 것이며, 옛 것의 남은 것을 의미하곤 합니다. 중국호떡집에는 밑반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새로 호떡 구울 반죽을 할 때마다 그 밑반죽을 섞어서 반죽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반죽의 일부를 또 그 다음날을 위한 밑반죽으로 남겨둡니다. 그래서 어떤 호떡집에는 몇 대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올 때부터 가지고 온 밑반죽, 다시 말하면 누룩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누룩이라는 것이 옛 것의 남은 것을 뜻한다면, 한편 떡은 삶의 수단이며 삶 그 자체를 상징하곤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집안에서 누룩을 없이 하고,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며, 누룩 섞은 떡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삶과 결별하고, 새로 시작될 삶 속에 옛 삶의 방식을 섞지 말 것이며, 여전히 옛 삶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백성과 그 백성의 삶이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삶으로부터 분명히 구별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생각해 볼 것은 본문 11절에 있는 "너희는 이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으로나 일반적으로도 음식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발도 벗고 허리띠도 풀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최대한 편한 자세로 천천히 먹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즐기며 먹기에는 가장 부적절한 방법을 명하셨는데 그 뜻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 삶을 시작함에 있어서 망설임이나 지체됨이 없는 결연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출발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즉각적인 준비성을 지닐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삶에 대한 미련이나 또는 육신적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될 것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뜻으로 보아도 잘 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펴본 하나님의 명령들, 출애굽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다소 별나 보이는 이 명령들이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코 우리와는 상관없는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의 한 토막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 자체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노예상태와 죽음과 고통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약속된 자유와 복락을 누리는 삶에로 나아가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며, 오늘 본문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실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의 일부분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 모든 사건과 그 모든 말씀은 곧 하나님나라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곧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야기이며 우리가 지키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앞서 언급한 네 가지 명령의 의미를 우리 자신과 연관시켜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출애굽 하게 될 그 달로 해의 첫 달을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누릴 새 나라 새 시대 새 삶의 기원과 시작을 유월과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두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백성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삶의 출발과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두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얻은 새 생명, 이 자유, 모든 기쁨, 모든 행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깨닫는 고백과 감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표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소망과 위로와 힘과 지혜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아져야 하며, 우리가 즐거워하고 힘써 일하며 애쓰고 노력하는 것, 섬기고 사랑하는 것, 또 때로는 애통하며 때로는 분노하는 것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때문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백성들을 세상사람과 구별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표지입니다.
둘째는 흠없는 어린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타 백성들과 구별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고자 지정하시고 제시하신 길이라고 했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살과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길이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과 구원의 길로서 주어졌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했고 사도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고전5: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말씀하셨으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하셨습니다. 22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린 후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출12:22)고 했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소위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앙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교회 안에 물의를 빚는 일들이 있으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다른 생명의 길이 없으며, 이 신앙고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 피로 지켜지는 교회의 문 밖에는 구원의 도가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했습니다. "오직 예수로만"이라는 신앙고백이야말로 하나님나라백성의 참된 표지임을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집에서 누룩을 없이하고 무교병을 먹으라는 명령과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애굽사람의 노예상태에 있다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새로 시작되는 삶 속에 옛 삶의 찌꺼기를 섞지 말라는 뜻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원받은 우리들 하나님나라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제는 새 삶의 모습을 지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삶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살수는 없습니다. 옛 삶의 찌꺼기를 우리의 새 삶 속에서 단호히 그리고 철저히 제거하는 노력이야말로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표지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5:7-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넷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새 삶을 시작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결연한 의지와 즉각적인 준비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또 옛 삶에 대한 미련이나 육신의 배를 채우는 즐거움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지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했습니다. 이것 또한 오늘날 하나님나라백성의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입니다. 아직도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로 인한 구원을 받아들이면서도, 행동으로는 옛 것의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며 차일피일 새 삶의 출발의 결단을 미루고 있다면 하나님나라 백성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침략과 강점과 학정과 착취 아래 있다가 한국의 독립국임과 한국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한 3.1독립만세사건을 기념하는 3.1절을 몇 일 전 새로 맞은 우리이기에, 그리고 일본이 그 침략의 범죄성과 그 숱한 반인륜적 만행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그 사악한 침략주의근성과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리고 있는 오늘이기에, 더더욱 우리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명령들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지녀야 할 자기정체성의 표지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보고 깨달음으로써 참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의 표지를 잊었거나 잃어버렸었다면 회개하고 새로워짐으로써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과 자유와 행복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3.1절과 맞물린 이번 사순절 첫 주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월절과 광복절
출 12:!-14 / 이필재 목사
교인 가운데 두 분이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조그만 소유가 있는데 이것을 정리해서 그 50퍼센트를 선교에 쓸 것이니 그렇게 계획을 해주세요.” “그러면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아프리카를 다녀온 것입니다. 21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시는 선교사님과 만나서 아프리카 7개국에 갈보리교회 선교사 5명씩 35명을 파송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7개국을 다 다니지는 못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수와질랜드, 모잠비크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거의 비슷한 상태이니까 그렇게 알고 하시면 될 것이라고 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버스를 타고 세 나라를 돌았습니다. 우리가 남아공 임마누엘 신학교 출신들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는데 그 신학교에 가서 제가 집회를 인도했고, 수와질랜드는 고등학교에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고 왔습니다. 또, 모잠비크의 한 초등학교 전교생 750명에게 우리 교인들이 주는 선교 헌금을 가지고 한국에서 그 학생들이 평생 한번 보지도 못한 좋은 학용품을 사다가 골고루 다 나눠줬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교직원들도 좀 쓰면 안 될까요?” 그래서 쓰라고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다 훌륭하게 잘 마치고 현지목회자들과 다 계약하고 서류가 오는 대로 갈보리교회 선교사로 35명이 아프리카 7개국에서 일하게 되는 일을 금년 말까지 매듭을 짓기로 약속하고 돌아왔습니다. 비행기 타고 무사히 왔는데 아프리카에서 여기 인천까지 오는데 19시간 30분이 걸립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 주일입니다. 이 세상에 약소국가들은 거의 다 독립 기념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강대국들에게 침략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전쟁 역사를 살았고 약소국가는 식민지 역사를 끊임없이 겪어왔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430년이나 애굽에서 식민지 민족으로 살다가 모세를 앞세운 하나님의 민족 해방 구원의 역사, 유월절이 오늘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과 대한민국의 광복절은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애굽 통치에서의 자유를, 한국인은 일본 통치에서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기념식을 한국 사람들의 광복절보다는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있는 것을 제가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달력을 니산월이라고 하는데, 유월절은 정월입니다. 1월 14일부터 8일 동안 지킵니다. 첫째 날을 유월절이라고 하고 나머지 7일은 무교절이라고 부릅니다. 이 첫날은 양을 잡아 번제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유대 나라도 유월절 행사가 많이 간소화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이 유월절 때가 되면 적어도 전국에서 20만 마리 정도의 양을 잡아서 유월절 행사를 치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 양을 잡는가?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 하던 날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약속으로 믿는 기념입니다. 일주일 동안 조상들의 광야 고난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이들은 누룩 없는 무교병 떡을 먹는데 이 떡은 참으로 맛이 없습니다. 떡인지 과자인지 빵인지 분간이 안가는 그런 밀가루 덩어리를 만들어서 일부러 맛이 없게 해서 먹는 것입니다. 인생의 쓰디쓴 고난을 상징하여 입맛에 쓴 나물을 먹으면서 민족 해방의 기쁨을 몸소 느끼는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 광복절도 60년이나 지나서 기념식이 점점 더 간소화되고 나중에는 이런 날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아마 국제 사회에서 과거에 어두운 역사를 자꾸 논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논리 때문에 그런지 이런 것들이 점점 간소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민족 해방의 사건은 BC 1446년의 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사건입니다. 3500년이나 지난 유월절 행사를 지금도 변함없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민족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 있든지 유대인들이 다 똑같이 유월절 행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대다수가 매우 교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방 민족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아니한 견해와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세계관이 넓은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을 휴스턴에서 만나서 유월절 행사에 초대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랍비는 나 같은 대한민국 개신교 목사를 그 자리에 초대해서 유대교 신자들로부터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는지 걱정할 만큼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무교병 떡도 먹고 쓴나물도 먹었는데 저는 감정 없이 그냥 참여할 뿐이었는데, 거기 참여한 나이 많은 유대인들은 3500년 전 민족의 역사뿐인데도 거의 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 떡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대략 그 순서와 자리를 말씀드리면 가정 단위로, 또는 교회 단위로 지키고 있습니다. 가정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대표로 인도합니다. 식탁에는 두개의 떡과 무교병, 그리고 네 개의 잔이 미리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도자가 첫째 잔을 먼저 마시고 가족들에게 돌리는데 “이 잔은 헌신의 잔이라!” 이렇게 말하면서 다 같이 마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애굽과 광야 생활의 고난을 의미하는 쓴나물을 먹는데 이 때 성경말씀 출애굽기 12장 27절과 13장 8절을 낭독합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그 다음에 두 번째 잔을 마시게 되는데 이 잔을 의문의 잔이라고 부릅니다. 왜 의문의 잔이냐 하면 이때는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밤은 다른 밤과 구별되며 특별한 의식을 진행하는 것입니까?”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이 그때 한사람이 나서서 출애굽 과정을 설명해주고 시편 113편과 114편을 노래로 함께 부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그러고 나서 무교병 떡을 떼어 나눠먹으면서 또한 양고기를 찢어서 나누어 만찬을 가집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잔을 마시는데 축복의 잔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높이 들고 축복 기도를 합니다. 주님도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시편 115편에서 118편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구원이 되셨도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그 잔을 마시게 됩니다. 노래 부른 후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마시는데 그 잔을 기쁨의 잔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유월절 만찬의 순서가 모두 끝나는데 이런 순서를 유대인들은 세계 어디서나 이때가 되면 다 행합니다. 기념식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그 랍비는 친절하게 나를 초대한 이유를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우리 유대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유대인은 돈에 지독하고 타인종을 무시하며 인색하기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크 같다고 생각한다. 맞다. 우리가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왜 그런가?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벌써 지구상에서 멸종되었을 것이다. 하도 많은 고난을 당한 민족이라는 것을 너는 기독교 목사이기 때문에 알 것이다.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이라는 인구가 죽은 사실을 역사에서 배웠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유대인이다. 우리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바람직한 성장을 했다. 그러나 역사는 또 바뀐다. 미국에서 언제 또 유대인 핍박이 일어날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오늘 너를 초대한 것은 듣자하니 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의 뒤를 따라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내가 볼 때 그런 것 같다. 유대인의 맛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의 의미가 앞으로 ‘제2의 유대인’이라는 별명을 듣는 너희 민족에, 그리고 너의 목회 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 너를 부른 것이다.” 그 랍비는 그때 75세였고 저는 3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되었을 때 유대인 공동체 대표들이 미국 인구 조사국을 찾아가서 호소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 미국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 2퍼센트 60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 하면 미국의 400명 재벌 명단에 2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소가 무엇인가? 제발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부자 되었다는 발표를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권위 있는 신문이 ‘뉴욕타임즈’라고 말을 하는데 슐츠버거라고 하는 유대인이 사장입니다. 유대인이 경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워싱턴포스트지, CBS TV 등 언론기관을 유대인들이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연구를 온 세계 성직자들이 아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일 소원하는 직업이 무엇인가?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랍비가 되는 것, 종교지도자가 되는 일을 제일 좋아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랍비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을 직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일의 대행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렀다는 랍비가 존경의 제1순위입니다. 랍비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이 아이 머리만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 그것이 유대인들이 랍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랍비의 말을 불순종하는 교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가 되는 일을 제일 좋아합니다. ‘랍비는 하나님께 제일 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유대인들이 제일 많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선생님 되는 일입니다.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 인구의 20퍼센트가 교사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600만 중에 20퍼센트가 선생님입니다.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뉴욕에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의 5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대학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10개 대학,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10개 대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10대 대학 교수의 3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하버드 대학은 50퍼센트가 유대인 교수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 중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50명입니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죠?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이 되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에 의사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선호합니다. 미국에 의사와 변호사가 그렇게 많은데 유대인이 가장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변호사들 중에 2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거의 이 세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정신적 분야에 강하다고 평가할 수가 있는데 그 강인한 정신력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기초한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말씀에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3500년이 지났는데도 첫 번 유월절과 똑같이 지키고 있다는 현실을 보고 사실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나라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종교가 관여한 결과에 대해서 역사가들이 다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결론이 있습니다. 고려를 망친 것은 불교라는 것입니다. 고려 말년에 정치의 가장 중심부에서 신돈이라고 하는 스님이 참여하므로 무너지는 고려가 멸망한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이조 500년에는 유교가 너무 깊이 정치에 관여해서 권위주의 세상, 생명 경시, 남존여비, 양반 쌍놈이라는 차별사회, 어린이 학대 등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세상을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세상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의 종교 가운데도 기독교인이 가장 많고, 고위관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역사가 앞으로 500년이 지난 후에 2000년대 대한민국은 기독교인이 망쳤다는 이런 평가가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1880년대는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매우 어지러웠던 시대였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파워 게임에 희생물이 되어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정부 안에 수구세력과 개혁파의 칼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때입니다. 조선의 500년 역사가 끝나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고 일본과의 합병이 이루어져 나라가 없어지고 하던 그런 때입니다. 그리고 36년의 식민지 역사, 그리고 광복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로 건국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민족 혼란기 역사 속에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나라는 기독교 복음과 함께 국가 번영의 역사가 새롭게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 우리나라에 공헌한 내용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애국 운동의 공헌! 독립운동인 33명 대표 중에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다는 그것만 해도 교회가 얼마나 애국 운동에 공헌했는가를 반영해 줍니다. 교회는 그때 무엇을 했느냐? 여전도회가 애국부인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모든 협조를 했고 상해임시정부와 투옥된 독립투사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교회의 애국부인회가 다 맡아서 했습니다. 그리고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자들이 교회에서 배출되어서 애국 운동에 공헌했습니다. 우리 귀에 익은 이름인 안창호,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애국지사들인데 모두가 훌륭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문화적으로 공헌했습니다. 기독교가 청년문화와 여성운동의 절대적 공헌을 했습니다. 청년 문화가 없었던 시대에 YMCA를 만들어서 청년들의 힘을 우리나라 발전에 투신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것이 기독교입니다. 또, YWCA를 만들어서 여자들을 이 사회로 이끌어낸 것이 기독교 아닙니까? 그래서 수없이 많은 여성지도자들이 기독교 안에서 배출되기 시작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은 미신의 나라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미신 타파에 최대 공헌을 했습니다. 머리를 간편하게 자르고 옷은 활동복으로 갈아입혀서 생활문화를 개혁했습니다. 그 다음에 경제적 공헌에 있어서는 미국을 연결한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해외로 입양시킨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 어린이들을 모든 기독교 기관들이 수고해서 훌륭하게 길러주어서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기관에서 수없이 많은 고아원을 만들어서 어린 생명을 양육했고 구호물자를 들여와서 전쟁의 굶주림을 메워주는데 공헌했습니다. 교육계열에도 얼마나 공헌했습니까? 한문을 배우는 서당 교육에서 탈피하여 서구사회의 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교육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배재학당을 필두로 우리나라에 기독교 학교가 생겨서 오늘과 같은 교육의 나라로 발전한 것이 기독교의 공헌입니다. 그 다음으로 의학계에 공헌했습니다. 알렌 선교사가 고종 황제 때 최초로 광혜원이라고 하는 병원을 세워서 오늘날과 같이 우리의 건강을 돌보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공헌이 있다면 교회를 많이 세워 영혼 구원의 사역을 열심히 하여 지금은 인구 비례로 교회 출석률 세계1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자유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출애굽기를 애굽 사람들이 읽었으면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닌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출애굽기 성경에서 보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애굽 사람들은 모두 마귀의 자녀와 같은 취급을 하시는 것인가? 그 문제는 애굽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들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 애굽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을 노예화하고 있는 애굽의 죄를 미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서 노예화된 하나님 백성의 자유화를 위해서 그토록 세밀한 관심을 보여준 기록이 출애굽기입니다. 만약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들을 노예화했다면 하나님은 애굽 편에서 싸우셨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일본을 점령해서 일본인들을 식민지화했다면 하나님은 세계를 동원해서 대한민국으로부터 일본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역사 안에서 독일과 일본이 세계 평화에 얼마나 해를 끼쳤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유럽은 독일이 피로 물들게 했고 아시아는 일본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일본의 기독교와 독일의 기독교는 그때 어떠한 일을 하고 있었는가? 그때 뜻있는 일본 기독교인들은 비밀 장소에 모여서 가장 열심히 기도한 것이 일본 망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조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국민은 세계에서 제일 예의바르고 평화를 사랑하는데 그러한 일본이 무엇 때문에 아시아를 짓밟고 돌아다니느냐? 그 기도에 참석했던 조선 사람들의 간증으로 이것들이 많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고백교회는 히틀러 정권 망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교회의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후인 1933년 2월 1일 이에 반대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가 그 방송은 중간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인이면서 독일 망하기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여기서는 히틀러 정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성직자의 모습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목사였지만 히틀러 암살단을 조직해서 활동했습니다. 아마 그가 며칠만 더 살았더라면 그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텐데 1945년 4월 9일에 체포되어서 사형되었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죽었으나 그의 신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함의 은혜를 온 세상에 선포한 행동하는 신학자로서 영원히 잊지 못할 젊은이들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장엽 씨가 쓴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을 보니까 “내가 이렇게 행동한 것이 내 개인 인생을 생각함이 아니요 민족의 장래 때문”이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 그렇게 많은 나라 가운데 우리와 같이 분단된 민족은 우리 밖에 없다는 괴로움이 민족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데, 지금 세계의 관심은 “북한의 핵 문제가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이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모두 다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기는 과거 일본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으니까 앞으로 세계 선교를 책임질 21세기 택함의 나라와 민족이 우리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확실합니다. 저는 이번 아프리카 선교에서 그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에서 서구의 모든 선교사들이 거의 다 떠났습니다. 이제는 그 빈자리를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메워 나가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를 한국에 맡기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왔습니다. 주님의 특별관심이 우리 한반도에 임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과거 어두운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을 사랑하여 해방을 주시고 마침내 세계 선교에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민족 국가로 발전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의 자유 대한을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세계 선교라는 것을 잊지 않고 가장 열심히 훌륭하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성취해 나가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