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군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유래
군기강이 해이해지고 우리 군의 내부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나오는 말이 있다.
'당나라 군대'
당나라
요즘 우리 군의 기강이 많이들 해이해졌다고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군기강 문제가 터질 때마다 '당나라 군대'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언제부터 쓰인 것일까?
<첫 번째 유래>
초기 당나라는 동아시아 내에서는 오늘날의 미국같은 당대 최강국으로, 당시 당나라 군대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대 최강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강군이었다.
대 기병 전술의 발전으로 소수의 보병으로 다수의 기병을 제압하는가 하면, 북방 유목민들의
장점을 받아들여 기동력을 살린 경기병대를 출현시키고, 나아가 아예 사방에서 데려온
이민족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동양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병종의 장점을 모았다.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었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에 패퇴할 당시만 해도
당나라 군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의 귀족들이 과거를 통해 출세하려고 하면서 변방으로의 군역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면서 변방을 지키는 절도사는 대부분 이민족의 차지가 되었다.
희대의 간신 중 한 명인 이임보로 인해 국력은 더욱더 약화되었고 이민족 출신인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암투와 반란 등으로 강력했던 당나라 군대는 오합지졸의 대명사인
'당나라 군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서기 751년 이슬람과 충돌한 탈라스 전투 이후 당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그리고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균형을 맞추어왔던
희대의 간신 이임보가 사망하게 된다.(752년) 그러자 절도사끼리의 암투로 당나라는 끝없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안록산
결정타가 된 것은 '안록산의 난'이다.
755년 수십만을 이끌던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게 된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 함락되고, 당 현종은 쓰촨 성까지 피난을 가게 된다. 이때부터
당나라 군대를 오합지졸의 대명사인 '당나라 군대'로 칭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중국 4대 미녀 중 하나인 양귀비도 이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 4대 미녀 : 침어(서시),낙안(왕소군),폐월(초선),수화(양귀비)
'당나라 군대'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쓰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번째 유래를 살펴보자.이 이야기는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유머도 있고 그럴싸한 이야기다.
<두 번째 유래>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했다.645년 무렵이다. 수십만의 병력으로 노도와 같이 안시성을
공략했으나 양만춘 장군을 비롯한 성안의 5,000 백성들이 똘똘 뭉쳐 잘 막아냈다.
양만춘 장군으로 열연한 임동진
한편, 수십만의 당나라 병사들은 배설물을 처리에 고민이 많았다.구덩이를 파고 배설물을
처리하였는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구덩이 수효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비가 내린 어느 날, 또다시 당나라와 안시성의 전투가 벌어졌다.비로 인해 온 사방이 똥구덩이로
바뀌었고, 당나라 병사들은 이 똥구덩이에 빠질까 봐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이틈을 노려 고구려의 반격에 당나라 군대는 한순간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나라 군대'를 오합지졸의 대명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