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얼마전 재일한국계 교토국제 고의 고교야구대회인 고시엔 우승 소식은 짜증스러운 무더위를 단숨에 던져버릴수 있는 쾌거였다.
그와같은 저력과 강한 투혼이
있을것이다.
일본에서 무시받으며 임대 전전하던 '최빈국' 대사관의
'한' 을 푼 동포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거두고 있는것이다.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
6·25전쟁중인 1952년 5월의 일본 도쿄, 대한민국 공사가 오사카의 한 기업인을 찾아와 읍소한다.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쫓겨나게 생겼다는 거다. 임차료를 못 내 건물주가 나가라고 독촉하지만 갈 곳이 없어 버텼는데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한 국가의 외교부 대표로 참담한 노릇이다.
며칠 후 그 기업인은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 한다. 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인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지금 대한민국의 일본대사관이다.
서갑호, 먹고 살기가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을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나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부동산 가격 폭등 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는데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해 마련하여 7년 뒤에는 땅을 사 건물을 지어 공사관 이전을 결의한다. 한국의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사양했으나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 안된다고 도심 한복판 신사이바시 땅을 매입한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하여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한후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
지금 일본의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의 현재 가치는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러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단말인가...
88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 기증한다.
당시 서울의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이었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사는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다.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 했고,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