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보다 쎈(?) 평직원
- 글로리아 최 (Gloria Choi). 대한항공 홍콩지점 및 동남아 지역본부 본부장 비서인 평직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그런 보통직원이 아니다. 본사에서 홍콩지점으로 발령 받아 근무하게된 거의 모든 직원들은 이 글로리아의 신세를 지게 된다. 우선 살 집을 구하는 문제, 비자, 장기체류허가 하다 못해 가구, 냉장고를 사는 문제에서까지 그의 도움이 필요 했다.
- 그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스스로 남을 도와주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직원이어서 직책은 본부장 비서였으나 어느 직원이던지 그에게 도움만 청하면 기꺼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그들을 돕곤 했다. 어떤 때는 본부장이 급하게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어느직원의 비자문제로 이민국에 간게 밝혀져 본부장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 그는 입사때부터 그룹회장님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어느날 대한항공 홍콩지점은 홍콩주재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한가지 요청을 받게된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 여학생을 KAL 홍콩지점에서 무조건 채용해 주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총영사관 (정부) 의 파워는 막강 했기에 이 요청을 받은 인사담당은 고심을 하게된다. 딱히 충원이 필요한 시점도 아니었고 그리고 특채는 본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안 이었기 때문이었다.
- 더구나 이 여학생의 부친은 상해 임정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독립투사들과 함께 일제에 항쟁 하였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 상해에서 살다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이 장개석 정권을 몰아내고 마침내중국 전역을 통치하게되자 이를 피해 홍콩으로 이주 했다고 했다.
- 그 때 마침 회장님께서 홍콩에 체류중 이어서 이문제를 회장님께 보고 드린바, 회장님께서는 흔쾌히 독립투사의 딸이라면 우리가 채용 해야지 하셨단다. 이 때를 놓지지 않고 바로 이 여학생을 회사로 불러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물론 이 여학생은 우리 말을 한마디도 못 했지만 흡족하신 회장님은 여기가 한국회사인 만큼 한국말을 빨리 배우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채용된 글로리아가 본부장을 기절시킬 정도의 사고를 몇번 치게된다.
- 홍콩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회장님께서 3개월에 한번은 홍콩을 찾아 이곳에서 앞으로의 사업구상을 하시곤 했는데 한번은 회장님이 점심시간 즈음해서 본사 중역 두분과 본부장을 대동하고 사무실에 들렀는데 회장님을 다시만난 기쁨에 글로리아는 “ 미스터 조!, 밥 먹었어 ? “ 라고 소리친다. 사색이 된 본부장과 본사 중역들 ( 특히 본부장 ) 은 얼어서 아무소리도 못하고 회장님 얼굴만 바라보는데 노회한 회장님께서는 단숨에 사태를 파악 하시고 웃으시며 “ 글로리아!, 밥 먹었어? 가 아니고 식사 하셨습니까? 해야지. 다시 해봐. “
- 이렇게해서 그 순간은 지나갔지만 회장님께서 가시고 난 후 글로리아는 본부장실에 불려가 크게 혼이난다. 그런데 본부장으로부터는
“밥먹었어?“ 보다 “미스터조“ 에 더 큰 질책이 가해졌다. 바로 이 점이 글로리아가 이해 못 할 점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미스터는 최고의 존칭으로 미국 대통령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하는데 “미스터 조” 가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이었다.
- 하여튼 이 사고(?)를 계기로 지점내에 글로리아 전담 국어교사가 임명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필자가 홍콩에 부임했을 때는 이 글로리아가입사 1년차였는데 겨우 우리말로 쉬운 문장을 써서 대화할 정도였다. 예를들면 어항의 물을 갈아준다는 표현을 “ 물고기 목욕시킨다“ 는 식이었다. 그의 아이디어가 너무 신선해 그런 머리라면 곧 한국어에 능통 해 질것이라고 칭찬 해주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 되었다.
- 그 후 2년 정도 지나고는 회장님이 오셔서 홍콩인 사업가를 만나게 되면 모국어와 다름없는 광동어로, 영국, 미국의 은행가를 만날때는 유창한 영어로 회장님께 통역을 해 드리곤 했다. 비록 우리 말은 여전히 서툴고 반말투 였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회장님은 잘 알아 들으셨다. 언젠가는 필자도 회장님 일행을 따라 사무실 근처에 있는 발리 라는 유명 스위스 구두점에 들렀다. 평소 이태리 구두를 애용하시는 회장님께서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어 발리 구두를 사시겠다고 해서 본부장이 글로리아 를 부르고 어찌해서 필자도 끼게 되었다.
- 구두를 여러 켤레 신어보신 후 마음에 드는 것을 정했는데 가격이 회장님의 예상보다 비쌌다. 회장님께서 너무 비싸니 좀 깍자고 하시고 주인은 정찰제 만을 고집했다. 예나 지금이나 명품은 할인을 안 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글로리아가 나섰다. “ 미스터 조, 여기서는 깍는거 아니야 ! “ “그래? 할 수 없지.” 다 아시는 회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회장님을 호텔로 모셔드린후 사무실로 돌아와 글로리아는 본부장으로부터 또 욕을 먹었다. “ 글로리아!, 거 미스터 조, 미스터 조 하지말고 회장님, 회장님 그래라. “
의기소침해진 글로리아에게 필자가 한마디했다.
“ 글로리아!“
“ 네? “
“ 본부장님 말씀에 신경쓰지 않아도 돼 ”
“ 왜요? “
“ 글로리아가 본부장님 보다 더 높잖아 ?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이 맘에 안드는 얘기하면 무시해도 돼.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몰라서 그래? ”
“ 몰라요! “
“ 나는 네가 대한항공은 물론 우리 한진그룹 전체에서 회장님 다음으로 높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우리 그룹내에서 회장님께 반말하는 사람이글로리아 너밖에 더 있니?
- 필자가 3년여의 홍콩 근무를 끝내고 본사에서 근무하던 어느날 갑자기 글로리아가 찾아왔다.“ 어, 글로리아! 웬일이지? “ “ 응,캐나다 가는길에 서울에서 하룻밤 래이오버(묵어가기) 하기로 했어. 쇼핑도 할 겸. “
- 그날 저녁 당시 홍콩 주재원 동기생들이 모두 모여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졌다. 필자의 예언대로 글로리아의 우리말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회장님 처럼 예의 그 반말만 받아 줄 수 있다면.
추신
- 그런 글로리아가 정년을 한참 앞둔 50대 중반에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고생하다 마침내 회사에 사표를 낸다. 여동생이 살고있는 캐나다의 토론토로 가서 요양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아신 회장님께서 사표를 반려하고 글로리아를 정년퇴직시까지 회사에 적을 두게하고 계속 급여를 지불 할 것을 지시하여 글로리아를 감격케 한다.
- 필자의 생각으로는 회장님께서 평소 글로리아의 반말투 우리말이 그렇게 싫지는 않으신듯 했다. 아마 외국에서 낳고 자란 손녀 딸이 할아버지에게 열심히 한국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로 보시지 않았을까?
- 손녀 딸 이야기가 나온김에 한마디 보태자면, 그 회장님의 진짜 손녀 딸이 바로 " 땅콩 회항 "으로 유명한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 (당시) 이다.
- 맨손으로 근검절약하며 대 그룹을 일으킨 할아버지와 금수저를 물고나온 천방지축의 손녀를 보며 한국재벌의 어거지 대물림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된다.
첫댓글 존대말이라는 자체에 함몰되어 사람을 잘못 보는 한국사람들이 눈에 선하군요.
그런면에서 역시 대기업 총수의 인식은 다르군요.
그 자식들은 개판이지만.
ㅎㅎ
이 글을 통해서만 추측한다면 글로리아는 머리 좋고 당당한 여성이네요.
독립군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가......
이런 에피소드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 한국에 욕쟁이 할머니식당이 있어 손님들에게 그렇게 재미있게 욕설(?) 을 퍼붓곤 했다는데.
- 글로리아도 누구( 회장님 포함 )에게나 반말하는 것으로 대한항공 홍콩지점의 명물이 되었지요.
- 그런데 그의 반말이 전혀 귀에 거스르지 않았던 것은 평소 그의 성품때문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