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사모곡
최재우
2013년 10월의 어느 일요일이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언젠가 한번쯤은 어머님께 아들이 마라톤 뛰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괴산에서는 해마다 10월에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20km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마라톤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학교 교장실에 가서, 어머니를 돌아가는 의자에 앉혀드리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근 십여 년 수도 없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한 번도 어머니와 동행한 적이 없었다. 꽤 여러 번, 철인삼종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떠나면서도, 어머님께는 출장 다녀오겠다고 둘러댔다. 어머님이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실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산 좋고, 물 맑은 괴산의 냇가와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오는 산악마라톤 대회가 이제 막 시작될 즈음이다. 종합운동장을 꽉 채운 칠백여 명의 건각(健脚)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로 올려다보니, 메인스타디움 근처 스탠드에서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고 계신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왔다갔다 서성이는 모습이 역력하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1950년대 말엽의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 때였다. 1학년이었던 나는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상품으로 공책을 탔던 모양이다.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머니는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씀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어리석다고, 코만 줄줄 흘리는 코부자라고 놀림 받던 아들이 1등을 한 것이다. 1등으로 치고 나가는 아들을 보고 감격이 되어 얼마나 신이 나는지, 손뼉을 치며 좋아하셨단다. 남들이 볼세라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서 혼났다고도 종종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서른한 살 새댁이었고, 나는 갓 일곱 살의 까무잡잡한 소년이었을 게다.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어머니는 이제 여든여덟을 바라보는 미수(米壽)의 할머니가 되어 있고, 그때의 코흘리개 소년은 환갑을 넘긴 60대 초반의 노년이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본래 인간(人間)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 아니던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부터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처음으로 관계(關係)를 맺은 사람이고, 지금까지 가장 오래도록 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예순두 해 동안, 어머니와 나는 천륜(天倫)의 모자관계(母子關係)로 지금껏 같은 하늘 아래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탕 타당 !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나는 경기장 동문을 빠져나가면서 슬쩍 어머니가 계신 쪽을 쳐다보았다.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계시던 어머님이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고 계셨다. 잘 뛰고 오라는 손짓인지, 아니면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외치며 기도하시는 건지..... 마라톤 대열에 휩싸여 뛰어 나가는 나는, 더 이상 어머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내와 어머님을 종합운동장 스타디움에 남겨놓은 채 나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머님께 걱정 끼쳐드려선 안 된다.당당히 완주하여 어머님을 뵈올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거의 두어 시간을 달려야 한다. 아내와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산길을, 들길을 달려야 한다. 긴 레이스를 뛰는 동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눌 것이며, 숨가쁨과 갈증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지만, 그러나 그 싸움 끝에는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님이 계실 것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 공부는 션찮았어도, 개근상은 꼭 탔다. 어찌보면, 국민학교 시절부터 나는 달리기에 익숙한 소년이었던 게다. 아버지가 장에서 사온 돼지 새끼를 놓쳐 뒷동산으로 도망쳤을 때, 그 돼지 새끼를 잡으러 뒷동산을 뛰어다녔다. 코뚜레를 뚫지 않은 소가 고삐를 풀고 도망칠 때, 그 소를 붙들러 이리저리 행길을 뛰어다녔다. 당장 모내기는 해야 하는데, 동네에는 일꾼이 없다. 아버지의 명(命)으로, 시오리가 넘는 큰집 동네에 가서 작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말씀을 전해야 한다. 환할 때, 애장이 있는 성황당 고개를 넘어야 한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질수록 내 뜀박질은 더 빨라졌다. 큰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으며 ‘이눔아 왜 이리 땀범벅이냐’ 며 안타까워하셨다.
거의 두어 시간 동안의 마라톤 레이스를 마치고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어머님이 앉으셨던 그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내와 어머님이 계셨다. 아내는 스탠드 의자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데, 어머님은 일어서서 왔다갔다 하시며 두리번 거리고 계셨다. 아내는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금새 알아본 듯한데, 어머니는 엉뚱한 데를 쳐다보고 계셨다. 조금 있다가 나를 알아보시고는, 막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어머니 이제 걱정 마셔. 아들 들어왔어. 거기 며느리 옆에 가만히 앉아 계셔’ 소리 없는 독백을 하면서 마지막 개선문을 향하여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뛰어 들어갔다.
어머님과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마라톤 대회가 끝났다. 나는 당당히 완주하였다. 나의 어머님이 응원하고, 기도한 마라톤이지 않은가! 완주 기념 메달을 어머니에게 걸어드렸다. 환히 웃으시며 손으로 만지작 거리셨다. 인근에 있는 중학교 교장실에도 들러 쇼파에 앉혀드리고 사진을 찍어드렸다. 평소에도 잘 웃으시는 분인데, 이날만은 웃음이 더 환하고 크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신다.
어머니와 아들은 하늘이 정한 불가역(不可逆)의 이치요 도리다. 한없이, 끝도 없이 아들에게 부어주시는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는 한편의 대하소설이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논픽션 드라마일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얼마쯤 후에는,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 곧 올텐데...
옛날 중국에 노래자(老萊子)라는 효자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해 구십 세가 넘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칠십 세가 넘어서도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을 부려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노래반의(老萊斑衣)’라고 일컬으며 효도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불효자였던 내가 오늘 하루 마라톤으로 옛 노래자 흉내를 한번 내본 셈인가? 하는 생각이 언듯 들었다.
어머님을 옆자리에 모시고 청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귓속에 딱지가 붙었을 그 말을 또 하신다. "애비야. 인저는 뛰는 거 그만 햐. 살 빠져 나가. 힘든 거 왜 자꾸햐? 힘 자꾸 빼지 말어." 뒷좌석에 있는 아내를 향해서도 말씀하신다.“ 에미야 오늘 저녁에는 대지고기 사다가 애비 끓여줘” “예 어머님 ”
고려시대 가요에 사모곡(思母曲)이란 노래가 있다. 그 노래 가사가 불현 듯 다가와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아소 님하 !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업세라.
(아 임이시여 ! 어머님같이 나를 사랑하실 이는, 이 세상에 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