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반달 이야기
임봉금
자정이 넘어 울기 시작하는 닭소리의 여운으로
동그라미를 지우기 시작했어요
그것의 형체가 동그라미였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한 번도 모서리를 본 적 없기에
그냥 둥글었다고 믿기로 해요
사물의 여운엔 묘한 울림이 있어요
울림의 끝엔 늘 고독이 있더라구요
메아리가 되어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라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하네요
생각이 많아 손톱이 빨리 자라요
생각이 확장되면 호흡이 깊어져서
별의 기운마저 앗아가 버리니
손톱은 잘라 주어야 해요
별은 별대로 빛이 있는데
내 깊은 호흡이 마음대로 별을 넘나들어
별의 형체를 망가뜨려요
쭈그리고 앉아 손톱을 자르고 닭소리로 여운을 만들어
동그라미를 자꾸 지워버려요
채워지기를 거부하는 반달이란
사연이 너무 많아 더럭 겁이 났어요
이젠 지우고 지울 일만 남아
별들을 방해하지 않기로 해요
동그라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파도에게 묻고 싶은 말
종교가 없어 내 편이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 부처님 백그라운드 삼아
거칠 것 없이 돈을 벌고 사랑을 사고
조직적 연대감도 뛰어나
타인은 안중에도 없더군요
위로가 필요하지만 언어는 피곤합니다
과묵하고 편안한 품이 그리워
도시를 탈출합니다
이상하게 바다는 편안합니다
나만의 종교 나만의 어머니
강요하지 않고 꾸짖지 않아 좋습니다
한 가지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합니다
바다는 파도가 언어입니다
내가 묻습니다
나는 나쁜 짓도 나쁜 마음도 없는데
왜 가난할까요
먹고 사는 게 힘들어 죽겠어요
파도가 자잘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너 번 왔다 갑니다
너무 조용하여 못 알아 듣습니다
혼자서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어떤 남자 이야기를 묻습니다
나를 헷갈리게 하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서
깊은 여운을 끌고 오는 파도가 보이더니
순간 짧고 단호하게 부서집니다
무슨 말인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몰려오는 파도와 씨름을 하다 보니
허기가 집니다
영혼의 고갈로 황폐해져 찾아 온 바다
폭발적 식욕이 부끄러워 집니다
무슨 말인 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지만
어쩐 지 다 알아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허기가 생기니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 치매 환자 실종 예방을 위한 휴대용 GPS.
삭제되지 않은 벗
가끔 네가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
제법 깊숙한 발자국을 낼 만큼의 눈이 내린 후 다음 날 기온이 올라 스멀스멀 눈의 뭉침이 뭉개어지면 발자국만큼의 진흙과 축축이 젖은 낙엽의 잔해를 밟는 서글픔, 그 촉감 너머에 짧은 한숨 같던 단아한 그대.
삼십 년도 더 지난날의 인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인연이었는지도 몰라
탄생을 알리는 첫울음 속에 사실은 너도 있었거든
이미 나와 함께 하기로 점지돼 있었던 내 한숨의 한 가닥이었는지도 모르지
우리 참 오래도 살아 있구나
안부를 모르는 벗, 전화번호 목록에 저장은 되어 있어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삭제되지 않았던 무심한 벗
그리움을 들키기 싫어 늘무심한 척했어
난 항상 네가 궁금하지만 애써 찾고 싶지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어
어쩌면 나는 비겁하게 한발 물러서 멀찍이 너를 훔쳐 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단골 약국의 젊은 약사가 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귀가 어둡고 행동이 느린 노인분들을 위해 한결같이 사용 설명을 해주는 지치지 않는 공손함이 내게는 웅장한 감동이 되었으므로 나는 그를 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어쩌면 너는 주인은 있지만 목줄이 풀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시골 마을의 백구라 불리는 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덩치는 크지만, 짖는 법을 모르고 사람에게 곁을 내어 주지 않는 겁 많고 순한 동물. 손을 내밀면 손끝에 살짝 코를 대는 시늉만 하고 달아나 버리는 통에 나는 너의 촉감을 모르지만 어쩐지 알 것도 않은 냉정한 친근감
우리 집엔 새것이 없다. 가위 이야기를 해볼까
가위의 나이는 가늠 못 할 정도의 세월을 함께했지
낡고 무디어져서 제구실을 똑 부러지게 못 할 때도 있지만 주방 한 켠에서 늘 애잔함을 자아내고 있더라구. 새 가위를 여벌로 사 놓고도 항상 오래된 가위를 고집하는 건 젊은 날 예리한 영감으로 나를 일깨워 주던 너의 존재에 대한 미천한 의리라고나 할까
넌 그런 벗이자 연인으로 내게 존재하고 있었나봐
도대체 언제까지 나와 함께할 참인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벗
하얀 눈 위의 발자국처럼 조심히 너의 뒤를 따르고 싶다
네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지만 나는 곧 들킬 것임을 안다
그땐 서로 머쓱하게 씩 웃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가던 길 계속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