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화백 3대
사무실 구석에 파스텔 톤의 그림 한 장이 붙어있다. 머그잔을 든 남자가 우수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박성남 화백의 그림이다. 그는 한국미술계의 거장 박수근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에게 거장인 아버지 박수근 화백의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 박수근은 열두 살 때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한국의 밀레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나무 가지가 타고 남아 변한 숯으로 산과 들을 그리면서 혼자 그림을 익혀나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6.25전쟁시절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렸다고 했다. 그 시절의 모습은 역시 미군부대에서 잠시 일 한 듯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느 날 박수근은 막사건물 유리창 너머 한잎 두일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회한의 늪에 빠진다.
‘난 오랫동안 그림을 못그렸어. 너무 오랫동안, 아직도 내가 화가인지 궁금할 만큼 오래.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워. 화가가 아닌 난 무엇일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 며칠 동안만 내가 화가일 수 있게 해 줘.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치도록.’
그러나 다시 그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화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다섯 아이들을 굶겨도 좋단 말인가? 설에 떡국을 못 끓여줘도, 그리고 아내가 제대로 된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궁상스러운 군복을 입고 있어도 그렇게 절실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일까’
소설속의 박수근은 아직도 죽지 않고 예술적 갈망과 현실생활 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의 바다 속에서 늙지 않고 영원히 떠다니고 있었다. 아들인 박 화백의 얘기를 들으면 박수근 화백은 초상화를 그려 번 삼십오만환으로 창신동 산동네에 판자 집을 한 채 샀다고 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빨아놓은 아이들의 옷들을 빨래줄에 널어줄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점심 무렵이 되면 스케치북을 들고 출근하듯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날, 나는 호암갤러리에서 박수근화백의 그림들을 구경하러 갔었다. 마침 박수근 화백의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딱딱이 치는 야경꾼, 철컥대는 가위소리가 흘러나오는 엿장사, 꽹가리 소리가 요란한 것 같은 농악대, 빈 함지박을 든 여인이 있었다. 매일 스케치 북을 가지고 출근하듯 나가서 그려 온 것들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에는 도마 위에 감자가 여러 개 놓여있는 단순한 그림이었다. 아들이 반가운 듯 그걸 보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창신동 판자 집 살 때 아버지가 그린 거예요. 마루에서 아버지가 그리는 걸 봤었죠. 네모난 구도가 쉽지 않은데도 아버지는 소화해 내셨어요. 배고픈 시절이라 그런지 도마위에 감자를 많이도 올려놓으셨어요. 그림들을 보면 하나하나 어릴 적 사연이 떠올라요. 저기 저 그림은 교회장로님이 쌀 반말 값에 사주셔서 우리가족 모두 고맙다고 인사를 한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십 억원이 넘으니까 하나님이 그 장로님한테 충분히 보상을 해 주신 거죠”
박수근 화백은 나중에 한쪽 눈이 실명된 상태에서도 간경화증으로 죽기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아들 박성남 화백역시 스무살에 국전에 입선했다. 그러나 거목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는 어느 날 훌쩍 호주로 떠났다. 막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가뭄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아들 박성남 화백은 일탈된 모습의 화가들을 싫어했다. 그게 자유로움이라고 착각들을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진하는 생활 속에서 좋은 그림은 나온다는 게 아버지 박수근 화백의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들 역시 시드니의 미술대학에 보냈다. 박수근 손자의 개인전이 시드니에서 개최됐다. 많은 외국인들이 격찬했다. 손자는 환호하는 호주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설명했다.
“이 그림들은 제가 그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이루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예술가 삼대였다.
[출처] 박수근 화백 삼대|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