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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절대 빈곤’은 기아, 영양부족, 문맹, 질병, 높은 영아 사망률, 짧은 수명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비참한 삶의 상태이다. 현재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제3세계에 살고 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유지할 수 없는 절대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반면 현재 OECD 국가의 많은 국민들은 의식주, 교육, 의료서비스 등과 같이 삶에 필수적인 것 이상의 소비를 할 여력이 있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 상태에서 죽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사치와 풍요를 누리려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이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것과 이들을 살해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약속 장소에 가던 중 어린 아이가 연못에 빠져 익사할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면 옷이 젖고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약속 시간에도 늦게 된다. 이 경우에 개인적 손해와 불편함을 겪게 되겠지만, 아이가 빠져죽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그 아이를 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치나 쾌락을 위해 절대 빈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출처 :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
[나] 세계의 빈곤 문제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자원과 인구과잉에서 기인한다. 최근 이에 대한 해결방안은 돈이나 식량 지원에서 기술원조나 기술이전 쪽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원조 대상국이 근본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려면, 단기적이고 단편적으로 지원하는 것보다는 자립의 기반을 구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중국 속담에 “사람에게 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먹을 것이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먹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록펠러재단은 가난한 나라들의 농업을 개량하는 사업을 지원해 왔다. 이른바 ‘녹색혁명’이라 알려진 것이 그것이다. 이 사업으로 ‘기적의 쌀’, ‘기적의 밀’의 개발에 성공하였고, 품종 개량을 통해 수확 증대를 촉진시키고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을 개발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업을 통해서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이다. 이 사업이 과연 그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만큼 식량 생산의 증가를 가져왔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은 듯하다. 선의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유사 사업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먼저 인간 생태학(human ecology)의 근본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록펠러재단의 부회장이었던 앨런 그렉(Alan Gregg) 씨는 식량 증산이나 농업기술 개발을 통해 식량문제의 해결을 꿈꿨던 인류의 지혜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표명했다. 단기적 안목에서 이른바 ‘녹색혁명’을 통해 증산된 여유분의 식량을 원조 대상국에 제공하거나 농업기술을 이전해 줘서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싶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즉 흉작이나 기근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되어 오던 인구가 더 이상 제어되지 못함으로써 기아 사망자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고, 생태계 파괴가 심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인간애(人間愛)가 확산되는 것을 인간의 몸에 암세포가 번져나가는 것에 비유함으로써, 이른바 ‘녹색혁명’의 의도가 지닌 한계를 꼬집었다.
[다] 사람은 모두가 인(仁)을 가지고 있다. 불씨(佛氏)는 비록 오랑캐이지만 그 또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니, 어찌 홀로 인(仁)의 마음이 없겠는가? 우리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측은(惻隱)은 불씨(佛氏)가 말하는 자비(慈悲)이다. 그런데 유가(儒家)의 측은(惻隱)과 불씨(佛氏)의 자비(慈悲)는 시행 방식이 서로 다르다. 대저 육친(肉親)은 나와 기(氣)가 같은 존재이고, 사람은 나와 유(類)가 같은 존재이며, 만물(萬物)은 나와 생(生)이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진 마음을 베푸는 순서는 육친(肉親)에서 사람으로, 또 사람에서 사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물이 첫째 웅덩이에 가득 찬 후에 둘째 웅덩이를 거쳐 셋째 웅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씨(佛氏)가 주장하는 자비설(慈悲說)은 그렇지 않다. 불씨(佛氏)는 만물(萬物) 가운데 호랑이 같은 맹수나 모기 같은 미물이 자기 몸을 물어뜯어도 전혀 아깝게 여기려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입히려 든다. 그것이 이른바 보시(布施)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父子)와 같은 지친(至親)이나 군신(君臣)과 같은 공경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관계를 끊어버리려 하니, 이 무슨 어이없는 일인가! 불씨가 인륜(人倫)을 하찮게 여기니, 자식은 애비를 애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 결국 불씨는 지친(至親) 보기를 길 가는 사람 보듯 하고, 공경해야 할 어른을 아이 대하듯 하여, 근본을 잃어버렸다. 끝내 사람을 유익하게 하거나 만물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출처 : 정도전의 “불씨잡변”>
[라] 유엔이 최근 발표한 『밀레니엄발전목표(MDG) 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10억 명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절대 빈곤은 분쟁과 인권 침해, 테러를 양산하는 온상이다. 현재 ‘빈곤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선진국들의 인색한 지원과 원조이다. 2000년 뉴욕에서 열린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전 세계 지도자들은 ‘빈곤과의 전쟁’을 위해 저개발국가에 제공하는 공적개발원조(ODA)를 국민총소득(GNI)의 0.7%로 늘리기로 합의하였다. 지난해의 평균 지원액은 0.33%였다. 이는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증가한 것이지만, 여전히 목표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비율이다. 특히 최강대국 미국의 공적개발원조는 0.15%, 경제 규모 11위인 한국은 0.096%에 그쳤다. 또한 밀레니엄발전목표의 산파 구실을 한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에 의하면 미국은 50억 달러를 매달 이라크 전비에 쏟아 붓고 있는데, 이는 10억 명의 극빈층이 5일간 먹을 수 있는 액수이다. 과연 세상의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정의란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정의는 전체 다수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다. 한 사람이 좋은 차를 타는 즐거움을 포기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서 벗어나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이 정의가 아니면 과연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출처 : UN 밀레니엄 발전목표,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
[마]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 더 나은 삶을 향유하기 위해 노동한다. 사람이 노동을 통해서 생산해 낸 산물은 전적으로 그의 소유이다. 이러한 노동에 의한 소유의 원리를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이 소유한 재산이 정당한 소유의 원리에 따라 취득된 것인 한, 이 재산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만 귀속되며, 다른 어떤 사람도 빼앗을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사유재산이 신성불가침하다는 것은 사유재산을 소유자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자기 뜻에 따라 처분하려는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싼 명품이나 외제차를 구입하는 것을 사치스런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온당치 못한 처사이며, 이를 제지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사람들 사이에 부의 불균등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있고,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보고, 이들을 지원하는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먼저 재분배 정책이 ‘정의(正義)의 원리’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소득의 재분배는 ‘사유재산의 권리’에 위배되지 않을 때만 정의로울 수 있다. 오늘날 일상화된 재분배 정책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결국 그들이 태만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행위는 부자들의 사유재산의 일부를 국가가 강제적으로 탈취해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재분배는 신성불가침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재분배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먹여 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해서 번 사유재산이 부당하게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의무가 아니다. 또한 부자가 자기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행위도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바] 먼 타국의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우선 같은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같은 나라의 사람들보다는 친척이나 가족과 같이 더 가까운 사람을 우선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옆에 있는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방관하기는 어렵지만, 먼 아프리카의 빈곤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취하기는 쉽다. 이런 반응은 아마도 오랜 진화의 산물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통상적 반응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 인간 존엄성을 갖고 있고, 또 그런 존재로 대우 받아야 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윤리적 의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친소관계, 국적, 피부색, 지리적 거리 등과 같은 비본질적 요인에 의해 차별돼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됐다고 생각해 보라. 예컨대, 식당에서 당신이 한참 동안 줄을 선 후 당신의 차례가 왔는데 다른 지방 사람이라거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식사 주문을 거부당했다고 생각해 보라. 또는 식사 배급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순서를 무시하고 당신보다 먼저 밥을 준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당연히 부당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의무나 권리는 친소 관계와 같은 불공평한 요인에 의해 규정돼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런 요인에 의해 침해되어서도 안 된다.
[사]
세계경제는 매년 성장하고, 부자들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빈곤층이 겪는 가난과 굶주림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으며, 빈곤 퇴치 문제는 여전히 지구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사회도 유사한 난제에 봉착해 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문제가 그것이다. 최근 핵 문제로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은 분단 속에서 살아왔지만, 언젠가 통일돼야 할 같은 민족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 중에는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분단 극복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의 빈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군가 “북한은 우리와 한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와 민족의 장래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미래에 내가 누리게 될 풍요로운 삶’이야말로 나의 최대 관심사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도 북한의 경제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 때문은 아니다. 지금 북한의 경제상황을 외면하여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된다면, 우리 사회는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 비용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경우, 내가 꿈꾸는 풍요로운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내가 지금 북한을 돕는다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미래의 통일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지불하는 것은 내가 누리게 될 풍요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나는 지금 대북 경제 원조를 절대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 절대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은 먼 나라 사람일지라도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을 옹호하는 논거들과 반박하는 논거들을 위의 제시문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항 1> 위의 주장을 옹호하는 제시문 세 개를 찾아내고, 그 논지에 부합하는 각각의 논거들을 간단히 설명하시오. (400자 내외, 배점 25점)
<문항 2> 위의 주장을 반박하는 제시문 세 개를 찾아내고, 그 논지에 부합하는 각각의 논거들을 간단히 설명하시오. (400자 내외, 배점 25점)
<문항 3> 위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찬반 입장을 정하고, 반대편에 서 있는 입장의 논거들을 제시문에서 찾아 각각에 대해 왜 적절치 않은지 근거를 들어 비판하시오. (1000자 내외, 배점 50점)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br> 날짜 : 2007년 4월 3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