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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코 6,1-6
순간순간 판단하는 마음과 싸우라!
한 농부가 도끼를 잃었는데 틀림없이 옆집의 젊은이가 훔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집 젊은이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길을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목소리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젊은이가 도끼를 훔쳤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그는 산에 갔다가 전에 잃었던 도끼를 찾아냈습니다.
며칠 전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방심하여 도끼를 그 곳에 두고 왔던 것입니다.
이튿날, 그는 또 옆집의 젊은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모저모 살펴보니, 길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음성이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 안에 판단의 완전한 잣대가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인생의 그 짧은 경험으로 어떻게 사람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판단은 그 사람이 완전하지 않으면 틀릴 확률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그 판단이 틀릴 것 같아서가 아닙니다.
판단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판단할수록 상대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그렇게 판단한 상태에서 상대를 만나면 왠지 이미 껄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 사람은 참 버릇없네!” 라고 판단해 놓고
“그래도 난 널 이해하고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도 요건 좀 바꾸면 좋겠네!” 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바뀌면 더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네가 한 가지만 고치면 구해줄게!”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상대에게서 단점을 많이 찾아낼수록 그만큼 사랑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많은 판단을 내려 상대를 더 잘 안다고 여기게 되는 만큼 관계는 멀어집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 저에게 “난 너 잘 알아!”라고 한 사람과 지금도 관계가 긴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모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좋은데
서로 잘 알게 되면 더 많이 싸우게 되고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더 끈끈해 지기는 하지만 결국 그렇게 오래 사신 분들도 하시는 말은 상대를 바꾸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고향과 친척 집안만큼 그 예언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미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이기에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것 안에서 바라보기에 위선적인 것 같아 보이거나 미쳤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교만이 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예수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에 못마땅해 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만큼 축복을 덜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이 사례가 꼭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변할 수 있고 변합니다.
내가 안다고 믿어버리면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때의 아이를 기억하여 그 모습만 가지고 시집장가 다 간 사람에게 “난 널 알아!”라고 한다면 “난 너와 친구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난 널 잘 알아!”라며 바라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판단을 많이 하면 불안해지고 외톨이가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판단이 저절로 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자신과 싸워야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없듯,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복음: 마르 6,1-6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오늘은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 특히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착한 목자였던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의 축일입니다.
줄여서 돈보스코라고도 부릅니다.
돈보스코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모토요, 그가 생애 내내 일관되게 지니고 살았던 화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 가라!”
그가 살아생전 직접 창립한 세 단체의 명칭을 통해 돈보스코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있습니다.
① 남자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을 위해 창립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그는 여타 수도회와는 달리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에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각별히 존경했을뿐 아니라 청소년 사목자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노력했던 롤모델이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수도회 명으로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교회 안에서 매력 넘치는 성인, 온유와 친절의 대명사로 유명합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교육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물이나 권력, 힘이나 조직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평생토록 강조했습니다.
체벌이나 폭력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내와 사랑, 온유와 친절만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랑의 교육학, 예방 교육을 창시한 것입니다.
②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줄여서 살레시오 수녀회라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함께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살아 생전 자신이 수행하고 이룩한 위대한 교육 사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극찬하고
박수를 보낼 때 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의 인생 여정과 교육 사업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강하면서도 균형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면서 지은
수녀회의 이름입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감사의 기념비라는 뜻으로 수녀회의 이름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회로 지었습니다.
③ 살레시오 협력자회: 돈보스코는 자신이 개척한 선구자적인 교육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 수도자들만으로는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예방 교육이라는 자신의 교육 이념에 뜻을 같이 하는 평신도들과의 협력을 위해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립했습니다.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세상 속의 살레시오 회원들, 수도원 담밖의 살레시안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돈보스코의 정신과 영성, 그의 마음과 그가 지녔던 사랑으로
세상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살레시오 회원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 진출 안 한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지역, 분쟁 지역, 청소년들이 심각한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에서
돈보스코께서 하셨던 바로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확할 것을 많은 데 일꾼이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돈보스코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청소년 구원 사업에 기쁘게 참여할 일꾼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이름으로 창립된 단체들은 32개 단체가 있으며, 회원 숫자는 40만명에 달합니다.
살레시오회 회원만의(사제 및 수사) 현재 숫자는 1만 4천 명가량이니, 돈보스코 영성의 보편성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돈보스코의 이름과 영성으로 한국에서 활동중인 단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시오 회원이 창립한 수녀회입니다.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는 세상 안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하는 단체입니다.
성소 문의
살레시오회: 010-6221-3520,
살레시오 수녀회: 010-2894-8958, http://salesiansisters.or.kr
살레시오 협력자회: 010-9060-4091, https://asscc.kr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 0507-1306-1505, http://isvdb.creatorlink.net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서울 관구: 010-5830-3217,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 010-8566-1865,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원 관구: 010-7273-5983, http://icaritas.or.kr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 31. 수)(마르 6,1-6)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원래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난한 목수 집안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집안이 다윗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다윗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윗 왕실의 후손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옛날의 족보보다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에서 고려 왕실이나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상류층 집안이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
처음부터 무시하고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쉽게 받아들였던 것은 요한이 ‘사제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가난한 목수를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하셨을까? 대사제나 왕족이나 부자를 선택하셨다면, 좀 더 쉽게 복음 선포를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마리아의 노래’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예수님의 다음 기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소외시키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려면,
또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만일에 지금 머물러 있는 곳에 그냥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고, 구원받지도 못하고, ‘그날’이 되면 주님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4-6).”
여기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처음부터 하느님을 믿었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거부하느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존경받으려고 고향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청하지 않으니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주셔도 안 받으니 결과적으로 못 주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놀라셨다.” 라는 말은, “안타까워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