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익 서울 동작경찰서 수사과장 | 37년 전 방황하던 내가 군인으로 입문한 동기는 애국(愛國)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매일 출·퇴근길은 운동 삼아 서대문 형무소 앞길을 걸으며 유관순 누님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이 생겼다.
얼마 전 유관순 누님의 모습을 닮은 수배자를 대하게 됐다. 문득 80년 전 누님이 포승을 찬 채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피의자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바 조사실 밖으로 나왔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열사.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있으면 3년 안에 출소할 수 있었는데, 왜 옥 안에서까지 만세를 불러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짐당하고 발가벗겨진 채 거꾸로 매달려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자처했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저려온다.
열사의 감방은 형무소 출입구에서 왼쪽 편 지하에 일경(日警)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게 별도로 만든 한 평짜리 방이었다. 문이 안 닫혀지면 일경들이 열사의 다리를 끼워 문을 닫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감시했다고 한다.
모진 고문에 열사의 손톱이 모두 빠지고, 인두로 온몸을 지져 소변조차 볼 수 없게 됐다. 그런 고통 중에도 계속 대한독립을 외쳤던 유관순 열사. 나는 한때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을 젊은 여학생의 오기에서 나온 게 아닐까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갔다가 유관순 열사가 감방에 수감돼 있을 때 같은 방에 살인혐의로 수감된 여인의 기록을 보고 열사의 애국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인혐의를 받고 젖먹이 아기와 함께 들어온 여자가 있었는데,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아기의 기저귀를 빨아 자신의 몸에 감아 체온으로 말려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갖고 있던 열사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게 됐다.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바로 ‘사랑’이다. 또 그러한 마음을 가진 이었다면 순간 오기를 부리다 죽을 그런 철부지 여학생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9년 전, 내가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을 데리고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아우내 장터 부근에 있는 묘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이때 학생들에게 유관순 열사가 조국을 위해 가녀린 소녀의 마음과 몸으로 얼마나 강렬하게 살다 갔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지금 세상은 자칭 ‘애국자’란 이름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기에 진정한 애국자가 어떤 생각을 토대로 일해야 하는지 열사의 당시 상고심(上告審) 재판의 공판조서 기록내용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판사 : 피고 유관순은 풀려나면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천왕의 백성이 되겠는가?
유관순 : 착한 백성이 살고 있는 이 땅에 도둑놈들이 들어왔기에 도둑을 쫓아내고자 한 만세운동입니다. 그게 무슨 잘못입니까? 당신들은 내 죄를 물을 수 없는 도적들입니다. 그 도적들에게 내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이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재입감된 열사는 모진 고문으로 인해 실명(失明)되고 혀를 잘리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당하다 순국했다.
<leeandrewy@hanmail.net> |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