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마태오 13,36-43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낳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설하십니다.
밀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뿌린 씨이고 가라지는 사탄이 뿌린 씨입니다.
밀은 하느님 자녀들이며 가라지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모방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하느님을 모방하거나 악마를 모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은 세 부류입니다.
두 부류 중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악마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있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어느 쪽에 속한지는 나 자신만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이들도 다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여겼습니다.
더 쉽게 알아볼 방법은 타인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입니다.
자녀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모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뱀의 자녀가 되고 나서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자기 행동을 아담도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를 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히틀러는 집착하는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했고, 권위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 집 가정부였으나 결국 알로이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됩니다.
아버지는 성적 때문에 허리띠로 히틀러를 때렸고 히틀러는 오기로 그 맞는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억압 때문인지 나중에도 미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엔 독재자가 되어 그림 수집에 몰두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미술품 수집을 위한 특수부대까지 창설하여 가장 먼저 그림을 약탈하였습니다.
유럽 1,000여 곳에서 약탈한 미술품 중 발견된 것만도 500만여 점이 되었고 그것을 본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데도 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아이를 만들고 있는지를 살폈어야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에서 전설이 되어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입니다.
키 193cm, 잘생긴 외모, 투수와 타자에서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정상을 찍고 있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검소하고, 거기다 인성까지 뛰어납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벌써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치켜올리고 있습니다.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만화에서도 저렇게 완벽한 주인공이 있으면
욕을 먹을 정도입니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습니다.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치로처럼 한국을 도발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이니
방심하면 안 되겠다고 상대도 배려할 줄 아는 인성을 지녔습니다.
싸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진 물건을 다 내려놓고 사인을 해주고 경기장에 담배꽁초나 휴지가 있다면 남이 버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다 줍습니다.
심지어 1루로 나가다가 쓰레기가 있자 그것을 주워 자기 주머니에 넣고 출루하기도 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부모가 어떤 인성을 지녔는지 궁금해집니다.
오타니는 현재 일 년에 800억을 번다고 하는데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 원씩 타서 쓰고 그것도 쓰지 않아 매달 저축한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나라 어떤 연예인들의 부모처럼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파트타임 알바를 하고 아버지는 공장 근로자입니다.
오래된 시골집을 고쳐드리거나 새로 지어드린다고 해도 마다하고 부모는 자신들이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자녀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일을 하실 거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너한테 업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도 “아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아들에게 밥 먹여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했습니다.
오타니의 형제들도 오타니의 돈을 전혀 건들지 않고 월세방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벌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일 자체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에게서 야구 자체를 사랑하는 오타니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낳아서 세상에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파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명예와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고 파견하겠고 어떤 사람은 검소함과 겸손과 절제가 행복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입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모범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저도 길에 떨어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행운이라 생각하고 줍는 버릇을 키워보려고 합니다.
성당 안에 떨어진 것들도 줍지 않았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탄생시키는 우리가 됩니다.
내가 어떤지 보면 주관적일 수 있으나 내가 낳는 사람들을 보면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13,36-43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행진 중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참으로 은혜롭고도 흥미롭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절친에게 말씀하시듯 모세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모세 역시 주님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대하며 수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느꼈을 감정이 얼마나 황홀하고 감사했을까요?
두 분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통해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 천대에 이르도록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거듭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충실성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의 호응은 영 시원찮았습니다.
틈만 나면 불평불만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수시로 주님께 반기를 들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배은망덕, 배신과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아무리 주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총애받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런 모습 앞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채찍을 손에 드셨습니다.
쓰라린 당신 가슴을 부여안고 이스라엘을 벌하십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통곡하며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벌하시는 마음을 거두시고, 다시 한번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간택과 총애-배신과 반역-진노와 징벌-용서와 회복의 반복이었으며,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앙인 각자 안에 반복되어온 역사입니다.
지난 제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로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자비의 주님, 분노에 더디시고, 빠른 용서의 전문가이신 주님께서는 결핍 투성이요 고통 덩어리인 가련한 나를 가련히 보시어, 징벌을 내리시다가도, 즉시 마음을 바꾸시어 자비를 베푸십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려주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2023. 8. 1. 화)(마태 13,36-43)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가라지의 비유’는, 밀밭의 가라지처럼 살다가는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하고, ‘좋은 씨’로 살아서 구원을 받으라는 권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심판 때에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면 어떤 결과가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결국 구원과 멸망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씨,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라지, 악한 자의 자녀들’은 41절에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 8,44).”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욕망대로 사는 것은 스스로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떠나서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마태 23,33)”
‘독사의 자식들’은 ‘악마의 자식들’이고, ‘가라지들’입니다.
“어떻게 피하려느냐?”는, “피할 길이 없다.”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위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7-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말을 적용하면,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훈계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구원하시던 분이 완전히 변해서
죄인들을 처벌하신다는 것은 아니고, 구원하는 일을 하실 때의 자비와 사랑은 심판 때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은 처벌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전에 회개와 정화를 위한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고, 그 나라는 마지막 그날에 완성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종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그날이 되면 완성됩니다.
심판도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그날이 되면 최종 선고가 내려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정화를 위한 시간’은 바로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들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말씀들입니다.
정화는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회개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동안 가라지처럼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밀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밀과 같은 사람으로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끝까지 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만일에 자만심에 빠지고 교만해지면, 가라지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에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이고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