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저항한 사람, 김시습
/윤재윤
우리나라 4대 문호(文豪)로 최치원, 이규보, 김시습, 박지원을 꼽는다. 이 중에서 김시습은 가장 독특한 사람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충격을 받아 광인 행세를 하다가 중이 돼 평생을 떠돌아다녔다.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을 가진그는 왜 이렇게 살아야 했을까?
김시습은 가난한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워낙 총명해 두살때 시(詩)를 읽고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소문나자 세종이 그를 불러 시험했고, 즉석에서 멋진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그는 다 섯 살 신동이라는 뜻의 '오세(五歲)'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순탄할 것만 같던 그의 삶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21세 때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에 크게 상심한 것이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어 책을 불사르고 똥통에 빠지는 등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성삼문 등 여섯 명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들켜 사형에 처해졌는데.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자 그가 홀로 수습해 노량진에 묻었다. 웬만한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현재 노량진역 옆에 있는 사육신 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세조가 단종까지 죽이자 견디지 못한 그는 승려 차림으로 전국을 유랑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평양 등 관서 지방을 거쳐 관동, 호남 지방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걸었다. 오랜 방랑 끝에 경주 금오산(현재 남산) 아래 정착했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얼마 후, 이 책은 일본에서도 발간돼 큰 영향을 미쳤다.
47세에 돌연 속세로 돌아온 그는 가정을 꾸렸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조정마저 혼란스러워지자 두 번째 방랑길에 올랐다. 그리고 59세에 부여 무량사에서 삶을 마쳤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농민에 대한 그의 글은 깊고 현실적이다. 그는 어디서나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비록 가진 것 없는 삶이었지만 많은 책을 구했고, 어디를 가더라도 수레에 책을 잔똑 싣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