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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월요일. - 우리 죄 아무리 커도.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2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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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23 05:05
- 우리 죄 아무리 커도
저는 Feminist(여권 신장론자)나 성 평등론자가 아니지만
-여성들 편에 서서 어떤 운동을 하거나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 독서 얘기를 들을 때나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은근히 화가 납니다.
늙은이들이 수산나를 단지 자기들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간음하려고
한 것에 화가 나고 실패하자 죽이려고 한 것에 더 화가 나기도 하지만
독서나 복음에서나 같이 간음하고도 남자는 놔두고 여자만
간음죄로 처벌하는 당시 그런 사회 제도와 모습이 정말 화나게 합니다.
그리고 한쪽으로 기운 것도 화가 나지만
어떻게 여성에게만 그렇게 가혹한지
어떻게 그것으로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지
그것이 화나는 것을 넘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사형에 처할만한 죄를 지었고,
그래서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 되어도 죽여서는 안 되고,
지금 트럼프나 네타냐후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전쟁을 멈추도록 그들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오늘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남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나쁘지만
남의 생명을 죽였다고 그 생명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쁩니다.
사랑은 전혀 없고 미움밖에 없다는 면에서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요즘 와서 천인공노할 죄인들이 많아졌고 그래서
저런 놈은 때려죽여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주장해도
우리 가톨릭이 사형제 폐지를 줄곧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죄가 아무리 커도
죄가 생명보다 크지 않고,
생명의 소중함보다 엄중한 단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무일도 아침 기도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하여도
당신의 자비하심이 더욱 크오니”
그러므로 이 찬미가를 바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죄 곧 너의 죄와 나의 죄가 아무리 커도 주님 자비가 더 크니
너의 죄 아무리 커도 주님의 자비로 너를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의 죄 아무리 커도 주님의 자비를 믿고 회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내일부터 부활 때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순 시기 잘 보내시길 바라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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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유배 중의 백성!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시편은 유배된 하느님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전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유배 중의 백성
2026년 3월 22일 요일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CAC)의 교수진인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성경 이야기에서 결정적 위기로 자리 잡은 바빌론 유배의 간략한 역사를 들려 줍니다:
기원전 약 800년경,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은 이미 수많은 시련을 견뎌 온 상태였습니다. 각 나라 안에서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한 혼란이 가득했을 뿐 아니라, 국경 밖에서도 더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두 작은 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영토 확장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북쪽과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있었고, 그 동쪽에는 바빌론, 또 그 너머에는 페르시아가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가 있었으며, 서쪽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메이카나 카타르, 혹은 코네티컷보다도 작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렇게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무너졌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침략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습니다. 유배된 이들은 세월이 흐르며 다른 민족과 혼인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로 기억됩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곧 정복한 땅에 자신들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켰고, 그들은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혼혈 후손들은 훗날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남쪽 유다의 '순수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오랜 긴장과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한 세기 남짓 더 버티었으나, 그 사이 아시리아의 세력은 약화되고 바빌론의 힘은 점점 커졌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587년경,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정복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나라의 "뛰어난 이들"은 바빌론 수도로 유배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땅에 남아 점령군에게 수확을 '나누어 바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상황은 약 칠십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538년경, 페르시아 제국은 유배된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땅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 고난을 해석해야 했을까요?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실패하시거나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 이들은 마음을 찢는 듯한 시편과 같은 시로 그 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반면, 하느님을 노하게 했다고 생각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고, 책임을 묻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바로 이 유배와 귀환의 혹독한 시기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경'이라 부르는 구전 전승의 많은 부분이 처음으로 기록되거나 다시 편집되고 엮어졌습니다. 그러니 격동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 태어난 성경이 이렇게 살아 있는 역동적 모음집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 42편은 유배의 고통을 드러냅니다:
내 반석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렸네.
"어찌하여 저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걸어야 합니까?
적들이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 온종일 제게 빈정대며
제 뼈들이 으스러지도록 저를 모욕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내 하느님을."
(시편 42,10-12)
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에 큰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먼저 시편을 펼쳐 읽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시편은 없지만, 자주 시편 27편을 찾곤 합니다. 그 후 조용히 앉아 나무로 된 손 미로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하느님께 마음을 모읍니다. 나선형 길을 안쪽으로 따라가며 저는 하느님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묵상합니다. 다시 바깥쪽으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심장을 세상으로 가져가는 사명을 생각합니다.
—Liz H.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56–5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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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의 잔치"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지닌 극적인 힘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끝에 이르러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것처럼,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오직 "misera et misericordia" ― 곧 "불쌍한 여인과 자비"뿐입니다. Misericordia는 '자비'를 뜻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 한가운데 있는 cor라는 단어는 "마음, 심장"을 의미합니다. 고발자들은 이성(논리)에 의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자비를 선택하신다면, 이는 모세 율법(신명기 22장)에 정해진 돌로 치라는 규정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 종교 권위자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반대로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로마 당국에 의해 살인 선동자로 고발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짜인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랑이 어떻게 논리를 넘어서는지를 보여주는 정말로 고전적인 사랑의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직접 마음속에서 그려봅시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영화감독이라 해도 더할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한 자비를 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궁지에 몰린 듯 보였지만, 오히려 지혜와 사랑으로 승리하십니다. 결국 고발자들은 하나둘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요. 요한은 "나이 많은 이들부터" 떠나갔다고 덧붙이며 풍자를 담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지혜는 탐욕이나 권력욕, 허영심과 결합되지만, 이 지혜가 사랑과 자비와 결합될 때 그것은 세상에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마음 없는 지성은 우리 모두에게 위험이 됩니다. 논리만 있고 마음이 없다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큰 해가 됩니다. G.K. 체스터턴은 "시인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체스 선수는 미친다. 수학자와 계산원은 미치지만, 창조적 예술가는 거의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논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논리 속에 위험이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논리에만 매달린 어리석음은 결국 해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자비는 곧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미신 하느님의 자비의 손"이라 칭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정의(定義)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데,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교회는 그날의 독서는 다니엘서의 수산나 이야기와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복음 이야기와 다니엘서의 수산나 이야기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서의 수산나 이야기는 의로움의 차원을 다룬 것이라면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잘잘못이 아닌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그 넓고 깊은 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논리나 이성에 의해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거룩한 마음의 잔치에 들어서라고 초대해 주십니다. 그 마음에 들어선다면 우리는 기계적인 논리가 아닌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는 사랑의 마음에 녹아들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치료제일 것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이 "마음"의 어원은 중세 한국어 "ᄆᆞᅀᆞᆷ"이라고 하면서 이 단어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는 불명확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에 대한 해석으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마음은 생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개념이긴 하지만, 생각이 두뇌활동이라면 마음은 가슴에 있다고 비유하며, 감정이나 감성과 동일시되는 느낌이 강하다. 감정이나 감성과 마찬가지로 몇 마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확언, 즉 말은 마음의 자물쇠 같은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직접 말로도 듣는 게 좋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는 판명되지 않았다. 마음이 존재한다는 물적 증거도 없고, 정신 활동을 통합하는 인격이 깃든 부위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격은 무수히 존재하는 뇌 기능을 통합하듯 존재한다."라고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마음을 발전시켜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초대해 주시는 거룩한 마음의 잔치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인격(人格)적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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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그 ‘돌덩이’는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덩이’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더 큰 ‘돌덩이’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돌아갔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곧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바람에,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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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말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 처지에서는 감히 바라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뜻밖의 기회가 주어져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번 플로리다 여행이 그랬습니다. 6개월 전부터 신부님들과 준비했습니다. 숙소, 차량, 음식, 운동까지 꼼꼼하게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본당 형제님 한 분이 그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들께 여쭈었고, 모두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깍두기’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깍두기’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요리도 잘했고, 운전도 잘했고, 미사 때는 복사도 해 주고 독서도 해 주었습니다. 늦게 돌아온 날에는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우연히 함께한 여행이었지만, 모두에게 기쁜 추억이 되었습니다.
달라스 성당 근처에 포트워스 성당이 있습니다. 달라스 성당에서 분가했습니다. 파견된 사제도 서울 대교구로 저와 같은 교구입니다. 달라스 성당은 본당의 규모가 포트워스 성당보다는 조금 큰 편입니다. 달라스 성당에서 사순 특강, 대림 특강 강사를 초청하면 포트워스 성당에서 강사 신부님을 함께 모시고 특강을 마련하곤 합니다. 이왕 신부님을 초청했으니, 포트워스 성당 교우에게도 좋은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으니, 저도 강사 신부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신부님들은 조금 피곤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특강을 해 줍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더 커지고, 슬픔은 나누면 더 작아진다.’ 저는 시애틀 타코마 한인 성당으로 사순 특강 하러 갑니다. 타코마 성당의 신부님이 저를 초대했습니다. 타코마 성당 근처에 레이시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포트워스 성당과 마찬가지로 서울 대교구 사제가 파견되었습니다. 레이시 한인 성당 신부님이 제게 부탁했습니다. 타코마 성당으로 오시는 김에 레이서 성당에도 사순 특강을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함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법,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외쳤습니다. “돌아오너라.” 하느님께서는 심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당신을 섬기라 하시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돌을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여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정죄에서 자비로 건너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정의에 감사드렸습니다. 죽어야 할 자리에서 용서받은 여인은 자비에 감사드렸습니다. 누가 더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 억울함이 풀리는 은총도 크지만,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는 은총은 더 깊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저는 ‘함께’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우연히 시작된 만남이 기쁨이 되었고, 나눔이 되었고, 기부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작은 나눔도 이렇게 기쁨이 되는데, 하느님의 자비는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사순시기는 돌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남을 향해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다시 듣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오십시오. 용서받은 사람답게, 용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순 제5주간을 지내며 자비로 새로 태어나는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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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한 인생에게 조차도 희망을 두시는 주님!
절체절명의 순간 보여주신 예수님의 대응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6)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성경 학자들이 예수님의 이 행동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왔지만 정확한 개념파악은 아직 미흡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글을 쓰시며 심사숙고하셨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가운데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침묵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혜를 청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윽고 고개를 드신 예수님, 안쓰럽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여인과 율법학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들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간단한 한 마디 말이지만 이 말씀은 한 여인을 죽음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을 일순간에 물리치시는 승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한 여인, 완전히 갈 때 까지 간 여인,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속수무책이던 여인, 그 여인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해방자 예수님, 새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예수님, 단죄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만을 주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한 인생에게 조차도 희망을 두시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죄 많은 여인 안에 자리 잡고있는 제 인생의 짙은 어두움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 여인이나 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치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물론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습니다.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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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8,1–11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들은 묻는 척하지만 사실은 함정입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말합니까?”
그들의 관심은 여인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 정당함과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계산입니다.
예수님은 즉시 판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소란 속에서 침묵이 생기고,
단죄의 군중 앞에 ‘멈춤’이 생깁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의 결정적 순간이
“돌을 던질 이유”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죄를 알아보는 빛이 켜지는 데 있다고 봅니다.
말씀은 타인을 겨냥한 무기가 아니라
먼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 문장은
사람들의 손에서 돌을 떨어뜨립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이 말은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더 진지하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벌’로만 해결하려는 마음을 멈추게 하고,
죄를 ‘회복’의 자리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이제부터는 죄짓지 마라.”
자비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새 삶으로 돌려보내는 힘입니다.
영성 주간의 월요일, 우리는 배웁니다.
회복은 누군가를 돌로 치는 순간이 아니라,
내 손에서 돌이 떨어지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을.
오리게네스의 눈으로 보면
이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단죄를 내려놓을 때
말씀은 비로소 생명이 된다.”
주님,
제가 남을 향해 쥐고 있던 돌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안의 어둠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단죄 대신 자비의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새 삶으로 보내시는
당신의 용서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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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진신님
■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로 빵을 만드는 법.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미사 중에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습니까? 돌이켜보면 부끄럽게도 오로지 제 자신을 위해서만 눈물을 흘려 왔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느냐 타인의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빠 라자로를 사랑하는 마르타의 마음과 진실한 신앙 고백에서 사랑하는 자매의 믿음을 발견했고, 그녀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옆에 앉은 그녀가 눈물을 닦아 주었는데, 마치 예수님이 제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원래 같이 앉지 않지만. 왜인지 오늘은 성전에서 마주쳐서 같이 앉게 된 겁니다.
며칠 전 그녀와 성체 앞에 앉아서 오랜 시간 신앙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날의 이야기는 오늘 복음 그대로였습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서 들어주시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고, 심지어 이미 모든 걸 받았음에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녀의 순수한 고백이 얼마나 빛났는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신실한 집의 태중교우로,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신앙인입니다.
순수한 고백을 떠올리며 오늘 복음 안에서 오빠를 사랑하는 마르타, 그리고 자매를 만났습니다. 마르타는 성경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제 주변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겁니다.
"순종하며 사는 곳에서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만들고 싶은 생각과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성장하는 법이다."
오늘 처음으로 빵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녀를 위해 눈물로 빵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딱딱한 빵이지만 그녀가 받아 주었음에 고마운 마음을 느낍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빵을 만들게 하시고, 또 먹이게 하시는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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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35 추가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1)”
1)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가르침들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시청각 교육’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일은,
율법 대신 사랑을 ‘선택’하신 일이 아니라,
‘구원’이 당신의 본래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명과 신원을 생각하면, ‘선택’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선택이 아니라 원래 그런 분입니다.
만일에 그 현장에 성모님이 계셨다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성모님께서 돌을 던지셨을까?
‘성모님만’ 죄 없으신 분이니, 돌을 던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사람은 성모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은 돌을 던지실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성모님이 돌을 던지신다는 것은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성모님은 사랑과 자비만 가득하신 분이니, 그것은 성모님께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을, 그 여자도 들었습니다.
그 여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의 죄를 너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너 스스로 자신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람들이 너에게 돌을 던진다면, 저항하지 말고 감수하여라.(그냥 죽어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 유다를 회개시키려고(살리려고)
끝까지 애를 쓰신 분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너 스스로 자신에게 돌을 던져라.”,
즉 “자살하여라.” 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닙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자살한 것은(마태 27,5)
‘예수님의 뜻’을 거스른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에게 돌을 던지면 감수하고 그냥 죽어라.”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실은 “돌을 던지지 마라.”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신앙인에게는 남을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남을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사제의 경우, 고해성사를 보겠다는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줄 의무만 있고, 거부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것 또한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사제의 본분입니다.>
4)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여자가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은데, 회개를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은 ‘기회’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새 인생을 살 기회.
여자가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산다면 구원받겠지만,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다시 죄를 짓는다면, 집행유예 되었던 벌까지 합해져서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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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7:15 추가
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한 여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에서는 ‘재판관’ 자리에 앉은 두 원로의 욕정과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할 뻔했던 ‘수산나’라는 여인이 극적으로 구원받는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온 백성이 두 원로의 증언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하느님께서 ‘다니엘’이라는 청년의 마음 안에 깃들어 있던 거룩한 영을 깨워 이 일을 바로잡게 하심으로써 공정을 실현하셨지요. 그저 나이 어리고 평범한 젊은이일 뿐이었지만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이끄심에 즉시 반응했던 다니엘, 나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하느님 뜻에 따라 올바른 일을 하려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던 다른 원로들, 그리고 사람에게 치욕과 모함을 받아 죽게 되더라도 하느님께 죄짓기를 거부했던 수산나, 이들은 모두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거룩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악의 세력이 초래한 혼돈과 불의를 바로잡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무죄한 이의 목숨을 구한 그 일을 기억하며 기뻐했지요.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간음’이라는 큰 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손에 끌려나와 군중들 한 가운데에 섭니다. 유다인들의 정결법에 따르면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죄인 중의 죄인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그곳에 있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수치심과 모멸감, 두려움으로 가득 차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여인을 동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습니다. 짐승 다루듯 억지로 끌고 나와 사람들 앞에 세우고는, 마치 로마 황제처럼 그녀의 생사를 결정하려고 듭니다.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에게 이토록 가혹하게 구는 건 그들의 마음이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을 외면하고 그 형식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예수님의 눈에 그녀는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게 창조하신 피조물이고, 이스라엘의 귀한 딸이며, 그 자체로 존중받고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인격체이지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소중한 것도 사실이고, 그녀가 ‘간음’이라는 큰 죄를 저질렀다는 것도 사실이라, 차마 그녀를 무조건 용서해주라고 말씀은 못하시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단죄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시고는,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실 뿐이었지요. 그러는 사이 그녀를 죽여야한다며 씩씩대던 군중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그 자리엔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됩니다.
무엇이 성난 군중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의 손에 들고 있던 ‘징벌의 돌’을 내려놓게 만들었을까요?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양심이 찔린 것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바닥에 적은 글귀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글귀는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아도, 너희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이런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을 헤아린다면, 죄 지은 형제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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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08:35 추가
■ 생활묵상 : 성전은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비판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비판의 의도로 했던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 어떤 계기로 충격을 받은 게 있어서 이제는 모든 걸 좋은 쪽으로 보려고 하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 등 신부님 관련해 가능하면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모든 건 하느님의 손에 맡기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단죄를 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다같이 한번 생각하고 만약 자기가 이런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는 조금 주의를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의도로 이 글을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제 주일엔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 오른쪽에 한 자매님이 앉아계셨습니다. 오른쪽 대각으로 45도 방향에 또 다른 자매님이 앉아계셨습니다. 미사 중에 앞에 자매님이 감기가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코를 화장지에 풀고 미사 장의자 선반 사이에 놓았습니다. 미사 마칠 무렵에 보니 두뭉치였습니다. 저는 이런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영세를 받고 예전에 김웅렬 신부님 카페에서 활동을 했을 때 이런 사례를 언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에티켓이란 명분으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한 분이 태클을 거셨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상황을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닙니다. 첫째는 그렇게 했을 때 뒷처리를 깔끔히 최소한 하든지 아니면 자기 호주머니나 가방 같은 곳에 넣어 그게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정도의 예의를 지키는 성숙한 신앙인이 됐으먼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15년 정도 이와 같은 사례를 봤을 때 70프로는 그냥 자신이 모르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좋게 생각해 전혀 성전에 버릴 의도가 없었는데 깜빡하고 갔다고 생각을 하겠습니다. 어제 제 앞에 계신 자매님도 그런 경우라고 이해를 하겠습니다.
제 바로 옆에 앉아 계신 자매님도 마침 공교롭게 화장지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보니 미사 때 간간이 눈물을 훔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닦는 용도로 사용하셨습니다. 근데 그분은 놀랍게도 제가 처음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눈물을 닦은 휴지를 조그마한 비닐 봉지에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미사 후에는 그 봉지를 가방에 넣어서 퇴장하셨습니다. 영성체 때 성체를 배령하시려고 나가지 않으시더군요. 제 추측인데 뭔가 회개의 눈물 같았습니다. 왜 그런 판단을 했느냐 하면 성체를 영하지 않으셨고 또 그런 상황에서 눈물을 훔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 앉아 계신 자매님은 그 정도 크기의 분량의 휴지이면 충분히 미사 후에는 자기가 휴지를 놓아두었던 걸 인식하고 어떻게 수거할 줄 알았는데 그냥 나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자매님께 휴지 가지고 가시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모양도 이상해 그냥 어쩔 수 없이 보고만 있었습니다. 결국 저도 순간 고민을 했습니다. 이거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일반 휴지 같으면 별 문제 없는데 정말 그냥 단순 휴지였으면 아무런 생각없이 제가 줍고 갔을 것입니다. 사실 코를 풀었던 거라 만지기가 조금 찝찝했습니다. 나중에 성당에서 청소를 할 때 치우겠지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찜찜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인데 그게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 본당은 교중미사 그걸로 주일미사는 월요일 새벽에 있기 때문에 누가 치우지 않으면 그대로 있게 될 게 뻔했습니다. 그 자리는 또 잘 앉는 자리가 아니라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위치였습니다. 양심상 그대로 놓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제가 어쩔 수 없이 더러워도 치웠습니다. 선행의 개념으로 한 게 아니고 그냥 보속한다 생각하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어제 만약 그 자매님만 봤다면 그냥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 제 옆에 계신 자매님이 봉지에 그걸 넣고 깔끔하게 퇴장하시는 모습을 보고 완전 상반된 모습이라 인상에 남았기 때문에 묵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물론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만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한 여인은 들에 놓아두고 한 여인은 데려가는 내용입니다. 그복음이 생각나서 나중에 이걸 한번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옆에 계셨던 분을 보면서 사실 가슴뭉클했습니다. 거의 아마 회개의 눈물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미사 때 그런 모습을 보니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눈물을 닦은 그 휴지도 그냥 쓰레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눈물이 묻어 있는 거라 마치 표현이 좀 이상한데 성서롭기까지 했습니다. 앞에 있는 휴지는 그냥 보기 흉한 쓰레기였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어제 그걸 보고 또 생각한 게 있습니다.
어제는 마침 그게 선반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제대로 앞을 시선을 두는 상황이라 그 휴지가 계속 제 시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미사 내내 좀 불쾌했습니다. 그냥 단순한 휴지 조각이었다면 별 그런 생각이 없었을 건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휴지를 보고 '미사예절'이라는 내용으로 글을 올릴 생각을 바로 했긴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전반적인 것을 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봤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런 경우에 자기 옷 호주머니 같은 곳에 넣었으면 하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전에 놓고 갈 경우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돼서 좋은 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사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가 됩니다. 저는 이걸 하느님 사랑까지는 확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애시당초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여라도 휴지를 놓아두고 가게 되면 성전을 쓰레기통으로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말입니다. 저 역시도 인간이라 실수를 합니다. 누구의 실수를 지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실수를 통해 즉 남의 실수를 통해 나도 이런 실수를 이런 사례를 통해 미연에 방지했으면 하는 마음을 한번 가져보자는 의도로 이해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똑같은 사람이라 언제나 실수를 하는 부족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더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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