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나 고급 브랜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샤넬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나하면 샤넬은 단순한 스타일이나 옷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여성복 스타일의 상당 부분은 서구 여성 복식사를 바꿔놓은 샤넬 스타일의 결과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침대 기둥을 붙잡고 안감힘을 쓰며 코르셋을 조이는 장면이 있다. 샤넬은 여성들을 이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그리고 바닥을 질질 끄는 긴 치마에서도 여성들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물론 샤넬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여성들이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거치적거리는 치마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샤넬만큼 세련되고 우아하게 벗게 해줄 수 있었을까?
샤넬은 그녀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사생아로 태어났고, 결혼한 후 가난과 병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샤넬이 여섯 살 때 죽고 말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어린 샤넬을 수도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떠나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딸을 찾지 않았다. 샤넬은 자신의 처지와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하러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러한 아버지 감싸기는 그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고, 성공한 후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된 ‘코코’가 아버지가 지어 준 애칭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코코’라는 애칭을 샤넬이 잠시 가구를 꿈꾸며 술집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붙여진 별명이었다. 샤넬은 수도원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이 시절 그녀가 훗날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여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바느질, 즉 재봉 기술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른 여학생들보다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고, 그녀 자신도 바느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훗날 샤넬이 모자 디자이너로 시작해 의상실을 열었을 때도 그녀의 재봉 솜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샤넬이 소녀 시절에 있었던 수녀원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무늬는 훗날 샤넬 패션 제국의 상징은 ‘C’ 두 개를 서로 반대가 되게 겹쳐 놓은 로고에 영감을 주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아 만들어 낸 모양을 보면 ‘C’ 두 개가 교차된 것이 보인다. 수녀원 시절의 단순하고 칙칙한 교복이 샤넬의 패션 철학인 ‘단순함’의 미학에 영향을 주었다. 샤넬은 이미 18세에 가난한 보통 여자들의 평범한 삶을 거부했다. 그녀는 도시로 가서 성공하고 싶었다. 수녀원에서 지내던 샤넬은 물랭에 있는 노트르담 여자기숙학교에 입학해, 20세인 1902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고모이자 같이 학교를 다닌 아드리엔과 함께 학교에서 소개해 준 시내의 유명한 의류 전문점인 ‘생트 마리’에 취직했다. 물랭은 파리만큼은 아니어도 군대가 주둔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잡하고 부유한 도시였다. 따라서 샤넬이 일하는 이 의상실은 유명했던 만큼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부유한 여성들뿐 아니라 그들을 에스코트하는 많은 남성들 또한 이 의상실에 드나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 두 여성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졌다. 우선 사교계 여성들은 당시의 유행 스타일에 맞게 색상과 스타일을 잘 골라 주는 샤넬은 맘에 들어했다. 당시 프랑스는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의 풍요로운 시기를 의미하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 좋은 시절)’시대였다. 부와 화려함, 향락이 넘치는 시절이었고 파리는 유럽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최첨단에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최첨단이라고 해도 패션, 특히 여성 패션은 사실 드레스를 바닥에 끌고 다니던 루이 14세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고, 모자는 조선 시대 왕비들의 가체만큼이나 장식이 너무 많아 무겁고 챙이 넓어서 하녀 없이는 쓰고 벗지도 못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