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金正浩, 1804년 ~ 1866년 이후)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1866년 (63세) 한성부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병사
□ 김정호와 관련한 왜곡된 사실
●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 않았다.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애초에 국가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답사에만 의존해 제작했단 자체가 넌센스이며, 과거 민족사관에 힘입어 부각되고 조명된 여러 역사인물들이 그러했듯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김정호 역시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낱낱이 답사해 지도를 만들었단 식으로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제작자가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도를 모아 집대성한 것만으로 그만한 정확도를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전 지도보다 개선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관성 있는 편집 및 검증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면밀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 김정호 옥사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가짜 뉴스라는 주장도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참고 자료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185~242쪽쪽.소준섭 (1996년 7월 10일).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조선인물실록 1》. 서울: 도서출판 자작나무. ISBN 89-7676-225-8.
각주
↑ 가 나 1866년 음력 3월 명성황후를 왕비로 맞아들인 사실이 대동지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31쪽쪽.↑ 가 나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泰然齋’(태연재)라고 되어 있고, 과거에는 이것을 김정호의 당호 가운데 하나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33~234쪽쪽.↑ 한때 월성(月城)이 김정호의 본관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월성은 황해도 토산(兎山)의 옛 이름이다. 김정호의 출생지는 황해도 봉산이 아닌 황해도 토산이며, 본관은 월성이 아닌 청도이다.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29-231쪽쪽.↑ 김양선(金良善)의 주장.↑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 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 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 가 나 《글로벌세계대백과》, 〈실학의 융성〉, 김정호.↑ 가 나 다 라 마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 가 나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34~236쪽쪽.↑ 유재건, 《이향견문록》, “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 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 대동여지도 목판, 문화유산채널↑ 또한 흥선대원군은 애로호 전쟁이나 두 차례의 강화도 군사분쟁 등 서구 열강의 쇄도가 동양을 죄어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통해 서양의 회중시계를 구해오게 하여 그것으로 시간을 맞추며 알뜰히 썼던 일이나,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다가 소각된 제너럴 셔먼호의 잔해를 수습하여 연구하라 명령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 흡수에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 〈대동여지도〉 등을 연구했던 김양선도 그 판목을 소유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판목이 15매 남아 있다.↑ 가 나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36~238쪽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