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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중유이(我中有儞)
내 안에 당신 있다는 뜻으로, 부부의 정을 극진이 표현한 말이다.
我 : 나 아(戈/3)
中 : 가운데 중(丨/3)
有 : 있을 유(月/2)
儞 : 너 이(亻/14)
출전 : 관도승(管道昇)의 아농사(我儂詞)
이 성어는 원(元)나라 때 송설체(松雪體)로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조맹부(趙孟頫)의 부인 관도승(管道昇)의 시(詩) 아농사(我儂詞)에 나오는 말이다.
관도승(管道昇)은 총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남편 못지않은 회화와 시작(詩作)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농사(我儂詞)는 남편 조맹부가 첩을 얻고 싶다는 시에 답한 시라고 한다.
명(明)나라 사람 장일규(蔣 一葵)의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趙松雪欲置妾, 以小詞調管夫人云;
조설송(조맹부)은 첩(妾)을 두고 싶은 마음에 사(詞; 한시의 한 체)를 지어 관부인(아내) 주었다.
我為學士, 你做夫人。
나는 학사고 당신은 부인이오.
豈不聞, 陶學士有桃葉桃根, 蘇學士有朝雲暮雲。
도(陶)학사에게는 도엽(桃葉) 도근(桃根)이 있고, 소(蘇)학사에게는 조운(朝雲) 모운(暮雲)이 있다는 소리를 어찌 못 들었겠소?
我便多娶幾個吳姬越女何過分。
나는 곧 몇 명의 오희(吳姬) 월녀(越女)를 얻으려고 하오.
你年紀已過四旬, 只管占住玉堂春。
당신은 이미 나이가 40이 넘었으니 나의 심신을 독점하려 하지 마시오.
이에 관부인(관도승)은 아농사(我儂詞)로 대답했다.
我儂詞 / 管道昇
(나와 당신의 노래 / 관도승)
你儂我儂, 忒煞情多。
그대 그리고 나, 깊은 정을 이길 수 없는 사이,
情多處, 熱似火。
정은 깊어, 마치 불꽃처럼 뜨거웠죠.
把一塊泥, 捻一個你, 塑一個我。
한 덩이 진흙을 이겨 하나는 당신, 하나는 나를 빚습니다.
將咱兩個一齊打破, 用水調和。
당신과 나를 다시 짓이겨 뭉개고, 물을 다시 부어,
再捻一個你, 再塑一個我。
당신을 빚고, 또 나를 빚습니다.
我泥中有你, 你泥中有我。
내 진흙 속에 당신이 있고, 당신의 진흙 속에 내가 있습니다.
我與你生同一個衾, 死同一個槨。
살아생전 당신과 함께 금침을 펴고, 죽어서는 같은 관을 쓰겠지요.
(堯山堂外紀)
조맹부(趙孟頫, 1254~1322)는 절강(浙江) 호주(湖州) 사람으로, 자는 자앙(子昂)이고, 호는 송설(松雪), 송설도인(松雪道人), 수정궁도인(水精宮道人), 구파(鷗波), 맹부(孟俯)이다.
⏹ 다음은 함규진 교수의 원(元)왕조에 봉사하며 중국 문화을 이어간 조맹부의 글이다.
첫째, 제왕의 핏줄이다. 둘째, 풍모가 뛰어나다. 셋째, 박학다식하다. 넷째, 언행이 바르고 깨끗하다. 다섯째, 글솜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여섯째,서예와 그림 실력이 절륜하다. 일곱째, 불교와 도교의 심오한 뜻을 깨치고 있다.
조맹부를 무척 아꼈던 원나라 황제 인종이 조맹부의 뛰어난 점을 열거한 내용이다. 이 정도면 당대의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보통 선비의 장점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유교)경전에 정통해 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데 추호도 거리낌이 없다”라는 말은 없다.
그것은 조맹부가 당나라도, 송나라도, 조선도 아닌 원나라의 선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조맹부는 송왕조 황실의 피를 이었다. 송태조 조광윤의 넷째아들 조덕방의 계통이며, 조광윤에게서는 12대손이 된다.
남송 효종이 형인 조백규, 즉 조맹부의 고조 할아버지에게 호주(湖州)를 하사하여 이후 대대로 호주(오흥)에서 살아왔다.
조맹부는 다섯 살 때 글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몸을 씻은 다음 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공부법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아버지 조여은을 잃고, “고아는 어쩔 수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이를 악물고 학업을 쌓았다.
그리하여 열네 살 때 처음 관계에 입문하여 송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인재의 길을 순탄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내일은 끝내 오지 않았다. 26세가 되던 1279년에 남송이 멸망하고 원나라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조맹부도 시골에 은둔했으며, 시문과 서화를 벗 삼고 책을 읽으며 덧없는 세월을 달랬다.
그러나 1286년, “재주가 있는 남송의 선비들을 특채한다”는 원왕조의 부름에 약 20명 정도가 응했는데 조맹부도 그중에 끼었으며, 명성으로는 단연 다른 선비들보다 앞섰다.
정사초 같은 경우 송왕조의 조(趙)씨 성 중의 일부를 써서 사초(思肖)라는 이름을 지을 만큼 송왕조에 길이 충성하는 뜻을 보였는데, 정작 조씨 성을 가진 조맹부가 원나라의 녹을 먹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당연히 비난이 빗발쳤고, 그 비난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맹부는 동진 시대 사람으로 “더러운 세상을 피해 은둔한다”는 뜻을 밝힌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잠을 '귀거래도'로 그리고, 그림에 이렇게 적음으로써 세상의 비난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의 때를 갖게 되니, 벼슬하거나 은거하거나 각자 천명이 있다.”
조맹부는 절개를 꺾는다는 오명을 무릅쓰고라도 원왕조에 벼슬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망했으나 선비들이 돌보아야 할 백성은 그대로 있고, 중화의 문명이 자칫 흙바람에 스러질 위기에, 누군가 나서서 남송의 백성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중국의 문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에 근거했다.
황족인 조맹부가 어떻게 원나라 관리가 될 수 있느냐는 생각은 한족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 앞에 엎드리자, 주변에서 “송왕조의 핏줄인데 언제고 배신하지 않겠느냐”며 공공연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송왕조의 핏줄이니 더더욱 등용할 의의가 있는 것이다”는 쿠빌라이의 고집으로 병부낭중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순탄한 관료 생활을 이었고, 한림학사에 1품관인 영록대부까지 되고 사후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조맹부를 가까이에서 위로하며 연인이자 벗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아내 관도승(管道昇)이었다. 조맹부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서화가로 일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28세 때 조맹부를 만나보고 그 사람과 예술에 모두 반하여 결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관도승은 독실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남편 역시 불교를 깊이 공부하도록 이끌었고, 그녀와 함께 중봉이라는 승려에게 배우던 조맹부는 “이제까지의 불교 공부가 모두 쓸데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라며 그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이들 부부는 한가한 때면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으며, 호수에 배를 띄우고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조맹부가 한번은 최운영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하자, 관도승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부디 살아생전 한 이불을 덮고, 죽어서 하나의 무덤에 들기를”이라는 시를 지어 읊으니 조맹부가 뜻을 접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인 시의 나이로 보아 아마 조맹부에게 관도승이 첫 여인은 아니었을 듯하지만, 관도승이 1319년에 각기병으로 죽기까지 다른 여인은 두지 않았으며, 이후 3년을 더 홀아비로 살다가 죽는다.
관도승이 죽었을 때 문상하러 멀리 호주까지 조맹부를 찾은 사람 중에는 고려의 이제현도 있었다. 그는 왕위를 넘기고 대도에 들어와 살면서 ‘만권당’을 짓고 원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던 충선왕의 부름으로 원나라에 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33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원나라의 제일 문인인 조맹부와 고려 제일의 재사인 이제현 사이에는 종족을 초월한 우정이 싹텄던 것 같다. 조맹부가 개발한 서체인 ‘송설체’를 고려에서 유행시킨 사람도 이제현이다.
조맹부는 충선왕하고도 친밀했으며, 이들 중 누군가가 대도를 떠나 지방으로 갈 때면 서로 시를 지어 주고 화답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 아중유이 이중유아(我中有儞 儞中有我)
내 안에 당신 있고, 당신 안에 나 있다는 뜻으로, 부부의 정을 극진이 표현한 말이다.
조맹부(趙孟頫)는 몽골의 원(元)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송설체(松雪體)가 그의 서체다. 조맹부체 라고도 한다.
그에게는 관도승(管道昇)이라는 이름의 부인이 있었다. 총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남편 못지 않은 회화와 시작(詩作)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명에 따라 제작된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에 그의 작품이 수록됐을 정도였다.
부부 금슬도 좋았다. 조맹부는 당시 흔했던 축첩(蓄妾)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50살을 갖 넘긴 나이에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조맹부가 부인 관도승에게 넌즈시 건낸다. “서예가 왕헌지(王獻之) 선생은 도엽(桃葉)과 도근(桃根)이라는 첩을 뒀고, 시인 소식(蘇軾) 선생도 조운(朝雲)과 모운(暮雲)이라는 첩을 뒀음을 그대 알 것이요. 나 역시 여럿 첩을 둬도 상관 없겠으되, 나이 50에 이르도록 그저 옥당춘(玉堂春)만 지키고 있으니…”
첩을 들였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관도승은 기가 찼다. 그는 남편에게 시 한수를 내민다.
儞儂我儂, 忒煞多情。
그대 그리고 나, 깊은 정을 이길 수 없는 사이입니다.
情多處, 熱似火。
정은 깊어, 마치 불꽃처럼 뜨겁습니다.
把一塊泥, 捻一個儞, 塑一個我。
한 덩이 진흙을 이겨 하나는 당신, 하나는 나를 빚습니다.
搜索將咱們兩個一齊打破。
당신과 나를 다시 짓이겨 뭉갭니다.
用水調和, 再捏一個咱, 在塑一個我。
물을 다시 부어 당신을 빚고, 또 나를 빚습니다.
我泥中有儞, 儞泥中有我。
내 진흙 속에 당신이 있고, 당신의 진흙 속에 내가 있습니다.
與儞生同一個衾, 死同一個椁。
살아 생전 당신과 함께 금침을 펴고, 죽어서는 같은 관을 쓰겠지요.
결과는 뻔했다.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으로 조맹부는 첩 들이려는 마음을 거둔다. 아농사(我儂詞)로 알려진 시다. 관도승의 절절한 사랑이 묻어난다.
이런저런 불륜 사건이 요즘 자주 인구(人口)에 오르내린다. 한 국회의원은 대낮 호텔 성폭행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오늘 부인에게, 남편에게 ‘내 안에 당신 있고, 당신 안에 나 있다(我中有儞 儞中有我)’는 사랑가를 읊어주면 어떨까.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中(가운데 중)은 ❶지사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한가운데를 상하로 통하는 세로 금으로 중심, 중앙을 뜻함과 형제를 위로부터 차례로 伯(백), 仲(중), 叔(숙), 季(계)라고 일컬을 때의 仲(중)으로서 쓰인 것이다. 또는 깃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❷상형문자로 中자는 ‘가운데’나 ‘속’, ‘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전에는 中자가 무언가를 꿰뚫는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에는 이것이 군 진영에 깃발을 꽂아놓은 모습을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中자는 진지 중앙에 펄럭이는 깃발을 그린 것으로 ‘가운데’나 ‘중앙’을 뜻하고 있다. 中자가 ‘중앙’이라는 뜻으로 쓰이다 보니 때로는 ‘속’이나 ‘안’, ‘마음’과 같은 사물의 중심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中(중)은 (1)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의 뜻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임을 나타냄 (2)등급 같은 것을 上中下(大中小)로 구분할 경우 그 가운데 등급 중등(中等) (3)중국 (4)장기판에서 끝으로부터 둘째의 가로줄을 이르는 말 (5)마음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운데 ②안, 속 ③사이 ④진행(進行) ⑤마음, 심중(心中) ⑥몸, 신체(身體) ⑦내장(內臟) ⑧중도(中途) ⑨절반(折半) ⑩장정(壯丁) ⑪관아의 장부, 안건(案件) ⑫가운데 등급 ⑬중매(仲媒), 중개(仲介) ⑭중국(中國) ⑮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둘째, 다음 ⑯가운데에 있다 ⑰부합하다, 일치하다 ⑱맞다, 맞히다, 적중시키다 ⑲급제하다, 합격하다 ⑳해당하다, 응하다 ㉑뚫다 ㉒바르다, 곧다 ㉓가득 차다 ㉔이루다, 이루어지다 ㉕고르다, 고르게 하다 ㉖간격을 두다 ㉗해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깥 외(外)이다. 용례로는 중도에서 끊어짐을 중단(中斷), 한가운데를 중심(中心),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을 중앙(中央),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 중추(中樞), 일이 되어 가는 동안 중도(中途), 치우침이나 과부족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중용(中庸),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를 중추(中樞), 두 사물의 사이를 중간(中間),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둠을 중지(中止), 중간에서 이어줌을 중계(中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중립(中立),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도중(途中), 하늘이나 하늘 가운데를 공중(空中), 마음 속을 심중(心中), 도시의 안을 시중(市中), 정신을 집중시킴을 열중(熱中), 눈의 안이나 마음속을 안중(眼中), 코의 밑과 윗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을 인중(人中), 돌에 박힌 화살촉이라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큰 힘이 나올 수 있다는 중석몰촉(中石沒鏃), 터무니없는 말로 헐뜯거나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밈을 중상모략(中傷謀略), 일을 하다가 끝을 맺지 않고 중간에서 그만 둠을 중도이폐(中途而廢), 마음속의 욕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외부의 사악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을 중경외폐(中扃外閉), 중립을 취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중립불의(中立不倚), 보통 사람은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중인불승(中人弗勝), 마음속에 일정한 줏대가 없음을 중무소주(中無所主), 덕성이 발라서 과불급이 없는 화평한 기상을 중화지기(中和之氣), 시작한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고 중간에 흐지부지 한다는 중도반단(中途半斷)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을 미증유(未曾有),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계란유골(鷄卵有骨), 웃음 속에 칼이 들어 있다는 소중유검(笑中有劍),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유구무언(有口無言) 등에 쓰인다.
▶️ 儞(너 이/니)는 형성문자로 你(이), 伱(이), 伲(이), 倷(이), 妳(이), 您(이)와 동자(同字)이다. 爾(너 이)는 실을 가락옷에 잘 감을 때 쓰는 물레라는 해석과, 윗부분은 도장의 손잡이고 아래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의 밑 부분이라는 해석으로 나눠진다. 도장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증표다. 그래서 ‘너’라는 인칭 대명사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人을 추가해도 儞(너 이)이고, 이인칭 대명사 你(너 이)가 약자다. 你(너 니)는 중국어의 이인칭 대명사(너)를 가리키는 한자임과 동시에 중국에서만 쓰는 한자로, 爾(너 이)의 중국식 속자이다. 이 글자는 爾(너 이)가 '너' 외에도 '그러하다', '가깝다(邇)', '어조사', '~云爾(=上同)'와 같이 여러 뜻과 용법으로 쓰이게 되자, 이 중 '너'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亻(사람인변)을 붙여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다(尔는 爾의 간체자이다). 또한, 발음으로도 爾(이)와 구별하기 위해 你의 발음을 '니'로 정하였다. 참고로 尔(너 이: 爾의 간체자)는 爾의 초서체에서 온 글자로, 爾의 윗부분만을 따온 爾의 약자 尒(이)를 변형시켜 만든 尒의 이체자이다. 그리고 你는 중국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로, 한문에서는 爾(간혹 중국의 영향으로 儞를 쓰기도 함), 汝(=女), 子 등을 주로 쓴다. 이와 비슷하게 중국에서만 사용하는 한자로, 們(들 문: 간체자 们)이 있는데, 인칭대명사 등의 뒤에 붙어서 복수를 만들 때 사용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儞(너 이/니)는 ①너 ②그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