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32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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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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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bWloUMQ4j8
[예수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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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고 겸손한 이들에게만 발현하시는 성모님!>
1531년 성모님께서 멕시코 과달루페에 발현하셨는데, 그때 목격한 사람이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성 요한 디다코(스페인어: 후안 디에고)입니다. 성모님의 과달루페 발현은 남미 대륙 복음화에 엄청난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지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성모 성지로 유명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과달루페 성모님을 남미 대륙과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멕시코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은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 혼혈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성모님께서는 갈등을 계속하던 침입자 스페인 사람들과 원주민 사이의 화해를 바라시는 의미에서 혼혈의 모습으로 발현하신 것입니다.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을 계기로 불과 8년만에 당시 800만 인구 가중에 700만명이 영세, 입교했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비상한 방법으로 당신의 구원 은총을 베푸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의 대상은? 몇 명의 목격자들을 제외하고 성모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어른들 역시 어린이처럼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 디다코 역시 그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왜 어린이들과 착하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발현하셨을까요? 왜 주교님이나 사제들, 대 신학자들에게는 발현하지 않으실까요?
사실 당신의 메시지를 알리려고 하신다면 영향력있는 분들에게 나타나시면 더 용이하실 텐데, 성모님은 한사코 어린이들이나 작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도 병약한 시골 소녀나 못 배운 어린이들에게 말입니다.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작은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이런 메시지가 아닐까요?
성모님의 발현 역사를 살펴보면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자녀들을 향한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할 때 성모님은 발현을 통해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성모님은 발현을 통해 당신 양 떼를 따듯이 품어 안아 주셨습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는 당신 말씀의 전달자로 고관대작이나 명망가가 아니라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그때그때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건네주심으로 인해 교회는 나아갈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전해주신 메시지는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현하신 성모님의 메시지는 곧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였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는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성모님의 메시지는 복음의 요약이요 가톨릭 정통 교리였습니다.
교회가 승인한 성모님 발현 메시지는 절대로 교회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철저하게도 교회의 어머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슬러가면서 발현하시고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 계속해서 지구 도처에 발현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하느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에 다시금 신앙의 불을 지피기 위한 따뜻한 모성애의 발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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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v9_viTEHto?si=WZ9mme-JVlUdif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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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녀가 되어간다>
태양 형제, 달 자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아름다운 기도문 태양의 찬가를 아십니까? 그는 이 노래에서 태양을 형님이라 부르고, 달과 별을 누이라 부릅니다. 심지어 바람과 불, 물과 땅, 그리고 죽음조차도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미치광이거나 시인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무생물인 해와 달과 형제가 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프란치스코에게 이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영적 실재였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단순했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고, 저 태양을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에게서 난 한 식구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아버지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남이 아니라 내 형제요 자매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가 되어가는 첫걸음입니다.
생명에 대한 외경:
이 마음을 가졌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그는 밀림 속에 병원을 지을 때, 인부들이 땅을 파다가 개미 떼를 발견하면 공사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미들이 안전하게 이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길을 돌아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까짓 벌레가 뭐라고 공사를 지체합니까?"라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말했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 가운데서 살려고 하는 생명입니다." 그가 개미를 밟지 못한 것은 개미가 귀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 안에 깃든 창조주의 숨결, 즉 아버지의 서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가족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가장 먼 곳(하찮은 미물) 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흘러들어와 완성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심에 갇혀 타인과 자연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옆에 앉은 분을 내 형제처럼 여기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하느님을 온전한 아버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니, 아버지가 만드신 작품들도 소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낡은 바이올린을 선택한 집사
여기, 진짜 자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 없이 병들어 죽어가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임종을 앞둔 주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일해 준 식솔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너희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이 집에 있는 귀중한 물건 중 딱 하나씩만 골라 가져가거라."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그들은 앞다투어 가장 비싼 물건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천만 원짜리 그랜드 피아노를 찜했고, 어떤 사람은 최신형 전자기기를, 어떤 사람은 대리석 식탁을, 어떤 사람은 금고 속에 있던 패물을 챙겼습니다. 모두가 '돈이 되는 것'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가장 나이 든 늙은 집사는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줄도 끊어지고 볼품없는 악기였습니다. 주인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왜 하필 그 쓸모없는 것을 가져가려나? 저기 금송아지도 있는데." 늙은 집사는 바이올린을 소중히 품에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주인어른, 이 바이올린은 먼저 떠난 도련님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것입니다. 도련님이 이것을 켜실 때 주인어른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 저는 기억합니다. 저는 도련님이 너무나 보고 싶고, 그분을 사랑했던 주인어른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이것을 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인의 '재산'을 사랑했지만, 이 노인만이 주인의 '마음'을 사랑했고 주인이 사랑했던 '아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주인은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고쳤습니다. "내 전 재산을 이 집사에게 상속한다. 그가 내 아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복음]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가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바보 같은 짓입니다. 1마리보다 99마리가 더 비싸니까요.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는 그 한 마리가 그냥 '가축'이 아닙니다. 당신이 직접 빚어 만드신, 대체 불가능한 '자식'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진 노숙자, 나에게 상처 준 이웃, 성당에 나오지 않는 냉담 교우... 그들은 낡은 바이올린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치가 없다고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는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핏값이 서려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아끼시는 그 낡은 바이올린을 쓰레기통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녀의 마음입니다.
[결론] 벤야민을 잃으면 아버지가 죽습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을 때, 요셉은 형들을 시험합니다. 막내 벤야민을 도둑으로 몰아 잡아두려 한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요셉을 팔자고 주도했던 유다가 나섭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나리, 제발 저 아이를 보내주십시오. 저 아이가 돌아가지 않으면 제 아버지는 슬픔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목숨과 저 아이의 목숨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차라리 저를 종으로 삼으시고 아이는 보내주십시오."
유다는 벤야민을 끔찍이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벤야민을 잃으면 겪게 될 '아버지의 고통'을 알았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요셉은 방성대곡하며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유다가 비로소 아버지의 참된 아들이 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이렇게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아직 남입니다. 하지만 내 눈엔 별로여도, 아버지가 사랑하시기에 나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타인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바로 아버지가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양이고, 주인이 아끼시는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그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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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롱한 보석 구슬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실로 꿰어서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로 만들지 않으면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전에 아는 분들의 추천으로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무심코 있었는데 보험이 만기가 되었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었고, 핸드폰도 바뀌었습니다. 보험사에서는 만기가 되었다는 연락을 우편으로도, 문자로도 보냈는데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이번 휴가에서 은행 직원이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보험사에 일일이 전화해서 지급 방법을 문의하였습니다. 어떤 것은 연금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어떤 것은 연장하였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팩스로 받아서 작성해 주었습니다. 3시간 가까이 업무를 처리해 준 은행 직원에게 감사드립니다. 돌아보면 휴가 중에 저를 도와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울산과 부산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하고, 일정을 만들어 준 신부님이 있습니다. 주문진에서 낚시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겼고,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레위는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며 지나갔습니다. 사제는 성전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 학자가 말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그렇게 자비를 베푸세요.”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누군가의 구슬을 꿰어서 보배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고통 중에 있는 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뉴욕도, 지금 살고 있는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뉴욕도,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어느 곳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군대에서도,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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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위로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이사야서는 오늘 독서에서 희망을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 줍니다. 이 위로는 아주 강력해서 죗값을 치르느라 유배살이에 지치고 실의에 빠진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권능으로 새롭게 하시면서 직접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은총은 타인을 통하여 배달되지 않고 당신께서 몸소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분께서 모든 은총의 총합이십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 40,10)
하느님의 상급과 보상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주시는 희망이 아닐까요? 세상에서 인간적 기대는 어긋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안에서 희망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의 삶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희망으로 존재합니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도 희망을 존재의 필수라고 보았습니다. 비슷하게 사람은 음식 없이는 40일, 물 없이는 4일, 공기 없이는 4분,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4초도 살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이 대림 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희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새끼 양들을 안으시며,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그 다정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나러 기쁨과 희망으로 걸어갑시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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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전한다. 주님은 단순히 아흔아홉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끝까지 나아가시는 분이시다.
성 이레네오는 아담의 타락을 이 비유와 연결하며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양은 바로 인류 전체이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아담을 다시 찾아 구원의 길로 데려오셨다.”(Adversus Haereses III,23,8) 아담은 무리에서 벗어난 길 잃은 양이었고, 그 결과 인류 전체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죽음에 빠진 우리를 어깨에 메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기뻐하시며, 그의 회개가 온 하늘의 기쁨이 된다.”(De Lapsis 36) 이것은 단순한 수학적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아흔아홉과 하나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는 특히 상처받고 잃어버린 자에게 더 기울어지는 사랑임을 보여준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며,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605) 이 말씀은 단지 목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보여준다. 즉, 교회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소외된 이를 포용하며, 구원의 문을 누구에게나 열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이 목자적 마음을 지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비유를 묵상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길 잃은 양이었고, 그분은 나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다. 나는 내 힘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나, 그분의 사랑이 나를 찾으셨다.”(Sermo 46,18) 우리는 종종 스스로 아흔아홉 마리 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는 한 마리 양이며, 늘 주님의 자비가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주님께 돌아온 뒤에는 책망이나 심판이 아니라, 오직 기쁨만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본질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일깨워준다. 1. 인류 전체는 길 잃은 양과 같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2. 하느님의 사랑은 특히 상처받고 멀어진 자에게 더 큰 기쁨으로 드러난다. 3. 우리 자신도 늘 잃어버린 양임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에게 목자가 되어야 한다. 회개한 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신앙의 위기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기쁨이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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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코 잃지 않네>
마태오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결코 잃지 않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
잃어버린 하나를
향한 눈길에
늘 그렇게 이미
그 하나 오롯이 있으니
결코 잃지 않네
잃어버린 하나를
향한 손길에
늘 그렇게 이미
그 하나 오롯이 있으니
결코 잃지 않네
잃어버린 하나를
향한 발길에
늘 그렇게 이미
그 하나 오롯이 있으니
결코 잃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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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 쪽에서도 ‘되찾은 양’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1)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구원받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크게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하느님의 그 ‘큰 기쁨’과 ‘큰 슬픔’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회개는 구원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고,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려라.”라는 가르침이고, 간단하게 줄이면 “회개하여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즉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실제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양을 잃은 목자의 슬픔과,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그 이상의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는 ‘모든 사람’이 ‘잃은 양’이었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 냉담 중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발로 목자에게 되돌아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목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실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냉담 상태는 목자에게 찾아오라고 요구할 권리가 아닙니다.
<목자에게 찾아오기를 ‘간청’하는 것과 찾아오라고 명령하듯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라면, 목자가 찾아오는 것을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기뻐하고, 반가워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미안해하지도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고, 목자를 반가워하지도 않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목자가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4)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신앙인은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변화된 사람들인데, 그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부르신 일은(사도 9,4),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울’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하고 ‘바오로 사도’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8-9)
아마도 사울은 사흘 동안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회개했을 것이고, ‘진리’에 대해 깨달았거나, 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의 회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흘’이라는 기간도 상징적입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에는 사흘 동안의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갈라티아서를 보면, 3년의 시간이 더 걸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 1,17-18)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3년 동안’ 묵상하고 회개하고 보속하고 기도하면서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5) ‘잃은 양’인 ‘나를’ 찾고 부르시는 것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잃은 양’을 찾으신다고 해서 ‘잃은 양’이 자동적으로 ‘되찾은 양’이 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의 부르심은 내가 응답하고 노력해야만 완성됩니다.
또 한 번 ‘되찾은 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잃은 양’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되찾은 양’으로서 살아가려고 성실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실제 현실을 보면, ‘되찾은 양’이 되었다가 또다시 ‘잃은 양’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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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만나면서 살 수는 없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있다. 때로는 골치 아픈 이를 만나 힘들어한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간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한다. 사실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레지오 교본).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한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하셨다. 한 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자.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라. 한시라도 빨리 누군가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주님께서 다정한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길 희망한다.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다정한 손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택되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 아픈 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된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란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특성을 가진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인 주님께 온전히 의존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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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14-16) 이사야 예언서의 이 말씀이 마치 오늘 복음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잊으시거나 포기하셔 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당신을 떠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며, 당신 사랑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주인공이 됩니다. 기도가 사라져 버린 삶에 다시 기도가 시작된다면, 그 또한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와 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바빌론에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위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품고 우리의 목자이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양이 되어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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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나보다 약한 입장에 있는 이를 대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요?“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복음 18장 12-14절)
<작은 이를 대하는 태도>
간혹 좋은 이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신부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엉뚱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가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치관이 맞는 상대를 찾아라. 흔히들 나와 다른 매력을 가진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끌리긴 하지만 길게 봤을 땐 비슷한 가치관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 부모님과의 관계가 원만한지 봐라. 부모님과의 관계가 문제 없을 때 인격적으로 건강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싸워 봐라. 의견 충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조금 특별한데요,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보다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인격적 성숙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한 사회의 태도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드러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실행 여부가 교회의 교회다움을 결정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대하는 목자의 태도가 그 목자의 사제다움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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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어떤 말을 제일 많이 듣느냐고 물었더니, 한 아이가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잔소리”
다음은 2015년 미국의 ‘사회적 인지 및 감정 신경 과학’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의과 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평균 연령 14세의 청소년 32명에게 엄마의 잔소리를 녹음한 음성을 30초쯤 들려주고 뇌의 활성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엄마의 잔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들 뇌의 부정 감각 처리 영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즉각 과민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반면에 감정 조절이나 공감, 사고력을 담당하는 전두엽, 측두엽의 접합부는 비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아이들이 생각을 멈추고 감정에 잠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이해와 지지다.”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이지 않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아이로 성장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감정적으로 또 세상의 관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양 백 마리는 개인이 소유하기에 꽤 큰 규모의 재산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예수님을, 양 떼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습니다. 이는 연약함이나 유혹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멀어진 신자를 의미합니다.
경제적 타산(99 vs 1)을 초월한 ‘사랑의 논리’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에게는 사랑으로 그 ‘하나’가 전체만큼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찾게 되면 기쁨이 가득 차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죄인이나 방황하는 신자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형제가 길을 잃었을 때, “어쩔 수 없다”라며 방치하지 말고, 끝까지 찾아 나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이 스스로 목자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사랑의 논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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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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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의 뜻”(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먼저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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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내 집에 오실 때 나는?>
오늘 복음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으시는 주님을 얘기하는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이 복음을 읽는 뜻은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실 주님이 바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목자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주님은 또한 이사야가 오래전에 메시아에 관해서 예언한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오실 분이 이런 분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오늘 저는 이렇게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나는 기다리고 있는가? 이런 관점으로 초점을 돌리고 오늘 저를 성찰해봤습니다.
극단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찾아 내 집에 오시는데
그 소리를 듣고 주님을 피해 집을 비우는 나는 아닌가?
옛날 저는 본당신부 대리를 몇 달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냉담자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새 신자 모집도 중요하지만 냉담 교우를 먼저 찾자고 그래서 냉담 교우 방문을 계획했지요.
그런데 가정 방문을 하니 그 얘기를 듣고 냉담 교우들이 집을 비우고 어디로 가 버려 아주 속상했던 적이 있지요.
이처럼 성탄절에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데 내가 기다리지 않거나 심지어 도망쳐버린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습니까?
물론 저는 도망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저도 무성의하게 맞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청소도 안 한 채로 주님을 맞이하고, 음식 장만은 고사하고 차라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않는.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요즘 제 내적 상태가 어지럽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아니 무척 사랑하지만, 19일에 있을 음악회에 저의 신경이 온통 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회 때문에 저의 내적 상태가 어지럽고 음악회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이니 주님이 오실 때 저는 청소가 안 된 상태이고, 주님이 오실 때 저는 집을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올해 저의 깨어 있음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곧 음악회로 신경 쓸 것이 많을지라도 그런 가운데서도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잃지 않고 주님께 깨어 있는 것 말입니다.
아무튼 올해 저는 이런 면에서 길잃은 양인데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실 주님께 죄송해하며 감사드리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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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작은 이들을 향해 있는 예수님과 성모님!>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작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성모님도 보잘것없는 나자렛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12월 9일인 오늘은 '멕시코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님'께서 '후한 디에고'에게 발현하신 날입니다.
후한 디에고(57세)는 가난한 인디언이었습니다.
'프랑스 루르드 성모님'도 가난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벨라뎃다.14세)'에게 발현하셨고,
'포르투칼 파티마 성모님'도 세 어린 목동들인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 히야친타(7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벨기에 바뇌 성모님'도 당시 냉담자였던 소녀 '마리에트 베코(12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구로,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도구로 선택된 사람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려고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양 백 마리 전체를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18,13)
사회교리의 핵심 가치는 '공동선과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잃어버린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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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을,
되찾음에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구원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픈 곳을
그냥 두지 않고
아픈 곳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은 이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대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양
한마리입니다.
그분은 기다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움직이고
찾아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다시 찾으신
하느님의 기쁨은
잔치를 여는
축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잃었던 사랑이
돌아오고,
아파했던 관계가
치유되는,
구원이 완성되는
우리 삶의
참된 기쁨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을
다시 찾으신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이
돌아오는 순간은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방향이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바뀌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관계적 자각에
눈뜨는 회개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은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가
사랑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기쁨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돌아오는
우리 마음의
참된 변화가
진정한 회개이며
진정한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영혼을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보고 배우는
기쁜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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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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