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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노벨문학상의 문장]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 2024-10-05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체계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민음사)
계몽주의와 계몽주의를 계승한 근대성이 주지하듯 지구 규모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의 기반이다. 이성과 합리성이 그 주춧돌이다. 지금의 세계를 만든 출발점인 계몽주의(啓蒙主義)는 빛이란 상징을 사용한다. 우리 말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불어 뤼미에르(Lumières)는 단어로는 빛 자체이다. 영어도 빛(light)과 관련하지만, 빛 자체보다는 빛을 ‘끌어 들여오는(en)’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독일어(Aufklärung)는 단어 조성상 불어보다 영어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행위(auf)를 강조한다. 다만 빛을 직접 지시하지 않고 빛을 비춘 결과를 용어에 담았다. (빛을) 비추고 해명하여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한국어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강조한다. 계몽은 어둠[蒙]을 밝히는[啓] 행위여서 살펴본 세 언어 중에선 독일어에 그나마 가깝다. 결과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계몽주의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내포한다. 어둠을 밝혀서 투명하게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빛 자체를 맹목적으로 떠받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결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다.
빛에만 집중하면 빛에 눈이 머는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빛 말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어둠을 밝히긴커녕 어둠이 더 깊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전일하고 총체적인 빛이 아니라면 빛의 등장은 어둠의 존재를 부각하고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비유로서 전일하고 총체적인 빛이란 게 현실에서 불가능할 테지만, 만일 그런 빛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전방위를 샅샅이 훑는 빛이 아니라면 그림자의 생성까지는 방지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빛의 등장이 어둠을 깨웠다. 빛이 없을 때 어둠은 제 어둠을 알지 못했다.
인용문에서 소설의 화자가 하려는 말이 이러한 이야기일까.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중에서 대중적인 작품에 속한다. <방랑자들> <태고의 시간> 등과 비교해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서사가 간명하고 확고해 독자는 비교적 쉽게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토카르추크는 사회적 문제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작가이다. 생태주의자로서 환경보호와 동물권 수호에 강경한 주장을 편다.
그에게 문학은 행동이다. “좋은 소설이란 그 외피가 스릴러든 로맨스든 상관없이 세상을 향해 지혜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작가는 스스로 ‘도덕적 스릴러(moral thriller)’라고 규정했다. 스릴러의 기법으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겠다.
‘스릴러’란 표현은 통상 영화를 설명할 때 쓴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영화에서 말하는 스릴러를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전통적인 소설 분류로는 추리소설이다. 순문학에서 살짝 비켜서 있다.
작가가 주장하는 도덕은 편파적인 도덕이다. 소설을 통해 동물권을 침해하는 수괴들에게 도덕적 징벌이 내려지는데 인간의 관점으론 과도하거나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피를 얻을 목적으로 여우를 대규모로 사육하고, 고기나 재미를 위해 사냥하는 경찰서장 신부 등 지역의 토호들을 주인공이 무참히 살해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종반부 반전을 통해 범인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대다수 독자는 보편적 법감정과 괴리된다는 반응을 보일 법하다.
그들이 사악한 인물로 그려지긴 했지만, 비명횡사할 만한 잘못을 저질렀냐는 질문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여기서 더 보편적인 법감정을 내세운다. 참신하다는 반응과 기괴하다는 반응이 교차할 것이다. 즉 생명종 전체를 동일한 가치로 대하면, 살해당한 사람들은 학살자이다. 더구나 주인공이 딸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개들을 죽인 자들이기에 정당한 복수이기도 하다.
계몽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계몽주의와 연이은 근대사회는 공장식 축산으로 인간 식생활에 전례 없는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물의 입장에선 아우슈비츠의 일상화가 열린 셈이다. 특정한 생명종에 의한 다른 생명종의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무엇보다 대대적인 착취가 만성적으로 자행된다. 사실 이런 야만은 지구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다. 동물이 복수할 것이라고 소설의 주인공은 말한다. 주인공은 단지 자신의 두 딸의 복수를 소설에서 했을 뿐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파우스트>의 ‘차가운 악마의 손(die kalte Teufelshand)’을 거론한다. 그의 도덕은 인간의 입장에선 악마의 도덕이다. 놀랍게도 소설은 연쇄살인범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해피엔딩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강력한 문제의식이 대중성과 파격을 겨냥해 이 소설에서 독특한 내러티브로 구현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소설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자주 등장하고 빈번하게 인용된다. 제목 또한 블레이크의 시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에서 가져왔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Drive your cart and your plow over the bones of the dead)”는 시구에서 ‘죽은 이들’이 누구인지 쟁기를 끄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
https://m.blog.naver.com/jogaewon/110036228144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 - 윌리엄 블레이크
씨 뿌릴 때에 배우고, 추수 때에 가르치고, 겨울에 즐겨라.
죽은 자들의 뼈다귀 위로 마차와 쟁기를 몰아라.
지나침의 길을 걷다 보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
신중함은 못생긴 돈 많은 노처녀로서 무능력의 애인이다..
간절히 원하면서 행하지 않는 자는 역병을 가져온다.
잘린 벌레는 쟁기를 용서한다.
물을 좋아하는 자는 강물 속에 묻어라.
바보가 보는 나무는 지혜로운 자가 보는 나무와 같지 않다.
얼굴에서 빛나지 않는 자는 별이 될 수 없다.
사랑에서의 영원함은 시간의 연장선에 있다.
바쁜 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어리석음의 시간은 시계로 헤아리지만 지혜의 시간을 잴 시계는 없다.
유익한 음식은 그물이나 덫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한 해 동안에의 숫자, 무게, 그리고 분량을 명백히 하라.
자기의 날개로 난다면야 어느 새에게 너무 높이 날아간다고 말하랴.
죽은 육신은 부상당한 것에 복수를 하지 않는다.
남을 나보다 앞세우는 것, 그것이 가장 고렬한 행위이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끝내 고집하면 지혜로워지리라.
어리석음은 사기의 망토이다.
부끄러움은 자만의 망토이다.
감옥은 법의 돌로, 매음굴은 종교의 벽돌로 세워진다.
공작새의 오만은 신의 영광이다.
연소의 욕정은 신의 풍성한 하사품이다.
사자의 분노는 신의 지혜이다.
여인의 알몸은 신의 작품이다.
사자의 울부짖음, 늑대의 울음, 폭풍우치는 바다의 아우성, 파괴적인 칼은 모두 영원의 일부로서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여우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덫을 나무란다.
기쁨은 스며들고 슬픔은 싹이 튼다.
남자에게는 사자의 가죽을, 여자에게는 양의 털을 입혀라.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사람에게는 우정
현재 증명되는 것은 한때는 오직 상상된 것이다.
들쥐, 시궁창 쥐, 여우, 토끼는 뿌리를 살펴보고, 사자, 호랑이, 말, 코끼리는 열매를 살핀다.
우물에서는 물이 고이고, 샘에서는 물이 넘쳐 흐른다.
생각 하나가 무한을 채운다.
늘 마음을 털어 놓아라. 그러면 비열한 인간은 너를 피하리라.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진리의 한 모습이다.
몸을 굽혀 까마귀에 관해 배우려는 독수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여우는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만 사자의 먹이는 신이 마련한다.
아침에 생각하고, 낮에 행동하고, 저녁에 먹고, 밤에 자라.
분노하는 호랑이가 훈계하는 말보다 슬기롭다.
고여있는 물에서는 독을 기대하리라.
지나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충분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불의 눈, 공기의 콧구멍, 물의 입, 흙의 수염
용기가 부족하면 간계가 능하다.
사과나무는 밤나무에게 자라는 법을 묻지 않는다. 사자도 말에게 먹이 잡는 법을 묻지 않는다.
감사하게 받는 자는 풍성한 수확을 얻는다.
흥겹게 기쁜 영혼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
독수리를 볼 때 당신은 한 천재를 보는 것이니 고개를 높이들라.
벌레는 가장 좋은 잎사귀에 알을 까고, 사제는 가장 좋은 기쁨에 저주를 내린다.
한 떨기 꽃을 창조함은 몇 세대의 노동이 걸린다.
새에게는 허공, 물고기에게는 바다, 경멸 받을 만한 자에게는 경멸.
까마귀는 삼라만상이 검기를 바라고, 올빼미는 삼라만상이 희기를 바란다.
넘쳐 흐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사자가 여우의 충고를 받으면 교활해지리라.
고쳐진 길은 똑바른 길이지만, 고치지 않은 굽이길은 천재의 길이다.
행하지 못할 욕망을 심어주기보다는 갓난아기를 요람에서 죽여버리는 편이 낫다.
인간이 없는 곳에서 자연은 불모지이다.
설명 듣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 설명 듣고 믿지 않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충분히! 아니면 너무 많이.
https://m.blog.naver.com/sunglilysky/30136962255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순수의 전조(前兆)’)! 스티브 잡스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다. 생각의 벽에 부딪쳤을 때 잡스는 블레이크 시를 읽곤 했다는데, ‘손바닥 안의 무한’이야말로 잡스가 꿈꾸었던 애플의 미래였을 것이다. 블레이크는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구나!/ 보이지 않는 벌레가/ 밤 속에/ 울부짖는 폭풍 속을 날아// 너의 침상에서/ 진홍빛 기쁨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이 어둡고 비밀스러운 사랑이/ 너의 생명을 망친다.”(‘병든 장미’)
라는 시로도 유명하다. 장미가 여성을 상징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지만, 블레이크에게 장미는 영국(영국 국화가 장미다.)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눈에 비친 18세기 말의 영국 사회는 ‘병든 장미’와 같았다. 창녀, 도박꾼, 병사, 어린 굴뚝 청소부 들의 신음 소리가 “늙은 영국의 수의(壽衣)를 짤 것이다”(‘순수의 전조(前兆)’)라는 시구절도 같은 맥락이다.
블레이크는 예언자-시인이었다. 그가 “바드(Bard)의 목소리를 들어라!/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보는 그/ 그의 귀는 들었다,/ 태고의 나무들 사이를 걸었던/ 신성한 말씀을.”([경험의 노래] 중 ‘서시’)이라고 노래할 때의 “바드”란 히브리 예언자의 전통과 권위를 지닌 시인을 뜻한다. 네 살 때 하나님이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거나, 열여덟 살 때 창 밖 나뭇가지 위에 천사들이 별빛을 받으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거나, 어른이 된 후에도 모세, 호머, 버질, 단테의 혼이 찾아와서 그들과 직접 대화를 했다는 따위의 일화는 블레이크의 비상(非常)함을 보여 주는 전조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바드로 여겼던 그는 과거와 현재로 대비되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순수와 경험, 영원한 세계와 타락한 세계를 꿰뚫는 ‘신성한 말씀(Holy Word)’을 듣고자 했으며 전하고자 했다. 그러한 예언자-시인의 시선으로 그는 당대 영국 사회의 어둠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지옥의 격언’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산문시로, 원래는 70개의 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구약의 ‘잠언’에 대한 악마판 잠언이라 할 수 있는바, ‘잠언’이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혜로운 자와 우매한 자를 대비하여 서술하였다면, ‘지옥의 격언’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악마적 지혜를 계시적으로 담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격언들은 70개의 격언 중 역자가 가려 뽑은 25개의 ‘초(抄)’에 해당한다.
“넘쳐흐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나 “충분히! 아니면 지나치게 많이!”와 같은 격언은 블레이크가 꿈꾸었던 아름다움이 넘침과 과잉과 무한에 있음을, 거기서 비롯되는 활력(에너지)과 환희(희열)에 있음을 시사한다. “과잉의 길은 지혜에 이른다.”, “충분한 것 이상을 알지 못하면 충분한 것을 알지 못한다.”, “달콤한 희열의 영혼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 등의 소개되지 않은 다른 격언들도 마찬가지다. “활력은 악이 아니라 영원한 환희”라는 블레이크의 선언은, ‘악이라 불리는 활력은 육체로부터 나온다.’라는 기독교적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다. 블레이크는 넘치는 활력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적 욕망의 에너지이자 영원한 환희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능동적인 악은 수동적인 선보다 더 낫다.”면서 “위대한 시는 부도덕한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거의 악마적일 정도로 사악하다.”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시란 능동적인 악과 부도덕한 활력에서 터져 나오는 지옥의 노래였던 것이다. ‘지옥의 격언’이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낙원의 비전을 담은 [순수의 노래]와, 전쟁과 혁명과 산업화로 얼룩진 타락한 현실을 담은 [경험의 노래]는, ‘인간 영혼의 상반된 두 상태’를 상징한다. 특히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으로 상징되는 상반된 상상력을 통합해, “모순이 없이는 발전이 없다.”라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변증법의 정신철학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 ‘결혼’의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동력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상력의 시인이다. “사람은 온통 상상력이다.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우리 안에 존재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존재한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 그는 ‘신성한 말씀’, 그리스도의 ‘신성한 몸’, ‘신성한 인간성’ 들이 모두 상상력 그 자체라 믿었다. '지옥의 격언' 중 하나인 “현재 증명되는 것은 한때는 오직 상상된 것이다.”라는 구절이 더욱 의미심장해지는 까닭이다.
블레이크는 상상력과 인식력이 갖춰졌을 때 인간은 경험의 세계(육체 혹은 물질의 우주)와 순수의 세계(영원 혹은 영혼의 우주)를 동시에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문맹의 아내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과 인쇄하는 법을 가르치며 살았고, 아이도 없이 평생 동안 신비한 시를 쓰고 신비한 그림(판화)을 그리며 살았다. 그런 그를 후대 사람들은 ‘상상력의 혁명가’, ‘천재 예술가’, ‘신비주의자’ ‘미치광이’로 불렀다. ‘도어즈(The Doors)’라는 1960년대의 록밴드 이름은 “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난다”([천국과 지옥의 결혼])라는 블레이크의 시구절에서 유래했다. 리드 싱어였던 짐 모리슨 또한 블레이크의 후예였던 것이다. 두 세기를 지난 지금까지도 반항과 부정과 저항, 상상력과 활력과 창조력, 신비와 형이상학과 과학과 예술의 황홀한 접점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윌리엄 블레이크’는 창조적 정신의 대부이자 영감의 뮤즈였다. “한 떨기 꽃을 창조함은 몇 세대의 노동이 걸린다.”라는 격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본다.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1.28~1827.8.12)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고 열다섯 살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어 고찰(古刹)의 조각이나 중세의 사본을 만들었다. 1783년 친구의 도움으로 [습작시집]을 출판했고 1784년 아버지가 죽은 후 판화 가게를 열었으며 채색 인쇄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비상한 환상력을 지녀 창가에서 천사와 이야기하거나 언덕 위에 올라 하늘을 만지는 등 신비로운 체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순수의 노래]에서 이러한 경험을 최초로 형상화했다.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고 이론을 벗어나 상상을 바탕으로 한 신비의 세계를 노래했다. 대표시집으로 [셀의 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 [경험의 노래], [밀턴] 등이 있다.
글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