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률님 추천]
지난 2021년 3월 27일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 의 산양 조선소에서 건조된 어선 성판(勝帆) 188호(700t 급)가 진수식에서 중심을 잃고 좌측으로 넘어져 침수되면서 표류 했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현장의 많은 시민은 "어어어~"소리를 외치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2020. 8. 14일 4,000t 의 원유를 실은 일본 쇼센미쓰이의 화물선 '와카시오 호' 는 중국에서 브라질로 향하던 중 모리셔스 남동쪽 산호초 바다에서 좌초됐다. 이 화물선에선 사고 이후 약 1천 t의 원유가 새어 나오며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모리셔스 바다를 오염 시켰다. 환경 전문가들은 피해 복원에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해운 쇼센 미쓰이와 모리셔스 정부는 두 동강 난 선박을 바다에 수장 시킬 계획이라고 하여 환경 단체와 격렬히 맞서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형 선박이 좌초되면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이렇게 두동강 나는 일은 드물다. 이 사고로 한때 세계 제 1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일본의 선박 제조 기술의 문제가 드러나 선박 수주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이래서 요사이 고급 선박 수주가 한국으로 대거 몰리고 있다. 이렇게 "한국 조선 공업의 아버지" 라 불리며 우리나라 조선(造船) 기술의 선구적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주)한국해사기술(KOMAC코막)의 신동식 (申東植) 회장이다.
그는 6.25전쟁 때 학도 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산으로 와 미국 군함이 싣고 온 군수 물자 구호 품을 체크하는 일은 한다. 그때 그는 거대한 수송함에서 쏟아지는 탱크와 군인들을 보고 멋진 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고 서울 공대 조선 공학과를 진학한다.
졸업 후 일자리가 없던 그는 세계 곳곳의 기업에 편지를 보내 자력으로 유럽 최고의 조선소인 스웨덴 코쿰의 설계부 엔지니어로 채용 된다. 그 이후 영국 로이드 런던 본부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낸 김유택 주영 대사가 5.16혁명 후 귀국해 경제 기획원 장관이던 시절 그를 당시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에게 얘기한다.
당시 일본 로이드로 파견 나온 그를 박의장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 토쿄 에서 만나 그는 박 의장의 부름으로 로이드를 휴직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김유택 장관의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해사(海事)분야를 맡으며 조선, 해운, 수산, 항만 분야를 포괄하는 해사 산업 전반에 대한 기획을 한다. 또한 그는 조선에 대한 견해를 넓히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ABS선급 협회 뉴욕 본부에서 일하게 된다.
1965년 죤슨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호텔로 불러 "대한민국의 조선 공업을 살리시오~! 우리나라는 삼면 이 바다 잖소~!" 라고 해 그 자리에서 "실패하는 일 없도록하겠습니다~" 라고 답하며 죤슨 대통령이 내준 전용기를 함께 타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그는 초대 대통령 경제 수석 비서관 해사 행정 특별 심의 위원회 위원 등을 거치며 제철, 조선, 석유화학, 기계, 전자, 과학, 기술 분야의 중장기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1965년의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감은 없고 거지와 깡패들만 득실거렸고 방직 공장이나 수산물 같은 걸로는 나라가 될 것 같지 않아 제조업, 그중 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조선 공업은 자동차 공업과 마찬가지로 엔지니어링, 철강, 전자 산업 간의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중요한 산업입니다." "우리나라 고급 산업을 일으키는 기관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앞으로 세계 조선 공업이 이렇게 변할 것이고 한국 조선 공업은 어떤 역할을 하고 이런 경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고 브리핑 하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자고 제안했다. 양철 조각도 못 만드는 데 무슨 배를 만드느냐며 최고 회의 군인들과 경제 전문가 들은 한결같이 반대하며 미친 짓 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기 질투 모함 속에서도 선각자인 박 대통령의 절대적 지지 하에 정책에 대한 견해와 함께 1965년 한국 조선 공업 중장기 발전 계획 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다들 말도 안된다고 했지만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박 대통령이 나를 믿고 밀어줬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늘 나라를 걱정했어요~"
1967년 대만이 세계은행(IBRD)협력 자금으로 참치어선 20척을 국제 입찰 한다는 기사를 본 그는 불가능한 입찰에 성공하며 7억 불의 수출을 달성한다. 그는 오늘날 우리나라 조선 산업이 세계 최고가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원대한 海洋立國의 꿈을 바탕으로 제가 조선 심포니를 작곡하고 남궁련 정주영 이병철 회장이라는 단원이 각자의 파트를 열심히 연주한 결과지요" 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각자적 결과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대한민국을 세계속에 부국강병으로 만들었고 그 속에서 신동식회장은 그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지금도 성군 박정희를 끝없이 지울려는 세력들 속에서도 우리들은 그분의 선각자 적 조국애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조국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 분들도 당신들이 말하는 꼰대들이다.
1971년 공직에서 물러난 신동식 회장은 여러 대기업과 공공 기관에서 러브콜이 있었지만 편한 길 대신 10평 남짓 한 사무실에서 그 당시 경영난을 겪고 있던 KOMAC을 인수했다.
KOMAC은 쇄빙선, 심해 탐사선, 핵폐기물 운반선, 친 환경 선박 등 2124종을 설계하며 감리를 맡은 배도 2000여 척에 이른다.
"우리 회사가(150여명) 크진 않지만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전 세계에서 설계를 가장 많이 합니다. 하나에 10억 여원 씩 하는 복잡하고 세련된 소프트웨어 수십 종을 활용해 고급 스런 설계를 하는 거죠~"
20 여 년 전 중국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조선 사업을 한국처럼 발전시키고 싶다며 조언을 요청해와 지금도 교류가 있어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신 회장은 모든 걸 우리가 다 할 수는 없다며 유조선이나 석탄 운반선은 중국이 만들고 가스 운반선 같은 최첨단 기술과 함께 부가가치가 높은 배를 만들면 된다고 하며 우리는 더 고급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조선 국가로 현재 바다에 떠다니는 5 만톤 급 이상 선박의 85%가 made in Korea 이다.
그 중심에 신동식(申東植) 회장 같은 분이 있었다. 그는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 때 책상에서 자로 직접 도로 구간을 그었다. 그러나 신 회장은 고속도로 부근의 땅이나 조선소 주변의 땅을 한 평도 사지 않았다. 그는 박 대통령 밑에서는 상상도 못했다며 최근 LH 땅 투기 사건을 개탄 했다.
신 회장은 九旬인데도 아직 청춘이다. 청춘은 인생의 시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생각 이란다. "우리의 생각이 사막처럼 변했을 때가 비로소 늙은 것이다. 열정을 포기하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는 시 한 구절을 신 회장에게서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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