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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세상 전문위원이신 정선스님의 전시소식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서예세상 카페지기이신 삼도헌 정태수교수님께서 쓰신 평문입니다.
평론 ...........................정태수.(계명대학 전,서예전담교수,한국서예사 연구소장)
예도합일(藝道合一)과 선묵일여(禪墨一如)의 미학적 승화
정선(定禪) 박용국(朴鏞國) 스님의 삶과 문인화 세계
Ⅰ. 선묵일여(禪墨一如)의 경지를 향한 수행과 예술
남종화의 창시자이자 ‘시불(詩佛)’로 칭송받은 왕유(王維), 독보적인 서화 세계를 구축한 팔대산인(八大山人), 그리고 ‘일획론(一畫論)’으로 고유한 예술사상을 펼친 석도(石濤)는 모두 남종선(南宗禪)의 정신을 예술로 실천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선(禪)과 예술을 별개로 보지 않고, 수행과 창작을 하나의 정신적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수행과 예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 선(禪)과 묵(墨)이 하나인 ‘선묵일여(禪墨一如)’, 서화(書畫)와 선(禪)이 다름없음을 일깨우는 ‘서화여선(書畫如禪)’의 경지를 펼쳐 보이는 작가가 있다. 바로 한국 문인화단에서 선묵(禪墨)의 독자적 미학을 구축해 가고 있는 정선(定禪) 박용국(朴鏞國) 스님이다.
스님에게 삶은 곧 수행이었고, 수행은 다시 작품으로 발현되었다. 붓을 잡는 일은 단순한 조형 행위가 아니라 수행의 연장이었으며, 완성된 작품은 그가 걸어온 선의 궤적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수행이었다. 따라서 스님의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걸어온 삶과 수행의 궤적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1. 수행의 길에서 선묵의 길로
정선 스님은 경남 밀양에서 부친 박문기(朴文基) 공과 모친 손옥순(孫玉順) 여사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육자였던 부친의 훈도 아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초등학교 5학년이던 열두 살 때 모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깊은 상실감을 안게 되었다. 이후 부친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나, 사춘기에 접어들며 가정과 학교에서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8년 여름, 친구의 권유로 학업에 전념하고자 해인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컸으나 산사의 고요한 일상은 그의 마음을 잡아끌었고, 결국 행자방(行者房)에 입방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길과 첫 인연을 맺었다.
행자 시절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익히고 사찰 예법, 경전 습득, 울력, 참선 등을 익혔다. 자자(自恣)와 포살(布薩)을 통해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보고 참회하는 수행의 본질도 체득하였다. 홍류동 계곡이 감싸 안은 해인사에서의 혹독한 행자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이 시기는 훗날 삶 전체를 관통하는 수행의 단단한 씨앗이 되었다.
큰스님의 권유로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하산한 뒤에도 해인사의 잔상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새벽 예불의 목탁 소리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사물(四物) 소리, 반야심경 독송으로 이어지던 사찰의 일상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몸은 산사를 떠났으나 마음은 이미 출가자의 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불교 서적을 찾아 읽으며 인간의 근원적 의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그를 사로잡았다. 답을 얻고자 가까운 사찰부터 찾아다니며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만행(萬行)의 길에 나섰다.
표충사에서 한 수좌 스님에게 “극락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출가하여 아미타불을 만나면 극락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는 답은 깊은 울림이자 화두가 되었다. 오랜 고심 끝에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인 2월 8일 출가를 결심하였고, 전국의 사찰과 선지식을 찾아 본격적인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범어사에서 고암(古巖) 큰스님을 만나 그 문하에서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1986년 조계종 전계사 자운 대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1988년 비구계를 수지하며 정식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고암 스님은 어린 제자에게 “금가루가 아무리 귀해도 사람 눈에 들어가면 독이 된다”는 가르침을 내렸다. 외형과 세속적 가치에 현혹되지 말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당부였다. 수행의 본질을 향하도록 안목을 열어준 가르침이었다.
은법사(恩法師) 고암 스님은 제자에게 ‘정선(定禪)’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정선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의 상태로, 일심(一心)의 바탕에서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신적 토대다. 훗날 작가로서 사용하는 법명 ‘정선(定禪)’은 이 ‘선정’의 앞뒤 글자를 바꾼 것으로, ‘정(定)’의 고요함과 ‘선(禪)’의 깊은 깨달음을 통섭한 이름이다.
고암 스님의 권유로 행자 시절을 보낸 해인사 백련암을 다시 찾아 성철(性徹) 큰스님을 친견하였다. 성철 스님이 “어디서 온 누구냐?”라고 묻자 “용탑선원에서 온 고암 스님의 막내 제자 정선입니다”라고 답했다. 성철 스님은 손바닥을 치며 큰 소리로 일갈했다.
“지금 내가 수좌의 자금강(紫金剛)을 빛나게 하였도다.”
이 한마디는 수행자의 본래면목을 일깨우는 선문답 같은 기봉(機鋒)이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스님은 ‘의단(疑端)’을 품고 화두와 씨름하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의심을 품고 답을 찾아가는 치열한 용맹정진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범어사 강주 백원 대강백과 대강주 효원 도형 큰스님 등에게 치문 · 사교 · 화엄 · 법화경 등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학하고, 범어 승가대학과 제방선원을 오가며 교학과 참선을 겸수하였다. 이처럼 수행과 교학을 아우르며 출가 당시의 초발심을 다졌다.
1997년에는 고암 대종사의 뜻을 받들어 포교의 길에 나섰다. 대구 상인동에 성취선원(成就禪院)을 창건하고 불교대학과 성취자비회, 무료공양소, 성취장학회 등을 운영하며 포교와 사회 봉사에 힘썼다. 2000년 해인사 도솔암 창건, 2001년 해인사 용탑선원 원주(주지)를 거쳐, 2002년 대구 용계동에 도솔암 포교원을 열고 불교대학, 다도교실, 서예교실 등을 운영하며 대중 포교를 이어갔다.
2011년부터는 대구 수성구 만촌동의 사자굴길상사(獅子窟吉祥寺)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수행과 포교, 그리고 선묵 예술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2. 수행에서 예술로, 선묵의 세계를 열다
용맹정진을 거듭하던 어느 날, 산중 암자를 찾았다가 우연히 한 폭의 사군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 학창 시절 서화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던 기억과 함께, 큰스님 곁에서 먹을 갈며 먹향에 젖어 들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출가 이후 세속의 흔적이라 여겨 멀리하려 했던 지필묵이 다시 그 앞에 놓인 것이다. 그때 고려 말 대선사 나옹 혜근(懶翁慧勤)의 오도송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개 짖는 소리와 나귀 우는 소리에도 모두 도가 있네.”
깨달음은 저 높은 곳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현상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길가의 돌멩이 하나, 뜰 앞의 매화 한 송이, 미물(微物)의 울림조차 진리의 법문으로 다가온다. 물심불이(物心不二)와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세계가 다름 아닌 일상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 순간 스님은 서화 역시 수행과 결코 다른 길이 아님을 직관했다. 붓과 먹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수행의 경지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평소 그의 서화적 소양을 알아본 고암 큰스님도 서화 공부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마침 부산 범어사 인근에서 서화를 지도하던 양시우 선생을 소개받으며 본격적인 서화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수행과 포교를 병행하면서 서화를 공부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국내외 명가들의 고전 법첩과 화집을 구해 임모하고, 서실을 오가며 붓을 놓지 않았다. 전국의 명가들을 찾아가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필묵세계를 꾸준히 다듬어갔다. 그의 문인화에는 정판교(鄭板橋), 양시우, 서근섭 선생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아가 문인화 공부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자 동서양 화가들을 독선생으로 초빙하여 깊이 연찬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작품에는 동서양 회화풍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어색함 없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서예에서는 다양한 법첩을 두루 섭렵한 바탕 위에 황정견(黃庭堅), 왕탁(王鐸), 이돈흥 선생의 필의가 깊이 녹아 있다. 특히 다른 서체에 비해 행초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화제로 사용하는 행초서는 여느 서예가 못지않게 활발하고 경쾌하며 독특한 개성미를 보여준다. 운필의 속도(遲速)와 굵기(太細), 먹의 메마름과 촉촉함(潤渴), 그리고 농담(濃淡)의 조화가 자유자재롭다. 나아가 결구와 장법에서 소쇄(瀟灑)한 서미(書美)를 갖추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은 단순한 모방에 머물지 않고, 오랜 수행과 결합하며 정선 스님 특유의 독자적인 선묵세계로 변모하였다.
문인화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해 온 스님은 대구경북서예가협회·죽농서단 공로상, 대구미술인상, 한국미협 이사장상, 국제미술대전 최우수작가상, 대구미협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대구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다수 미술단체의 심사 및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1997년 성취선원 개관전을 시작으로 12 여 차례의 기획 . 전시 초대 . 개인전을 열며 필묵의 지평을 넓혀왔다.
또한 만촌.범물,고산,청소년 수련원,한국 마사회,대구 교육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열정을 태우고 사찰에서 문하생을 지도하고 있다.
초기에는 문인화 중심의 화풍을 구축하였고, 최근에는 서예에서도 한층 깊어진 선적(禪的) 조형성을 선보이고 있다.
스님의 작품세계에서 핵심은 기교의 과시가 아닌 마음의 상태다. 당호인 ‘심허당(心虛堂)’이 보여주듯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운 상태에서 붓을 들며, 무념 · 무상 · 무아의 경지를 향해 필묵을 운용한다. 수십 폭의 작품이 걸린 작업실에는 수많은 파지와 퇴필이 쌓여 있다. 젊은 시절 목탁을 잡았던 손에는 이제 붓이 들려 있고, 그 붓끝에는 수행으로 다져온 정신과 경륜이 결집한다.
정선 스님에게 서화는 수행과 분리된 별개의 예술이 아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운필은 자연스러워지고, 붓 끝에 남은 흔적은 다시 수행의 깊이를 증명한다. 선(禪)과 묵(墨), 수행과 예술이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 펼쳐갈 작품세계는 여전히 열려 있다. 오랜 수행의 길 위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정진하며 붓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그의 선묵은 이미 수행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고 있다. 목탁에서 붓으로 이어진 그의 손끝이 향후 어떠한 필묵의 경지를 열어갈지, 그 여정 자체가 곧 치열한 수행이자 고결한 예술이다.
Ⅱ. 예도합일(藝道合一),
선화일치(禪畵一致)의 미학세계
동아시아 전통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 · 서 · 화(詩·書·畵)의 일치, 나아가 시 · 서 · 화 · 선(詩·書·畵·禪)의 일치다. 북송(北宋) 이후 본격화되어 원대(元代) 문인화의 성행과 함께 전통 예술론의 핵심 줄기로 자리 잡은 이 예술관은, 사물의 외형적 재현보다 작가의 내면에 내재된 정신의 표출, 즉 사의(寫意)를 중시하며 예술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정신적 합일을 추구하였다.
선(禪)은 이러한 동아시아 예술정신을 이해하는 핵심 사상적 기반이다. 범어 ‘선나(禪那, Dhyāna)’의 음역인 선은 마음의 산란함을 가라앉히는 정려(靜慮)이자 생각으로 마음을 닦는 사유수(思惟修)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형식이나 지식의 습득을 넘어 마음의 산란을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본성과 사물의 근본 이치를 깨닫는 수행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선은 혜능(慧能)에 이르러 정(定)과 혜(慧)가 둘이 아니라는 정혜불이(定慧不二)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하였다. 문자나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성불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교외에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등 선가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내면의 본성을 깨달아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것을 지향하였고, 이는 회화 예술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선의 직관적이고 무형식적인 태도는 수묵화와 문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선화(禪畵)는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간결한 형상 속에 사물의 본질과 작가의 정신을 담아낸다. 선과 여백, 먹의 농담을 통해 ‘공(空)’과 ‘허(虛)’의 미학을 구현하며, 대상의 세부를 덜어내어 본질을 드러내는 감필법(減筆法)과 순간적인 정신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발묵법(潑墨法)은 이러한 선적 미학의 대표적 표현 양식이다. 목계(牧谿)를 비롯하여 석도(石濤), 팔대산인(八大山人) 등은 이러한 선적 미학을 자신만의 창작 세계로 승화시킨 대표적 선화가(禪畫家)들이다.
이러한 예술정신은 동아시아 전통 미학인 ‘예도합일(藝道合一)’과 깊이 통한다. 전통 미학에서 예술은 단순한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도(道)’가 미적으로 발현된 형태다. 예술가는 대상을 단순 묘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과 이치를 체득하고 자신의 심성을 다듬어 이를 필묵으로 구현하는 존재다. ‘의재언외(意在言外)’, ‘심물교융(心物交融)’, ‘천인합일(天人合一)’ 등의 미학 개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된다.
선가의 예술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가가 예술을 통해 도를 실어 나른다는 ‘예이재도(藝以載道)’의 관점을 강조했다면, 선가에서는 예술과 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도를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이 아니라, 무심(無心)의 필묵 행위 그 자체에서 도가 곧바로 발현된다고 본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관점에서는 붓을 잡고 먹을 쓰는 일상의 행위조차 수행의 연장이며, 깨달음의 순간은 곧 자발적인 예술적 표출로 이어진다. 따라서 선서화(禪書畵)의 본질은 정교한 기교가 아닌, 기교를 초월한 무심의 마음 상태에 있다. ‘묵희(墨戱)’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정신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선의 정신은 동아시아 회화의 사의(寫意) 전통과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고개지(顧愷之)의 ‘이형사신(以形寫神)’, 사혁(謝赫)의 ‘기운생동(氣韻生動)’, 왕희지(王羲之)의 ‘의재필선(意在筆先)’ 등은 외형적 묘사를 넘어 고유한 정신과 생명력을 표출해 온 동아시아 예술의 오랜 전통을 증명한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본질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드러내야 한다는 사의정신은 문인화와 수묵화, 선화의 확고한 미학적 토대가 되었다.
결국 시 · 서 · 화 · 선의 일치는 이종(異種)의 장르를 단순 합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예술과 인간의 정신, 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근원에서 바라보는 동아시아 특유의 통합적 예술관이다. 예술가가 자연을 관조하고 마음을 닦아 얻은 깨달음이 필묵으로 표출될 때, 예술은 도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도를 체득한 정신 스스로의 구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예도합일과 선화일치가 접목하는 본질적 지점이다.
바로 이러한 미학적 지평 위에서 정선 스님의 창작세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선 스님의 작품은 전통 필묵 기법의 성실한 계승에 머물지 않고, 오랫동안 축적된 선적 정신과 문인화의 사의정신을 고유한 조형 언어로 재해석해 낸다. 송대 이후 명가들의 필법과 묵법을 철저히 다진 바탕 위에 주변의 자연과 내면의 심상을 독창적인 조형 형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스님의 끊임없는 실험과 실천은 이 예술정신의 현장성을 보여준다. 단순한 기법 연마에 그치지 않고 기예를 통해 마음을 닦으며, 그 마음에 맺힌 심상을 다시 필묵으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정선 스님의 예술에서 '예(藝)'와 '도(道)'는 분리된 두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창작 과정 속에서 기예가 도의 경지로 승화하는 '예도합일(藝道合一)'의 실천이다.
스님이 구축한 선화적(禪畵的) 세계 역시 동일한 맥락이다. 절제된 선과 대담한 여백, 먹의 조화로운 변화, 대상의 과감한 단순화와 생략은 형태를 축소하는 대신 그 안에 내재된 본질적 정신을 드러내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그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덜어낸 여백 속에서 본래의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는가에 있다. 이러한 무심(無心)의 필묵과 직관적 조형 언어 속에서 예술과 수행, 형식과 정신은 하나로 응축된다.
정선 스님의 창작 세계에서 구현되는 예도합일과 선화일치는 '기예를 초월하여 정신에 도달하는 예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도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도를 체득한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울림이며, 필묵은 그 마음을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매개다. 스님의 예술 작업은 전통의 습관적 재현을 넘어, 예(藝)와 도(道)가 하나로 만나는 접점을 오늘의 필묵으로 탐구해 나가는 끊임없는 수행이자 실천이다.
Ⅲ. 일필(逸筆), 담(淡), 소박(素朴)으로
발현된 조형언어
옛사람들은 문인화를 ‘심화(心畫)’라 불렀다. 문인화는 대상의 재현보다 내면의 표출에 무게를 둔다. 외물이 작가의 내면에 녹아들어 물아일체(物我一體)에 이르고, 이를 필묵으로 드러내는 과정과 결과가 곧 문인화다. 따라서 문인화는 직관이나 원초적 무의식처럼 가시화하기 어렵고 언어화할 수 없는 세계를 필획이라는 조형언어로 구현하는 예술이다.
정선 스님의 화면 한쪽은 활달한 행초서로 채워진다. 화제(畫題)는 그림을 설명 · 보완하며 시 · 서· 화 를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낸다. 스님이 화면에 불러들인 도상은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자신의 심경과 철학적 사유를 정화하여 드러내는 매개다. 이러한 정선 스님의 문인화 표현에는 크게 세 가지 조형적 특징이 발현된다. 바로 일필(逸筆)의 발묵(潑墨), 담(淡), 소박(素朴)이다.
1. 逸筆의 潑墨
‘일(逸)’은 위진시대 세속을 초월한 인물을 품평하던 개념에서 출발했다. 본래 ‘달아나다’라는 뜻이었으나 당대(唐代) 이후 무리 중 뛰어난 재능과 기질을 뜻하는 의미로 확장되었으며, 회화에서는 기교를 넘어 작가의 고유한 정신과 개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혁(謝赫)의 『고화품록』이 ‘형(形)’을 통해 ‘신(神)’을 드러내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을 강조했다면, ‘일(逸)’에 기반한 품평은 대상의 외부에서 내면으로, 형상에서 정신으로 미학적 관심을 옮겨갔다. 이는 개인의 개성과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당나라 주경현(朱景玄)이 회화의 품격을 신(神)·묘(妙)·능(能)으로 나누며 그 외에 ‘일품(逸品)’을 두었고, 송대 황휴복(黃休復)이 『익주명화록』에서 ‘일격(逸格)’을 제창하면서 일품은 문인화의 핵심 미학으로 안착했다. 이는 송대 소식(蘇軾) · 문동(文同)·이공린(李公麟)의 문인화론을 거쳐 원대 문인화로 이어지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문인이 창작의 주체가 되면서 회화는 객관적 묘사에서 주관적 정신의 표현인 사의(寫意)의 길로 나아갔다. 북송의 소식은 회화가 단지 외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기(意氣)’를 드러내는 예술이라 보았다. 그는 소산담박(疏散淡泊), 간화정원(閑和靜遠)의 경지를 추구하며, ‘일’의 의미를 자유분방한 횡일(橫逸)에서 평원(平遠)·간담(簡淡)·유미(幽微)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이로써 회화는 운외지치(韻外之致), 경외지경(境外之境)처럼 형상 너머의 정신적 경계를 지향하게 되었고, 시 · 서 · 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서화일치(書畫一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선 스님의 일기(逸氣) 미학은 선(禪)의 고요한 자성(自性)과 묘도(妙道)에 뿌리를 둔다. 전통 미학의 수용 위에 구축된 스님의 일기(逸氣)는 ‘일필초초(逸筆草草)’의 필법과 ‘요이자오(聊以自娛, 스스로 즐김)’의 심미적 자유로 나타난다. 여기서 자오란 정교한 기교나 대상의 아름다움에 매이지 않고 마음의 자유와 묘도(妙道)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불구형사(不拘形似)의 태도다. 스님은 가슴속 우주를 펼쳐 보이듯, 형상을 넘어선 상외지의(象外之意)의 무한성을 화면에 담아낸다.
작품양식을 시기별로 가름해보면, 초기는 맑고 쓸쓸한 일기가 충담소산(冲淡蕭散)의 미로 표출된다. 중기는 선사상이 심화되며 단순한 구도로 평담유원(平淡幽遠)한 경지를 이룬다. 최근에는 공령(空靈)·정냉(淨冷)·질박의 미가 두드러지며, 화면 속 빈 공간을 통해 적막냉정(寂寞冷靜)의 고요한 미학을 극대화한다. 이제 파란만장한 고난을 넘어 비성비범(非聖非凡)의 경지에 이른 스님은 공(空)의 깨달음을 시 · 서 · 화의 융합으로 풀어내고 있다. 예컨대 <난초도>는 힘차게 솟구친 난잎과 여백의 대비를 통해 추상성과 가시적 기운을 동시 구현한다. 양강(陽剛)의 필력으로 써 내려간 행초서 화제는 화면에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더하며 서화일치의 높은 품격을 완성한다.
스님의 행초서 대작 병풍인 <귀거래사>와 <적벽부>를 마주하면, 글자마다 심신이 녹아들어 행필이 유창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평정(平正: 평평하고 반듯함)을 추구하는 경지를 넘어, 험절(險絶)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탐구가 돋보인다.
그의 필봉은 선인들의 법첩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여 정미(精微)함을 얻었으며, 수많은 임서를 통해 뼈대 있는 골기(骨氣)를 체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휘호한 획은 굳세고 힘차며(遒勁), 먹은 초목에 이슬이 내린 듯 촉촉하고 윤택하여 저절로 눈길을 붙든다.
장봉과 편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방필(方筆)과 원필(圓筆)이 조화롭게 교차하고, 느림과 빠름의 완급 조절 속에서 붓끝(毫端)의 변화가 천변만화한다. 종이 위에서 감각에 따라 피어나는 감정이 붓과 일체화되어, 손과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예의 법도마저 잊은 듯한 무아지경의 경지를 보여준다. 즉, 굳세고 신속한 운필의 연단을 거쳐 초탈하고 표일(飄逸)한 행초서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탄탄한 규범 위에 고원(高遠)한 풍격을 드리우며 독자적인 일기(逸氣)의 서예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2. 담(淡)으로 드러난 정선 스님의 조형사유
문인화에서 ‘의(意)’는 ‘담(淡)’이라는 철학적 사유와 깊이 연결된다. 북송 소식의 사대부화(士大夫畫)에서 출발해 명대 동기창(董其昌)에 이르러 구체화된 문인화는 유·도·선 사상이 통섭된 동아시아적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 경계를 관통하는 미학적 정수가 바로 ‘담’이다.
‘담’은 인위적인 욕망과 선입견을 비워내고 대상과 주체가 하나로 융합할 때 드러나는 경지다. 정선 스님의 ‘담’ 사유는 선가(禪家)의 <십우도(十牛圖)> 중 돈오(頓悟)의 단계와 궤를 같이한다. 남아있는 집착마저 비워내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돈오의 순간, 모든 가식과 과장이 덜어진 ‘담’의 미가 발현된다.
스님의 작업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본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의 산물이다. 공자의 중용(中庸),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공적(空寂)이 상통하는 지점에서 스님의 조형사유가 완성된다.
<연화도>는 힘이 있으면서도 과하지 않은 양강의 붓질과 절제된 먹의 농담으로 담(淡)의 묘경을 보여준다. 가섭의 염화미소(拈花微笑)처럼, 세부 묘사를 생략한 여백과 농담의 차이는 불이(不二)의 세계를 상징한다. 미와 추, 색과 공, 너와 나의 이원적 분별을 넘어선 유마거사의 침묵처럼, 화면의 절제와 여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별을 내려놓고 침묵 속의 거대한 미학에 이르게 한다.
3. 천인묘합의 소박미
소박(素朴)에서 ‘소(素)’는 염색하지 않은 명주실처럼 근본과 본바탕을 뜻하고, ‘박(樸)’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본질을 의미한다. 한국 미학에서 소박미는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천인묘합(天人妙合)과 접화군생(接和群生)의 풍류를 전제로 한다. 문인화의 소박미는 기교의 우열을 넘어 내면의 기운을 포착하는 ‘신사(神寫)’에서 비롯된다. 이는 세속의 집착을 비우고 무위의 마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선종(禪宗)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스님의 작품 <매화도>는 대상의 외형이 아닌, 추위를 견디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의 강인한 성정과 지조를 담아낸다. 여백과 어우러진 곧은 가지와 듬성한 꽃봉오리는 작가가 대상과 완전히 몰입하여 일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풍죽도(風竹圖)> 역시 스님 자신이 대나무가 된 듯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와 잎의 파동을 실감 나게 포착한다. 농묵의 전경과 담묵의 후경이 이루는 대기감, 화면을 관통하는 바람의 소리는 먹의 농담만으로 시각화된다. 텅 빈 대나무 마디처럼 내면을 비워 세상의 고난을 인내하는 스님의 기개가 깃든 이 작품은, 자신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천인묘합과 소박미의 정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Ⅳ. 수행의 필묵으로 여는 무한의 지평
정선 박용국 스님의 예술 세계는 기술적 기교나 양식적 모방을 넘어, 한 수행자의 치열한 삶과 자성(自性)의 깨달음이 필묵으로 정화되어 나타난 결정체다.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걸어온 삶의 궤적을 토대로, 동아시아 전통 미술론의 핵심인 예도합일(藝道合一)과 선화일치(禪畵一致)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생생히 부활시켰다.
화면 위에서 발현되는 일필(逸筆)의 자유로움, 절제된 먹빛 속에서 울려 퍼지는 담(淡)의 묘경,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소박(素朴)의 미학은 결코 관념적인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형상 너머의 정신을 포착하려는 ‘상외지의(象外之意)’의 추구이자, 자신과 대상을 분리하지 않는 ‘천인묘합(天人妙合)’의 실천이다.
서예는 탄탄한 기초와 필력을 갖추어 필법과 묵법이 예사롭지 않고, 결구와 포치는 평정을 넘어 험절을 지향하고 있다. 오랜 세월 치열한 연찬을 거쳐 도달한 초탈하고 표일한 필치로 스님만의 고원하고 독보적인 행초서 세계를 완성해 가고 있다.
젊은 시절 목탁을 잡았던 손에 붓이 들린 이래, 스님에게 지필묵은 세속의 유희가 아니라 내면의 번뇌를 비우고 본래면목을 드러내는 직관적인 수행 도구였다. 붓끝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기운생동은 텅 빈 여백과 상응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분별심을 내려놓고 고요한 성찰의 세계로 들어서게 만든다.
결국 정선 스님이 개척해 가는 선묵(禪墨)의 경지는 과거의 전통을 성실히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행과 예술이 하나로 융합하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다. 붓을 놓지 않는 치열한 정진 속에서 이어지는 스님의 필묵 여정은 현대 문인화단에 정신성의 회복을 일깨우는 하나의 선문답(禪問答)이자, 수행과 예술이 하나 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술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2026. 9.
仲秋節, 日損齋에서
鄭泰洙(韓國書藝史硏究所長.啓明大學校 書藝全擔敎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