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로 '믿는다'는 ‘피스튜오’다. 이 동사는 여격지배동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동사다. 목적어를 취하지 않고 여격 형태의 명사를 취한다는 의미다. 이의 영향을 받아 영어에서도 'belive'라는 동사는 직접 목적어를 취하지 않고 전치사 ‘in'을 동반한다. ’예수를 믿으라‘는 영어문장은 'belive Jesus'가 아니라 ’belive in Jesus"다. 우리 문장은 '예수를 믿는다' 혹은 '예수를 믿으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서양 언어에서 '믿는다'는 단어는 목적어를 그냥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격지배동사의 영향이다. 헬라어에서 명사는 격어미 변화를 통해 그 의미를 명확히 한다. 주어로 쓰이는 단어는 주격, 소유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 속격, 문장에서 목적어로 쓰이면 목적격, 여격으로 쓰이면 여격이라는 분명한 격을 나타내주는 어미변화가 있다는 말이다. '믿는다'는 동사는 목적어를 직접 취하지 않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동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여격이란 체언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는 자리에 서게하며 동작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게 사전적 의미다. ‘~에게, ~한테’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언어 방식으로 하면 ‘예수에게서 믿는다’는 말이다. 즉 ‘예수 안에서 믿는다’는 의미겠다. 하여 in Jesus 라 한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를 대상화하여 믿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게 어떤 뜻일까? 예수의 믿음 안에서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의 믿음이 무엇이었을까를 질문하는 게 우선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도행전 16장 31절의 헬라어 문장은 ‘피스튜손 에피 톤 큐리온 예순 카이 쏘데세 수 카이 호 오이코스 수’이다. 여기서 '피스테오'의 명령형인 '피스튜손(믿으라)'이 등장하고 '에피'라는 전치사가 나온다. '에피'라는 전치사는 명사와 결합해서 부사구 혹은 형용사구를 형성한다. 전치사의 영향을 받아 명사는 격변화를 하는데, 에피라는 전치사는 세 가지의 격변화를 지배한다. 위 문장에서는 ‘톤 큐리온 예순(목적격, 주 예수)’이 에피라는 전치사의 영향을 받아 목적격을 취하고 있고, 문장에서는 부사구 역할을 한다. 한글성경은 목적어로 번역해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대개 피스튜오는 여격을 취하거나 에이스(into)라는 전치사와 함께 명사를 수반하는 게 특성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에피 전치사와 “큐리온 예순‘ 목적격이 결합되고 있고 동사의 목적어가 아니라 도리어 부사구를 이룬다. 명백히 주 예수를 토대로 해서 믿음을 갖으라는 의미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 예수의 토대 위에서 믿으라는 의미가 맞다. 반석위에 집(오이키안)을 지으라고 할 때도 ‘에피 텐 페트란(반석, 목적격)이다.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둔다고 할 때에도 에피 전치사는 목적격을 취한다.(에피는 속격도 혹은 여격도 취하는 독특한 전치사임) '에피 텐 룩크니안'. 이 때 목적어로 해석해서 '반석을 집짓는다'든가 '등경을 둔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반석위에가 맞고 등경위에가 맞듯, 주 예수(반석과 등경)의 토대위에서 믿으라는 뜻이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믿음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소중한 무엇이다. 예수와 동일한 믿음이 찾아와야 하고 그럴 때 그는 우리의 주(Lord)가 된다. 피스튜오(믿는다)의 명사형이 믿음(피스티스)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번역된 성서의 많은 문장들은 대개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다. 로마서 3:22절에서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다. 성서학자들은 소유격을 목적의 의미가 있는 목적속격이라는 문법을 만들어 목적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들을 펼치지만, 그것은 참뜻을 곡해하는 주장들이다. 명백한 오역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믿음이 창조하고 이루어내는 세계에 동참하려면 곧 예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그의 믿음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예수는 비로소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Lord)가 된다. 해서 믿음은 선물이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반석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듯, 주 예수의 토대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고 거기 거하는 모든 세계가 구원이 이루어진다. 집(헬라어로 오이코스, 히브리어로는 베이트)이란 장막집, 떡집(베드레헴), 하나님의 집이 예루살렘 성전이듯, 육신의 집을 일컫는 게 아니다. 곧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일컬어 집이라 한다. 예수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했는데, 아버지 집이 나의 집이 아닌가. 이 곳이 나의 집이 되는 것. 예수의 토대위에 믿음이 싹틀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수동태)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비로소 고토가 회복된다는 의미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오고 잃었던 땅과 집을 다시 되찾게 된다는 게 바울과 실라가 갇혀있던 감옥의 간수 이야기 주제다.
집이 구원된다는 의미는 복마전이 성전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도적놈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예언. 그러나 삼일만에 다시 세우는 것을 통해 그 집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첫댓글 [피스튜오]가 여러 전치사들을 받음으로써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3:22절에서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가'가 아니다.// kjv "by faith of Jesus Christ " 맞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사도행전16장31절의 말씀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음
"사도행전16장31절의 말씀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음"-쉽게 동의할 수 없으시겠지만,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지 치열하게 살펴보실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좀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예수인줄 알고 있던 저에게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과 구원의 참 뜻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가슴 두근거리게 느껴지네요.. 또다른 말씀을 청해도 될런지요..
막 11:22ff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의 문장조차도 "에케테 피스틴 데우"로 "하나님의 믿음을 갖으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로 뜻을 변개시키고 있습니다. KJV조차도 Have faith in God으로 오역합니다. Have faith of God이 본래의 뜻이고, 그렇게 번역하는 영역성경들이 있습니다. YLT, BBE,DOUAY 등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무엇일까 묻고 또 묻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예수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을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꿔 번역할 수밖에 없는 신학의 빈곤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이 때의 피스티스는 성실 혹은 신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갈렙 하나님의 믿음을 갖는다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 잎이 마르고 산은 옮기게 된다는 얘기.
성서는, 하나님의 믿음을 계시하고 있는 책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고 나는 너희의 아비가 되리라는 것.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새언약의 성취 등.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믿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의 믿음이었고,
우리에게도 그것이 선물로 찾아온다면,
제 스스로 믿고 싶은 믿음이 떠나고
하나님의 믿음과 예수의 믿음이 깃들지 않을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믿음이
무화과 나뭇잎을 무성케하고 산을 높이 쌓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passover 물론 견해를 달리할 수 있고,
또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늘 열어놓고자 합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더라도 각종 병행구들은 서로 다른 제자들의 관점이 잘 녹아 있고,
이들을 함께 읽다보면 더 깊은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passover 저는 그동안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예수, 곧 "예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문장 속에서 목적격인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앎과 지식이 믿음인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통해 바른 앎과 지식을 더해가는 것이 믿음의 성숙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문득 제 믿음이 귀신의 믿음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귀신도 알고 떠는 그 믿음, 그러나 구원으로 귀결되지 않는 믿음, 사람이 만들어낸 믿음, 사람의 믿음 말입니다. 올려주신 글들 통해 다시금 제 믿음의 실체가 폭로되어지고 아버지의 자녀됨으로 귀결되는 그 믿음의 정체가 정말 과연 무엇인가 참으로 고민되는 밤입니다..
@사람 그저 주인상의 부스러기를 바라는 개처럼 은혜의 덧입음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피조물의 피조물됨 앞에서, 그리고 이 놀랍고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막막한 섭리 속에서 아바아버지라 부를수 있기만을 고대해 봅니다.. "구속자의 구속하심이 나와 뭔 상관이냐" 이 질문에 나의 자녀됨을 진심으로 고백할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성경에 그렇다 하더라"가 아니라 "내 아버지셔서 내 아버지라 하는 것"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사람 때가 가깝다고 할 때의 때란, 흐르는 역사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일컫는데, 바로 지금 여기서 존재와의 만남의 시간을 일컫습니다. 흔히 말하는 종말론과는 상관없는 시간입니다. 소위 천둥과 번개와 함께 쏜살같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만, 바로 가깝게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때는 모든 개인이 제 각각입니다. 고민과 질문들은 곧 답의 반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의문이 곧바로 신기하게 풀립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믿음으로부터(에크 피스테오스/자기 믿음에서) 믿음으로(에이스 피스틴/그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passover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자기 믿음에서,
그의 믿음으로..
그 카이로스의 때가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올려주시는 말씀마다 소경이 눈을 뜨듯 훤하게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ㅎㅎ 아, 참 신기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