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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마태오 13,44-46
생명을 버려도 괜찮을 행복이 딱 하나 있다
오늘 복음은 밭에 묻힌 보물, 값진 진주의 보물 비유 말씀입니다.
결론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이들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판다는 내용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자칫 이러한 신앙이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 신앙으로
하늘 나라만 차지하자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어떤 목표를 위해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따라 살다가 천국에만 가면 되지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낙관적 허무주의입니다.
낙관적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영화가 ‘에브리씽 에비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 여인이 다중 우주에 존재하는 자신과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며 ‘왜 사나?’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의 처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중 우주에는 자신의 선택이 달랐으면 살게 될 인생들이 있습니다.
훨씬 유명하고 부자이고 꿈을 이룬 인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두가 다 문제를 안고 있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던 허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허무주의에 눈알 하나를 이마에 달아줍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하는 남편, 자녀, 부모와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도 이런 일상의 허무에 눈알 하나 달아주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허무한 인생, 곧 사라져버릴 인생에서 결국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눈알 하나를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저 즐기며 사랑하며 행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런 삶의 태도를 동조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재능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성화를 그렸던 카라바지오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에너지는 이 세상을 즐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어차피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에 이 세상 것들은 즐기고 버리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의 삶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과 돈과 여자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나의 에너지를 이 세상 것을 위해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신앙인이 된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다가 용서를 위해 교황님께 다윗과 골리앗 그림을 그려서 돌아올 때였습니다.
이때는 정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그때 자기 에너지를 용서받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쏟을 수 없었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주인을 다시 만나기 위한 9일간의 긴 여정, 돌아온 진돗개 별이’란 사연이 있습니다.
일상 고양시에서 파주시까지 21km가 되는 길을 냄새만 맡으며 집을 찾아온 진돗개 별이 사연입니다.
이 과정에서 굶어서 영양실조가 걸렸고 얼굴에 큰 상처도 났습니다.
그런데도 집까지 돌아온 별이를 보며 주인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것이 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낸 사람의 마음입니다.
허무주의는 없습니다.
보물을 찾으면 마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가는 사람처럼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는 모든 것은 용납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그 하나의 성공을 위해 쏟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몰래 찍어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아이들은 어차피 부모님이 우리를 먹여주실 것이니 고생할 필요 없이 즐기며 살면 된다고 여기게 될까요?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것에 대해 부모님 뜻을 따라주기 위해 자신도 피 흘리고 싶은 열정이 생길 것입니다.
바로 부모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것, 이것이 아이들이 찾아야 할 밭에 묻힌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선교를 위해 피를 흘리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지, 다 마련되어 있으니 어차피 지나갈 세상 그냥 집착 없이 편안하게 즐기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나 재물, 모든 에너지가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에너지를 하늘 나라만을 위해 쏟아부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자녀의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고 합니까? 그러면 하늘 나라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과 당신 뜻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마태오 13,44-46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들과 기쁨, 고통, 희망, 번뇌를 나눠 가지는 삶!
‘삼대가 복을 지어야 맑게 갠 정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내놓으라하는 최고봉들은 웬만해서는 산정(山頂)의 신비로운 자태를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정점(頂點)에 위치해 있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그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매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영약이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식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철저하게도 편협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연세들도 지긋하셔서 깨달을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질이 하등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고 얻어야 할 인생의 긍정적인 가치나 덕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께 귀의(歸依)하는 신앙이 있고, 인생이 가장 큰 선물인 가족과 친구가 있고,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사랑, 우정, 신의, 겸손, 온유, 친절, 배려...
그런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가치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저 기를 쓰고 올라가려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손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공동선이나 이웃들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뱃속, 자기 식솔들 챙기기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야수(野獸)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 13장 44절)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여기저기 우리 주변에 묻혀있는 인생의 보물들을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해 아직도 찾지 못한 인생의 깨달음, 신앙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갖가지 일들, 기쁨, 고통, 희망, 번뇌, 그 모든 것을 서로 나눠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인생의 보람이며 행복입니다.”(에디트 슈타인)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2023. 8. 2. 수)(마태 13,44-46)
<기뻐하며>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여기서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 또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라는 말씀은, “구원의 진리를 들었을 때의 기쁨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 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라는 말씀은, “구원의 진리를 들었을 때의 기쁨은,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 라는 뜻입니다.
‘밭에 숨겨진’이라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복음이, 또는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숨겨 두고서는’이라는 말도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고,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게 숨겨 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혼자서 독점할 수 없습니다.
널리 알려서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혼자서만 기뻐하다가는 그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라는 말씀과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 한다.” 라는 뜻입니다.
‘보물’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1)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보물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와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를 내밀면서, 하느님 나라를 포기하면 이것을 주겠다고 말한다면?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면) 좋아하면서 다이아몬드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아무리 비싸고 귀한 보석을 준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다이아몬드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그냥 예로 든 것뿐이고, 실제 상황에서는 황제나 대통령 자리일 수도 있고, 많은 재물일 수도 있고,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세와 영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를 밀어낼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제안은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이미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었습니다(마태 4,8-9).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곧바로 쫓아내셨습니다(마태 4,10).>
2)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그 나라를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보아도 그것이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마태 13,54-58).
3)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하고, 그 나라를 알아보아도,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슬퍼하며 떠났던 어떤 부자 청년이 그런 사람입니다(마태 19,16-22).
4)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하고, 그 나라를 알아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시작하긴 했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루카복음 14장에 나오는,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한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루카 14,28-30).
5)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긴 한데,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참 좋은 말씀이다.”, 또는 “옳은 말씀이다.” 라고 생각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믿는 것을 ‘온 삶으로’ 실행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밭을 산다. 그것을 샀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마태 5,3-12) 말씀에 연결됩니다.
‘참 행복 선언’에 있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들은, ‘참 행복 선언’ 말씀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는 방법입니다.>
가난을 실천하고,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온유함을 실행하고, 의로움을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마음의 깨끗함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박해를 감내하는 등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신앙인들이 끝까지(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기쁘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삶으로 누리는 것이고,
성모님처럼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루카 1,47).
누구든지 박물관 같은 곳에 가서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보석들을 감상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것’을 구경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나의 집’입니다.
나의 목숨이고, 나의 인생이고, 나의 세상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첫댓글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건강 잘 지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