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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오 8,18-22)
"Follow me,
an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징벌을 앞두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그때 아브라함은 공정하셔야 할 주님께서 의인들까지도 처벌하실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아브라함은 마치 흥정을 하듯 의인들의 숫자를 줄여 나간다. 주님께서는 성읍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신다. 여러 가지 구실로 주님을 따르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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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과학에서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이 가진 에너지들이 정형 상태에서 무정형 상태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변화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몸도 물질의 종류이기에 우리 몸의 물질적 에너지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듯, 자꾸만 게을러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슬러 “누워 있을 수 없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신입니다. 모든 물질계의 열에너지는 아래로 흘러서 평형 상태를 향해 변화되어 가지만, 정신은 물질계의 에너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데 바로 이런 의지적 작용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물결 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 생활에서 정지된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든지 떠내려가든지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물살을 거슬러 힘써 올라가려고 하지 않으면, 물질계의 엔트로피 법칙처럼 우리는 아래로 떠내려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서, 또한 우리 몸의 본성을 거슬러서, 마치 물의 원천을 향하여 헤엄쳐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장사를 지내야 하는 ‘죽은 이들’은 바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말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으면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한결같이 주님만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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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영적 목마름으로 따르는 이도 있고, 기적을 보고 호기심에 따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추종하는 이도 있고, 기득권에 염증을 느낀 이들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이를 받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놀랍게도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며 당대의 지식인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현실의 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율법 학자가 망설였나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현실 도피나 세상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면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할 것을 명하십니다. 물론 가르침을 위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장례’는 자녀의 의무입니다. 모든 일을 중지하고 우선적으로 치러야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한 일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당신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행호시 (牛行虎視)
- 남궁영미 수녀-
◆‘따르다’ 는 말은 “누군가의 뒤에서, 그가 가는 대로 같이 가다. 좋아하거나 존경하여 가까이 좇다. 관례, 유행이나 명령, 의견 따위를 그대로 실행하다. 나란히 같이 움직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참여하는 것이며 세상 문제 가운데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손익 계산을 하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으로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볼 때 ‘따르다’ 라는 말은 ‘우행호시 (牛行虎視) ’ 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물이나 정황을 호랑이와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통찰력 있게 직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은 소걸음과 같이 느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무엇을 볼 때 옆으로 눈을 흘겨보거나 고개만 돌려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돌려 직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는 길을 갈 때 다투어 피는 꽃처럼 조급해하지 않는답니다. 결코 서두르거나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간다고 합니다. 호랑이 눈의 ‘통찰’ 과 소걸음의 ‘실천’ 을 통해 마침내 목표를 제압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직시하지도 꾸준히 접근하지도 못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거칠고 가쁜 호흡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직이 길게 호흡할 때라야 가능한 삶이라는 생각을 거듭합니다. 무섭게 질주하는 사회의 속도를 거슬러 천천히, 나직이 엎드려 사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복음을 사는 일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되리라 믿습니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신앙인
-김민수 신부-
“나의 본질은 동사죠. 나는 명사보다 동사에 맞춰져 있어요. 고백하기,
회개하기, 살기, 반응하기, 성장하기, 도약하기, 변화하기, 씨 뿌리기,
달리기, 춤추기, 노래하기 등의 동사죠. 그런데 인간들에겐 은총이 가득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동사를 죽은 명사나 썩은 냄새가 나는 원칙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어요.
그러고 나면 성장하고 살아 있는 것은 죽게 되죠.”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역시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은 변화요, 회개요,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신앙인 중에는 명사로 살아가며 마치 동사인 듯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짐짓 드러내려고
기도하고 봉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받을 것을 다 받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이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닌 이유는
정주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지내다
보면 편안함과 게으름으로 더러워지고 썩은 냄새가 나게 됩니다.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 생활을 하며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동하였듯이 우리의 신앙 역시 변화되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 내 삶의 자리에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루카복음의 마태오 판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이 어제 루카 복음과 다른 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 때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앞부분의 얘기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뒷부분의 얘기가 빠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왜 뒤돌아보는 것에 대한 얘기를 뺏을까 생각하다가
저는 생각이 옆길로 새는 바람에 주님을 따르다
왜 뒤를 돌아보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복음 묵상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너무 힘들기에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
오늘은 다른 이유를 보려고 합니다.
저는 수도원에 일찍 들어왔습니다.
저뿐 아니라 일찍 입회한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경험을 못해 세상을 잘 모른다는 것과
뭔가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세상 경험도 다 하고
즐길 것 실컷 다 즐기고 들어온 형제들이 부럽기도 하고
세상을 모르고도 사목을 잘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에 비해서 세상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신자들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목을 하는데 큰 장애라고 생각지는 않고,
그리고 세상이 부러워 뒤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생활이 행복하기 때문이고
밖에 사는 사람들보다 제가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수도원에 사는 너만 행복하냐?
나도 행복하고 내가 더 행복하다.”고 하는 분이 계시지요?
당신 말씀도 맞으십니다.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금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다른 세계를 기웃거린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이 가정생활을 기웃거리고
가정을 가진 사람이 수도원생활을 그리워하면
삶을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도피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그것을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수도생활을 그만 두겠다고 저도 수도원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 너무도 실망했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도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그리워서 떠난 것 아니고
수도원 생활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떠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수도원 들어올 때 저의 누나가
“수도원에서 못 살면 밖에서도 못 사는 거야!”라고 얘기해준 것이
저에게 못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밖에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가정생활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수도원에 들어와도 행복치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뒤도 보지 말고 옆도 보지 말고
지금 내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부르심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고,
지금 내 삶의 자라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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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김대선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올바른 길인지 선택의 순간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그 선택 앞에서
망설이게 됩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결정인지 그른 결정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선택은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그래서
더욱 결정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온전히 그분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주 하느님의 것과
세상의 것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함께 살아 숨 쉽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은 죽어 있습니다.
혼자 죽지 않고 같이 죽자고 합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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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가 있다!
-전봉순 수녀-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또 이사를 해야 하다니!’ 하고 제법 드러내 놓고 투덜거렸다. 최근 7년 동안 이사를 여섯 번 했고, 같은 집 안에서 방을 옮긴 것까지 계산하면 일 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한 셈이다. 이사할 때마다 20년 전 첫 본당 부임지로 가면서 가방 두 개만 들고 갔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수도 생활하면서 평생 간편한 짐만 가지고 온 세상에 전교하러 다니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데 살다 보니 해마다 늘어나는 짐, 그것도 내 지식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책이 점점 늘어나 이사할 때마다 내 마음을 짓눌렀다. 다른 수도자들보다 짐이 많다는 사실이 나를 늘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이사를 자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힘들다.
우리는 수련소에 있을 때부터 나그네살이를 익히기 위해 매달 방을 바꾸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여 오래 정착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매달 방을 바꿀 때마다 물건을 정리해 내 소유를 최소화시키고 친구나 가족한테서 온 편지·일기장·묵상집 등을 불태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진 것 없는 나그네의 삶을 진하게 느끼면서 수도 정진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근래에는 공부를 한답시고 한 권씩 책을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책 부자가 되어 이사할 때마다 큰 부담이 된다. 이제는 짐을 싸는 지혜도 생겨서 책을 굳이 상자에 넣지 않고 노끈으로 묶으니 운반하기도 쉬웠다.
여러 번 책을 상자에 담아 싸고 풀고를 반복해서 이력도 생겼을 법한데, 매번 책을 싸고 푸는 일은 여전히 귀찮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행복한 불평인가? 그렇게 이사를 여러 번 했어도 정작 집 걱정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이미 잘 마련되어 있는 집에 아무 걱정 없이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집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으며 옮겨 다닌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리도 힘들어했는가? 쉴 곳이 없어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니 나그네와 같은 수도자로 살고 싶은 나의 바람과는 달리 짐이 많은 내가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다. 내게는 아무리 이사를 자주 해도 늘 감사드릴 ‘보금자리’가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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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돌출발언>
다른 수도회나 교구도 그렇겠습니다만, 저희 수도회도 마찬가지인 ‘아주 보기 흐뭇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도회 한 형제의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다들 ‘내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든 슬픔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영안실에서는 시간대별로 형제들이 돌아가며 고인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장례미사에는 100% 참석합니다.
다른 때는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데 수십 명, 수백 명이나 되는 사제들에 둘러싸인 장례식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저희 수련자 형제들은 형제들의 부모님 상만 났다 하면 ‘긴급출동’입니다. 사흘 내내 영안실에서 분주하게 지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슬픔을 당한 형제나 유가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요즘 다들 형제가 하나 아니면 둘입니다. 많아야 셋입니다. 영안실도 썰렁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형제가 120명입니다. 영안실이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부친상’ 이것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일들 가운데, ‘부친상’ 이것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소 의외의 돌출 발언을 하십니다. 요즘 같으면 네티즌들에게 크게 한번 봉변 당하셨을 일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이제 막 예수님의 제자단에 가입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그 제자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허락해주시리라 생각하고 ‘삼일간의 휴가’를 신청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당연히 OK였겠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빨리 출발하게.” 이런 대답을 기대했었는데,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이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해를 살만한 말씀이기에 깊이 묵상해봐야 할 예수님 말씀입니다.
“혹시 예수님, 기본적인 가정교육 제대로 받지 못하신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도 하지 마라 하시니, 이거 너무 하신 것 아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갖은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고통이 너무나 안타까워 식음을 잊으면서까지 치유에 전념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곤경에 처한 여인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해 당신 목숨까지 걸고 구해주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 아버지의 장례식을 어떻게 소홀히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그 배경을 눈여겨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긴박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추종에 대한 우선권’을 역설하시는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많은 중요한 일들이 많지만 영원한 생명의 획득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음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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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라.”
-양승국신부-
< 내일 홀연히 세상을 뜬다 할지라도 >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사람의 외로움이나 공허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못 다 표현한 마음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위령미사도 봉헌합니다. 매일 묘소에 들러 꽃을 얹어 놓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먼저 떠난 그 사람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장소들을 정처 없이 헤매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치면 꼴불견이 되고 말지요. 빨리 추스르고 살 궁리를 해야겠지요. 가슴이 아프겠지만 이제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입니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나름대로의 몫이 있겠지요. 결국 전보다 더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빨리 슬픔과 허전함을 털어 내고 새 출발하는 것이 먼저 떠난 사람을 위한 일이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 약간은 섭섭하게 들리기도 하겠지요.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을 여읜 슬픔에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떠난 사람에게나 남은 우리에게나 아주 요긴한 말씀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우리 손을 떠난 사람들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호화판 장례식이나 왕릉같이 잘 꾸민 묘소 등등 외적이고 물질적인 과시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는 길은 다른 것입니다. 그분의 유지를 받드는 일, 그분이 못 다한 꿈을 이어가는 일, 그분이 살아 생 전 못 다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대신 하는 일이겠지요.
결국 죽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바는 하느님 자비를 굳게 믿고, 먼저 떠난 사람들의 영혼을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야겠지요.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에게는 참으로 송구스런 말이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상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심하게 흔들리고 방황하더라도 우리가 아직 이렇게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은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부끄럽고 비참한 삶을 살아도 살아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고 외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새 출발할 가능성, 다시 한 번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 다시 한 번 하느님 안에 살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 홀연히 세상을 뜬다할지라도 오늘 하루 힘을 내십시오. 마지막으로 막판 뒤집기를 준비하셔야지요. 단 하루일지라도 구원받기 위한 회개의 시간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에 속고, 지치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갈지라도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을 들어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가시밭길은 어느새 향기 그윽한 환한 꽃길로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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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되어야
-김찬선신부-
며칠 전 수녀원 특강을 해 주러 지방에 갔다가
근처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형제들 중에 2명이 제가 청원장과 성소 계발 담당자를 함께 할 때
성소자로 저와 면담을 한 형제들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이라 잊고 있던 것을 그때 떠올리면서 얘기했습니다.
공통된 얘기가 수도원에 입회하러 왔는데
그들을 수도원에 입회하게 하기 위해 제가 적극적으로 붙잡기는커녕
들어올 테면 들어와라 하는 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의 한 형제에게는
그 형제가 입회 의사를 밝혔을 때
입회를 허락하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저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를 너무도 존경하고
이 생활의 가치를 잘 알고 있고 사랑하기에
아무나 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의 성소 계발은
많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도원에 입회하게 한 것이 아니라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식별하는 성소 식별이라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형제에게 입회를 기다리게 한 것도 식별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입회를 정말 원하는 사람이라면
1년을 기다리게 하든 10년을 기다리게 하든
기다릴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그 정도의 원의와 갈망은 있어야 한다는
그런 뱃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기다리게 한 것은 식별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요.
입회할 깜이 아니라고 식별이 되면
아예 입회불가를 얘기하면 되는데
굳이 기다리라고 한 것은 성소의지를 더욱 다지기 위한 것이지요.
이 생활,
이 정도의 가치 있는 생활을 하려면
이 정도의 어려움은 견딜 수 있어야
앞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말씀도 저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가치 있는 삶이지만 매우 힘든 삶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을 따르는 삶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삶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삶이지만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이니
그토록 중요한 장례조차도 포기할 정도로
원의와 결기가 있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날 밤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올 때
요즘 이렇게 하면 몇 명이나 들어올까 생각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깐깐하게 했는데도 들어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그 형제들이 고마웠습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미사 전 30분이면, 항상 고해소로 들어가 고해성사를 드립니다. 사실 고해성사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성당의 고해소 자체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더욱 더 많이 느낍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요?
사실 우리 성당의 고해소는 무척이나 좁습니다. 딱 앉으면 꼼짝 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좁습니다. 물론 미사 전 30분 동안만 있는 것이니까 그것도 못 참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월 들어서면서 점점 힘들어지더군요. 왜냐하면 날씨가 장난 아니게 더워졌고, 이에 따라 고해소의 기온도 올라갔거든요. 더군다나 문제는 고해소에 그 흔한 선풍기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목회장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남는 선풍기 하나 없냐고. 그런데 며칠 뒤, 고해소에는 멋진 신형 선풍기 한 대가 설치되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시원한 것은 기본이고,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합니다.
이제는 살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더욱 더 고해성사를 기쁘게 드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더군요.
고해소에 들어가자마자 더워서 선풍기를 틉니다. 살살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그 상태는 잠시 뒤에 잠으로 이어지더군요. 제 자신도 모르게 고해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풍기만 있으면 고해소에서 성사를 전보다 더 잘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고맙다는 선풍기가 오히려 고해성사를 주는데 방해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님께 아버지의 장례를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고 하시면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거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의 장례도 아닌, 아버지의 장례인데, 그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의미로써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많은 조건을 내세웁니다. ‘이런 조건만 충족된다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끊임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충족된다 할지라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혹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조건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히 현세적인 욕심을 채우는 조건으로 인해서 점점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어떠한 조건 없이, 단지 주님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님을 따르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건없이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가난한 예수
-김순중 수녀-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는 어쩌면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 행복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의 길에서 만나게 해주신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들에게 나누는 기술뿐만 아니라 받는 기술도 배웠다. 가난한 이들한테 받은 것이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이 나에게 힘을 주어 오래 간직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커다란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화려하고 좋고 편리한 것들에 길들여져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상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난한 예수님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예수님 또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셨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날마다 바꾸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8ㄴ)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들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주님의 거처 마련하기
-김만수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8,20)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예수가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고 싶어 하는 율법학자 한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 싶어 하는 그 율법학자에게 마태오 복음 8장 20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사회 안에는 여러 운동이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해비타트(habitat)운동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자원봉사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선사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입니다. 우리나라의 집값이 폭등하면서 어려운 이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피폐해졌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집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입니다. 각자의 경험마다 다르겠지만 지난 과거 셋방의 추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서럽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현실은 가난한 자를 더욱 힘겹게 내리 누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집이 없으셨습니다. 나자렛 고향을 떠나셔서 세상을 돌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느라 당신이 머무실 지상의 방 한 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분이셨지만, 온전히 당신 자신을 비우셨기에 이 땅에 오실 때도 몸 누이실 집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분의 시신을 모신 곳도 당신을 위해 준비한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묻힐 다른 이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분의 지상 삶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한 떠돌이 방랑자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삶에 지친 수많은 모습의 예수님을 위해 머리 기댈 곳을 마련해 드리는 길이 우리 신앙인의 길이 아닐까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을 위한 해비타트(habitat)운동의 일환으로 저희 중앙성당 교우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시일반 신립금을 봉헌하고 기도하면서 비가 새는 성전의 지붕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초등학생이 돼지 저금통을 봉헌하고, 중학생이 방학동안 일한 아르바이트 비를 봉헌하고,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할머니가 동회에서 지급되는 생활지급금의 일부를 절약해서 봉헌하는 등등, 지금 저희 성당에서는 600여 세대가 주님의 집인 성전수리에 동참하는 감동의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거노인 집수리’팀은 어려운 독거노인들의 가정을 선별하여 주거시설을 개선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울러 매주 목요일 부산진역 주변의 노숙자들을 위한 점심준비 봉사 또한 주님을 위한 해비타트(habitat) 운동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웃들이 너무나 많은 요즈음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 바로 주님을 위한 우리의 해비타트(habitat) 봉사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만나는 지친 주님을 위한 편안한 거처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결단은 바로 지금입니다
-이성주 신부-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모두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를 해보고, 어떤 사람들은 활동을 통해서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타협"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고픈 마음은 있는데 현실적인 걱정 앞에서 예수님과 다른 그 무엇을 견주어보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는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타협을 하지 않으시고 지금 즉시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너무나도 냉정하게 강력한 요구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냥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제자를 불효자로 만드시는 분으로 비추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이 그런 강력한 요구를 하셨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부모에 대한 효도의 의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무르면서 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하다 보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또 그러다 보면 따르려는 마음이 약해지고, 또다른 세상 걱정이 제자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결단을 내리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다보면 점점 더 나약해지고 죄에 기우는 경향이 우리의 모습인지라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자비로우신 모습으로 복음에 나오십니다. 나누어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와도 화 한번 안내시고 버선발로 안아주시는 예수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온 마음을 쓰시는 그분, 이렇게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그분은 내려야할 결단은 확실히 내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죄를 짓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리고, 눈이 죄를 짓거든 눈을 빼내어 던지라고 하시면서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자비로운 모습과 엄한 결단의 모습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 안에서 확실한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은 아버지의 장례에도 당연히 드러날 것인데 제자는 그것보다 자기가 해야된다는 생각만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자기가 해야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이 하실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자꾸만 타협하려고 합니다.
결단은 "다음에"라는 것이 없습니다. 결단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하지 않으면 내일은 또 방해물에 넘어지고 계속 다음에 만으로 결국 후회만 하게 됩니다.
주변에 열심한 신자들을 보면 그들도 처음에는 현실과 타협이라는 갈등 속에서 힘들어했지만, 차츰 하느님의 부르심에 사로잡혀 하느님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보시기에는 덜 중요한, 자기의 중요한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지금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타협이 아닌, 지금 결단의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결단이, 내일을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신앙인은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 이다.
-서철신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누구를 뜻하는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곧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힘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온 사람이다.
신앙인은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해야 한다.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이는 일각의 지체도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셨기에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나도 이제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일각의 지체도 없이. 이것이 바로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님을 말씀을 사는 모습이다.
-오종섭신부-
율법학자는 느닷없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 율법학자가 보기에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군중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웅변가였을 것이고, 아픈 사람을 낫게하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용한 의사였을 것이고, 인생의 이치를 통달한 참다운 스승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열의를 가지고 배우려는 사람에게 정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래 참 잘 생각했다’고 기쁘게 받아 주시거나, ‘너는 자격이 안된다’며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불교에서 고승들이 제자들에게 주는 화두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율법학자의 얼굴이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됩니다.
이 대목을 접하고 있자니 마태오와 마르코 두 복음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바로 제베데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훗날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기를 청탁했을 때,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나무라시는 대목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조르는 율법학자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따라나서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떤 한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렴풋이 알 듯도 하지만, 당장 해결해야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슬픔에 잠긴 제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슬픔을 달래는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어떻게 보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를 앞두고 있던 제자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요?
성당에 나오는 우리 신자들에게 ‘왜 성당에 나옵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수의 신자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애원하면서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래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한번 해봐라’하며 도닥여주는 말 한마디가, 그리고 부모님을 잃고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는 ‘고생이 많제?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며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일진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고 계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예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는 초등부주일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멋도 모르고 떠든다고 나무랄 신자가 어디 있겠으며,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어찌 예수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실제로 가족의 죽음을 계기로 하느님 품에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한 제자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느님께 좀 더 다가오도록 원하십니다. 말로만 신자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는지 깊이 묵상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위험에서 지켜준다고 십자가 목걸이를 부적처럼 걸고 다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죽음을 달게 받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얻고자 하는 마음의 위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위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중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원하지 않는 물음을 던지시면 나는 어떻게 할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난감해하는 율법학자와 한 제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며 해답을 찾아보는 것도 오늘 하루 중에 할 수 있는 좋은 묵상거리가 될 것입니다.
† 호수 이쪽과 저쪽 †
-박상대 신부-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 5-7장)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헌법에 대하여 배웠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가르쳐 주셨다. 이제부터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행동을 통하여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보여 주신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실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10가지 기적사화와 몇 가지의 대담으로 8장과 9장에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병환자의 치유(8,1-4),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과 하인의 치유(5-13절), 시몬의 장모 치유(14-15절)와 많은 병자의 치유(16-17절)에 이어 당신을 따르는 추종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기적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제 그 관심은 예수를 따르는 추종(追從)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막연하게 예수님 뒤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둘러 서 있는 군중을 보시고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18절)고 하신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곧 '호수 건너편'이다. 호수 이쪽 편에서 건너편으로 가라는 말은 단지 장소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 이상이다.
호수 이쪽은 들판과 산을 누비는 여우가 쉴 동굴이며,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들이 둥지를 트는 보금자리를 말한다.(20절) 율법학자 하나가 예수께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19절) 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호수 이쪽 편에 있는 한 예수께 대한 완전한 추종은 불가능하다. 호수 이쪽 편에는 자신의 머리와 몸을 누일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고, 소유(所有)가 있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호수 이쪽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야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물질(物質)을 사용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하여 이쪽을 떠나 건너편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때로는 마음만 가고 몸은 그대로 있고, 때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우리들 모습을 본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가는 도중에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에게 물질(物質)과 소유(所有)와 인연(因緣)이 다 무엇인가를 말이다. 참된 제자는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필요할 땐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너희 마음에 내 머리를 둘 곳이 없다 †
하느님은 오늘도 수많은 교회를 통해서 냉담하는 영혼들, 그리고 새로운 영혼들을 교회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는다는 신자들 중에서 외식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수도생활 내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에게 믿음을 지니도록 하시는가?'라는 질문....
특별히 우리에게 믿음 주심을 통해서 오늘 그분이 기대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기장면 어느지역의 기도원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그 이유를 물으니, 수년동안 치료가 되지 않았던 신경통이 나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만이 아닙니다. 기치료니, 영성치료센타니... 하면서 신자들이 어떤 특정인의 능력에 매달려 거기서 하느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정작 교회에서 불러야 할 하느님을 이상한 곳(?)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신경통이 낫는다고 교회도 아닌 그런 곳에서 병을 치유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단체를 이끄는 자들이 바로 신자들이라는 우스운 사실입니다. 실제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소문을 들었던지 한번쯤은 그런 곳에 간 적이 있을 것입니다.(안 가보신 분에게는 죄송!!!)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마치 물고기 두마리와 빵 다섯개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수많은 무리들에게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주님은 부르시지 않습니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마귀들을 내어 쫓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을 때에, 구름과 같은 군중들이 그 주변에 둘러쌌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상황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주님은 그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단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저쪽 편으로 넘어가자."
주님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서 등장하는 3명의 인물은 예수님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는지를 지금부터 묵상하겠습니다.
I. 너는 나를 따르라(마태 8,18-22)
오늘복음에서는 세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그 율법학자의 동기는 예수님의 말씀 테크닉, 치유 테크닉, 그리고 군증들의 이끄는 카리스마 등에 대한 기술적 관점에서 관심이 있어... 그런 테크닉을 배우려는 육신의 영광에 두고 있었으므로,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은 '사람이 주를 따르는 일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 그의 계선적 생각을 물리치셨습니다. 그가 그 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되었는지 기록된 바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이번엔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을 드립니다. 여기서도 이 제자는 비록 몸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집에 계시는 부친의 생각으로 차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같은 생각으로 인하여 주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떨어져 나간다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이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주님의 따르는 길을 세상적 관점에서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을까요?
1. 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
주님이 비유하신 씨 뿌리는 말씀 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주님을 저버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결실치 못하는 경우도 말씀하셨습니다. 부친의 장사로 먼저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이 제자의 경우는 세상의 걱정으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영적 생활로 가는 것을 방해하며 세상으로 가까이 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는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1베드 5,7 ; 필립 4,6). 사람이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려면 분명한 목적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약속하신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온전히 신뢰하는데서만 확고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과 소망이 없을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육신적인 어떤 이유가 계기가 되어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생명적 결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장사를 지내겠다고 간청하는 제자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주님의 길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1)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한 주인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물로 말미암아 주님을 등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육신의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그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갈라 6,7-8).
(3)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고 했습니다(로마 8,5-6).
(4)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은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갈라 2,20).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할 이런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2.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등한히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친에 대한 일을 집안에 있는 다른 식구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자기가 집에 가서 부친을 위해 애쓰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고 하셨습니다(마태 22,37-40).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가정의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이 주님을 떠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대로 우리의 이웃은 언제나 하느님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는 주님을 따를 때 배와 부친(가족)을 버리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에게 들려주신 황금율이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6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쟁기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야 합니다. 뒤란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생명의 월계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스미르나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주겠다.(묵시 2,10ㄴ)"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면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II. 한 율법학자의 실패(마태 8,19-22)
이미 앞에서 언급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가운데서 나와 그가 주님을 따를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언뜻 듣기에는 그 율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고백으로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 율법학자의 결심이 거절된 이유
아마도 이곳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는 다른 율사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이 이스라엘이 바라는 메시야이심을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이같은 결단에 대하여 처음부터 탐탁히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나타난 상황에 의해서 사리를 판단하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동기와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겠다고 한 율사의 경우, 그의 결단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감동적인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결합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끊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사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 내려진 결단처럼 보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동기가 올바르지 못하면 언제나 배신이 따르게 따릅니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요한 12,6) "고 하는 말씀에서 유다는 원래부터 도벽이 있는 도적이었으며 그의 동기 자체가 악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학자의 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그는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동기가 하느님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있으므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7-8).
(2) 율사의 결단 속에는 시련이나 고난의 각오가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영원한 기쁨과 희망과 값진 보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같은 사실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며 희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따르며 우리는 이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고 하셨습니다.
2. 주님의 대답에서 보여주신 교훈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대답은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동문서답처럼 들려지지만 이 말씀이 교훈해 주시는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우리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가난에서 시작되어 가난으로 마치셨습니다. 주님은 원래가 가난해 지실 수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이런 가난은 죄로 인하여 저주받아 참으로 가난하게 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생명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삶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부요함을 받은 것입니다.그보다도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 분 자신을 내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부요함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2) 다른 한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께서 거처하실 집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은 우리의 마음(심령)인데 우리는 그 분에게 아늑하고 따스한 그의 처소를 제공해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마음에서 밖으로 내쫓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밖에서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하시지만 우리는 좀처럼 열어 주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향하여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의 생각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마무리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삶도 마찬가지로 여우의 굴이나 새의 보금자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우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운 삶 가운에 피어나는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길, 그것을 모두 함께 만끽하고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