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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십자고상이 내게는 어떤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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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60323 강론글 말미에 적으시다.>
내일부터 부활 때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순 시기 잘 보내시길 바라고 빕니다.
위에 따라 4시 반 ~ 5시까지 안 올리셨기에
오늘 24일은 지난 강론글 중 2편을 아래와 같이 올리고
5시 또는 5시 20분 이후 7시 반까지 올해 글을 올리실 경우
지난 글 아래에 올리도록 합니다.
<05:20~07:20 중에는 새벽미사 참례로 글 못 올릴 수 있음>
^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05:25 현재 아직 /
*** 08:50 현재 강론글 올리지 아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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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8 04:33
사순 5주 화요일-십자고상이 내게는 어떤 것?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기둥 위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한
구리 뱀은 십자가 위에 달리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았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고상을 우러러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종교 가운데 이 십자고상(十字苦像)과 같은 상을
우러러보는 종교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만 봐도 부처님상은 십자고상처럼 처참하지 않고,
인자하고 관상적이고 평안하고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자꾸만 보고 싶게 합니다.
그리고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개신교도 십자가만 달아놓지
우리 천주교처럼 십자고상을 달아놓지 않고 우러러보는 것은 더더욱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때 이 십자고상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왜?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 때는 십자고상은 보기만 해도 불편하고,
특히 희희낙락하고 싶을 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고 싶고 보게 됩니까?
어떤 때 십자고상을 우러러보게 됩니까?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십자고상을 보노라면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신 주님이
위로와 위안이 되고 더 나아가 구원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 희희낙락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그런 주님을 보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고상은 우리에게 평안이 아니라 위로와 위안이고,
위로와 위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고상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 못 되면 위로와 위안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우러러보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러러보는 사람,
쳐다보기라도 하는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이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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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8 04:58
사순 5주 화요일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
죽었다가 사는 법을 얘기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이지만
오늘 주제를 약간 빗겨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서 잠재우시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이 짧은 얘기에 불평불만의 원인과 처방이 있습니다.
우선 불평불만의 원인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이 그들에게 보잘것없어 보이고,
심지어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원하는 양식이 없고 충분한 물이 없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불만이 보통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는데 저것을 원하니 이것이 불만이고,
이만큼 있는데 저만큼 있기를 바라니 이만큼이 불만이지요.
있는 것은 만족치 않고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의 문제이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심 곧 ‘더’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또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고 불평까지 할 경우,
이에 직방인 처방이 바로 극약처방이고 최악 처방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의 요구와 불평을 들어주신 하느님께서
불평이 이렇게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으시고
이번에는 죽음이라는 최악을 극약처방 하십니다.
죽음이라는 최악을 생각하면
죽음만 아니어도 다 악이 아니고 선이 되지요.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만 원도 큰돈인 것과 같습니다.
최악이란 최선의 반대이며 선은 하나도 없고 악뿐인 상탭니다.
죽게 되면 사실 존재 자체가 사라질 판이니,
욕망은 사치이고 그래서 욕망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우리는 스스로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의해 최악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간청해 살 수 있는 처방을 겨우 얻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행복하려면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욕망을 내려놓고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합시다.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고,
욕망에는 최악을 각오합시다.
이렇게 하여 불평불만은 잠재우고
행복을 요즘 봄날처럼 꽃피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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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5:20 현재 아직
*** 08:50 현재 강론글 올리지 아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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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유배: 지속되는 현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오늘날 사람들은 어디에서 유배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유배 : 지속되는 현실
2026년 3월 23일 월요일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성경 안에 드러나는 제국의 이야기와 유배의 체험을 성찰하며, 이러한 서사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숙고합니다:
유다인들에게 그들의 성경의 중심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출애굽"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곧, 조상들이 이집트 제국의 지배 아래 종살이하던 난민이었으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시고 자유로 인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실제 역사적 사건인지, 아니면 문학적으로 보강되거나 상징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논의하지만, 성서학자들은 이 사건을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1200년 사이로 추정합니다.
안타깝게도 난민들의 종살이와 부당한 대우는 허구가 아니라, 수많은 세월 동안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 실제로 되풀이되어 온 비극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유배’라고 답할 것입니다. 곧, 수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그 제국의 지배층을 섬기며 살아야 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토착민들의 강제 추방과 지배는 수많은 세월 동안 너무도 자주,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 되풀이되어 온 비극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눈물의 길’이 있었고, 수많은 "나크바"(Nakba)가 있었으며, 수많은 "포그롬"(pogrom)과 수용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출애굽과 유배의 이야기는 함께 우리에게 같은 제국들이 사회·경제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사치와 풍요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 바닥에 있는 이들에게는 깊은 고통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황제들의 신들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반면, 가장 낮은 자리의 이들에게 하느님은 오직 해방의 희망으로 드러나십니다. 사실 저는 영어의 "liberate"(해방하다)와 "liberation"(해방)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에서 흔히 "save"(구원하다) 혹은 "salvation"(구원)으로 번역되는 말에 더 적절한 옮김이라고 자주 제안하곤 합니다.
시편 137편은 유배기의 고통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다인들은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포로 생활 속에서 억압자들의 오락거리가 되었다는 깊은 상실감을 토로합니다:
이 시편에서 유배 중인 난민들은 노래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억압자의 오락거리를 위해 자신의 존엄과 인간성을 희생하지 않겠다고 결연히 다짐합니다. 그들의 고통은 세기를 넘어 메아리치며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서 사람들이 유배를 겪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아픔을 느낄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폭력과 지배의 제국을 지탱하는 오늘날의 권력층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에 큰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먼저 시편을 펼쳐 읽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시편은 없지만, 자주 시편 27편을 찾곤 합니다. 그 후 조용히 앉아 나무로 된 손 미로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하느님께 마음을 모읍니다. 나선형 길을 안쪽으로 따라가며 저는 하느님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묵상합니다. 다시 바깥쪽으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심장을 세상으로 가져가는 사명을 생각합니다.
—Liz H.
References
Brian McLaren, “Exile: A Recurring Nightmare,” for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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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높이 들어올려지신 한없는 사랑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합시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맞서는 인간 내면의 세력들을 가리킵니다. 곧 자기중심적 욕망과 교만에서 비롯되는 모든 힘입니다. 복음의 가장 큰 적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인데, 그곳에서는 인간 에고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이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빚어낸 세계이며, 그 안에서는 개인의 이야기가 구원의 역사보다 앞서 자리합니다. 이러한 에고는 다른 존재들은 물론이고 하느님과 결코 일치를 이루지 못하며, 오직 모든 것을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만 바라봅니다. 사물이나 사람 안에서 선을 발견하는 것도 오직 자기 주장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해 줄 때뿐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말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사랑하는 푸른 별, 즉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사랑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눈을 닫아버린 인간의 에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전례 안에서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기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에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없이 부족한 현실을 바라볼 필요도 있습니다만, 거기에만 머물면 우리는 어떠한 희망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런 연약함과 부족함을 채워주실 분, 구원의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사순 시기의 막바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요즘 들어 저는 자주 제 안에서 뭔가 모를 공허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가 삶의 의미를 제 에고에서 찾으려고 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기에서 거기일 뿐인 '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저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친히 바치신 완전한 사랑의 제사가 거행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에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바로 이 희생의 현재적 현존이며, 그분의 사랑이 지금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성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가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진리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은 타락한 인류를 향한 아버지 사랑의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표징이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활짝 펼쳐진 그분의 팔은 우리와 맺으신 우정과 친교의 지울 수 없는 표지를 그려냅니다. 죄 많은 우리의 시선 앞에 높이 들리신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이 참으로 "있으신 분"(내가 나이신 분, 즉 하느님: 요한 8,28 참조)임을 깨닫게 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요하고 관상적인 시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이렇게 묻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말없이, 소리 없이 "당신은 누구십니까?"(요 8,25)라고요. 우리의 이 질문에 대해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답하시며, 당신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분과 결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다음 말씀은 사순 시기 묵상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 예, 예,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바로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늘 불평할 거리를 찾고, 십자가 없는 복음을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치유가 오직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가능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사순 제5주간을 보내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지펴 주신 믿음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냉담함을 녹이고, 불평 대신 감사와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에 시선을 둘 때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분이 바로 거기에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 자체로 달려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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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이 누구요?”(요한 8,25)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의 신원을 이미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여기서, 두 가지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셨습니다. 곧 “위에서 왔다”는 것과 “내가 나임”을 밝히십니다.
<첫째>는 ‘위에서 온 분’으로,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으로 자신을 밝히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그가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승입니다. 또 하느님께로부터 뽑혀 왔으니, 분명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이입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그분께 속해 있는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소유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소유, 그분께 속하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
아마도, 예수님처럼 죽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하느님과 같아지게 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표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미 입은 이 ‘십자가의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개선행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오로지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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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감사할 일이 많이 있지만, 최근에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미사 참례 인원입니다. 한국은 코스피 지수가 올라서 좋아합니다. 코스피 지수가 5,500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국경제의 평가가 좋아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한국의 주식시장이 자리를 잡는 중이라고 합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와서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에서 800명 정도였습니다. 800명이 넘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907명이 미사 참례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찬양하는 교우가 많이 늘어서 감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대 양옆에 있는 스크린입니다. 시력이 안 좋아졌는지 스크린에 비친 화면과 영상이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빔프로젝터에 있는 ‘렌즈’의 문제였습니다. 렌즈를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그랬더니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스크린에 비친 화면과 영상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저도 기분이 좋았고, 교우들도 모두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바르티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물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눈먼 사람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디가 길이요, 어디가 진리요, 어디가 생명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다.” 본당 빔프로젝터는 형제님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오늘부터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예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흥준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 다르다.” 우리의 눈은 렌즈와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감사와 기쁨으로 보일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절망과 슬픔으로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과 감사의 눈으로, 희망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후각은 개보다 못합니다. 표범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시력은 독수리보다 못합니다. 지구별에 살아온 시간도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짧습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종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같은 종인 인간끼리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혼인 잔치에 가장 늦게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같이 초대된 다른 종들을 죽이고, 혼인 잔치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은 손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을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화의 방향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양면, 즉 고통과 기쁨, 빛과 어둠,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을 알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을 분간할 수 없으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광야를 건너지 않고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치유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인정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요르단의 끝에 가면 바로 앞에 요르단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을 넘으면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르단 계곡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구리 뱀을 두른 십자가가 있으며, 기념성당도 있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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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곳을 선호하십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연구대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어디든 다 나타납니다. 강아지처럼 졸졸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빈도를 보면, 베드로 사도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사도들보다 더 자주 등장합니다. 졸졸 따라다니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기를 쓰고 예수님 뒤를 밟습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은 조를 짜서 교대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따라다닌 이유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정말 메시아가 맞는가?’ 확인해보기 위해 따라다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들이 그간 쌓아온 큰 성곽을 조금씩 무너트리는 예수님에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여차하면 올가미를 씌우려고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던 안식일 규정을 밥 먹듯이 파기시키는 예수님이 그들 눈에는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 소중한 모세의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예수님이 그들 눈에는 미움덩어리였습니다.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 나자렛의 목수가 ‘나대는’ 꼴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일생일대 가장 큰 실수를 범합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메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길을 걸어놓고도, 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끝내 등을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코앞에 다가온 구원을 발로 멀리 걷어 차버린 것입니다.
다된 밥을 엎어버린 어리석기 그지없는 바리사이들, 그들은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그들은 지나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바리사이’가 지닌 본래 의미는 ‘분리되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너무도 과대평가를 했습니다. 허무맹랑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속된 세상과는 철저하게도 분리된 사람들이지. 너희같이 못 배워먹은 무지랭이 촌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이런 도를 넘어서는 자만심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토록 자주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끝까지 거부하고 사지로 내모는 결정적인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때로 높은 직책이나 긴 가방끈, 많은 재산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많이 배울수록, 부를 많이 축척할수록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더 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늘 가장 낮은 곳을 선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선명한 예수님의 얼굴을 그곳에서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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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8,21–30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진 뒤에야
내가 그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그분을 믿게 됩니다.
대 바실리오는
신앙의 싸움이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과 방향의 문제라고 말하듯 가르칩니다.
인간은 쉽게 “아래”의 기준,
곧 눈에 보이는 힘과 이익,
세상의 평가와 체면에 매이지만,
복음은 우리를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 “위”는 현실을 떠나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기준을
하느님의 진리로 바꾸라는 뜻입니다.
영성 주간의 오늘, 주님은 묻습니다.
나는 무엇에 속해 살고 있는가.
세상의 두려움과 비교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진리와 자비에 속해 있는가.
“들어 올려진 뒤에야 알게 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강한 기적을 보고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됩니다.
대 바실리오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소속을 바꾸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설득보다 더 깊은 것—
마음의 방향 전환입니다.
성령이신 주님,
제가 ‘아래’의 기준에 묶이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속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볼 때
제 마음의 방향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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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40 추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1.23-24).”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6.28-29).”
1) 이 말씀은,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는 간다.”는, “나는 이제 곧 간다.”이고, 지상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제야 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는 동안 회개하지 않고 살다가, 심판 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는, 회개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 관하여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너희의 죄를 심판하는 말밖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많다.’ 라는 말은, 사람들의 죄가 크고,
또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준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믿고,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라는 뜻이고,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다.” 라는 말은, 원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서는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다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곧바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다면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과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보충 설명인데, 십자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아니라.
즉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일은 곧 인간 구원이고, 당신의 말씀은 ‘구원의 진리’ 라고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4) 여기서 예수님 말씀들의 핵심 가르침은 “늦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아라.”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받기 위한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곧 회개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가 없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하고 장엄한 전례도, 회개가 없다면 허례허식이 됩니다.
정말로 엄숙한 모습으로 십자가 경배를 한다고 해도, 회개가 없다면 다 헛일이 되고, 시간낭비가 될 뿐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회개하라는 가르침이고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제대로 회개해야만 십자가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부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은총은 곧 ‘부활의 은총’입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과 십자가만 보다가 부활을 잊어버리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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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08:45 추가
■ 그들은 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했는가?
오늘 복음의 관전 포인트를 한번 보겠습니다. 논점은 이 세상과 영원의 세계는 다른 곳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성질을 달리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세상입니다. 다만, 그런 죽음의 세상이라도 하나의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신원 즉 근원적인 신원을 알고 그분을 믿게 됐을 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가르침을 말씀하시지만 그 가르침이 바리사이들은 단순히 목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만 치부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수라는 신분을 의식했기 때문에 실제 하늘의 가르침이었음에도 이 세상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바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떤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 편견은 바로 그들은 육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육의 눈이라는 건 바로 인간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무리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이 세상에 진리를 전해도 그 진리가 죽음이 없는 천상의 진리인 줄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위에서 오셨고 우리는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땅은 영역이 이미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수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그 가르침이 왜 다가오지 않았었을까요? 이 세상은 생로병사를 통해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걸 알지만 예수님은 오늘 복음 말씀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줄곧 당신께서 가시는 그 여정 속에는 당연히 몸소 죽음을 겪게 될 것을 말씀해오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당연히 죽음까지는 그래도 믿을 수는 있다고 양보를 백 번 해 믿는다고 해도 그들이 결코 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땐 몰랐는데 오늘 복음 한정된 것만 딱 놓고 봤을 땐 예수님이 돌아가셔야만 그제서야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셨던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대략적인 전체 복음의 개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한번 되돌아봅시다. 2000년 전의 바리사이들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 조금도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과연 정말 그런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글쎄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묵상을 하면 예수님을 진실로 진실로 잘 아는 사람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십니다.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행간 속에 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신을 입고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도 이 세상에서 비록 육신의 발은 땅을 딛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그 근원이 이 세상 분이 아니셨고 근본 속성이 하느님의 본체이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본체는 죽음을 맛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 그 자체가 바로 '위'이셨기 때문입니다. 위라는 건 단순히 물리적인 위치 상하를 말하는 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벗어난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는 이 세상을 벗어난 세상이겠죠. 바로 이걸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면 안 된다는 걸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어도 당신이 원래 계셨던 곳을 우리는 동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죽음을 맛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궁극에는 죽음을 맞이할 거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일까를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진짜 어려운 것입니다. 세속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세속에 있지만 말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치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 비결은 예수님 말씀에 정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는 엄청난 고민을 해야 알 수 있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하면 예수님 당신도 성부 하느님과 함께 한몸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마음에 들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실 때 그 조건은 그냥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오늘 복음 도입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역으로 우리는 이 세상 죄에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이 세상에 물들면 바로 하느님 세상에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세속을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 말씀과 가르침으로 우리의 영혼을 세속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 영원한 삶을 사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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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4. 사순 제5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햇님과 바람>이라는 동화를 보면, 해와 바람이 길을 가는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쪽이 이기는 내기를 합니다. 자신있게 먼저 나선 바람은 자기가 가진 강력한 힘으로 나그네의 옷을 억지로 벗기려고 했지요. 그러나 매섭고 강한 바람이 몰아칠수록 그 나그네는 자기 옷을 더 단단히 붙잡으며 버틸 뿐이었습니다. 이번엔 햇님이 나섭니다. 햇님은 나그네의 옷을 억지로 벗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에게 따스한 햇살을 내리쬘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몸이 따뜻해진 그 나그네는 굳이 두껍고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을 필요가 없었고, 자연스레 그 외투를 벗어서 들고 길을 갑니다. 햇님의 따스함이 바람의 매서움을 이긴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바람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이라는 매서운 바람으로 사람들이 지은 죄를 벗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다그쳤고,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들은 호되게 나무라며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죄라는 옷에 달린 ‘자기합리화’와 ‘핑계’라는 단추를 더 단단히 잠글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햇님입니다. 그분은 따스한 사랑과 자비로 사람들을 품어주셨습니다. 특정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 이르는 이들만 편애하신 게 아니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차별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진 죄인들은 더 이상 죄라는 거적대기로 자기 영혼을 싸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통회와 회개로 자기를 구속하던 죄를 벗어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완고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래’는 율법과 물질이 지배하는 형이하학적 세계를, ‘위’는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 공정과 평화로 흘러가는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래’에 있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 즉 재물과 율법이라는 가치를 쫓는 사람이 되면 우리 영혼이 그런 가치들에 속박되기에 죽은 후에 ‘땅’으로 돌아가지요. 그러나 우리가 ‘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 즉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 공정과 평화를 쫓는 사람이 되면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인호가 새겨지기에 죽은 후에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렇듯 각자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인 겁니다. 이 심판을 잘 준비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면 심판은 두려워 할 ‘징벌’이 아니라, 희망하고 바랄 ‘구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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