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임기 :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이건춘(충남 공주) 11대 국세청장은 재임 1년 2개월 남짓 만인 1999년 5월23일 건교부장관으로 영전해 갔다. '세풍' 소용돌이와 IMF위기에서 조직을 안정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국세청의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세풍 회오리'를 특유의 '외유내강' 뚝심을 발휘 해 무리없이 헤쳐낸 것 등이 보상받은 셈이다.
1999년 5월 26일, 이건춘 청장과 호흡을 맞추면서 '차기'를 기다리던 안정남 차장(1941년 9월 25일 ~ 2013년 6월 11일, 전남 영암)이 예상했던대로 제12대 국세청장에 임명됐다.
이건춘 전임 청장과 행시 동기(10회)인 안정남 12대 국세청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노력형에다 국세청 호남인맥 중 선두주자로 꼽힌 인물이다.
따라서 김대중정부 출범과 함께 그의 국세청장 기용은 시기가 언제인가일 뿐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상 첫 호남인 국세청장을 맞이한 국세청은 우선 상층부 인적구도면에서 변화를 담보하고 있었다.
1999년 9월 1일을 기해 국세청은 '제2의 개청'을 선언했다. 이 때 경인국세청을 중부국세청에 통합 시키고, 35개 세무서를 폐지했다. 또 세정조직을 세목별에서 기능별조직으로 개편했다.
안정남 12대 국세청장은 취임직후, 국세청장 임명 소식을 미리 전해 듣고 강화도 마니산 신전에 올라 결의를 다졌다는 말을 털어 놓을 정도로 지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취임일성으로 '정도세정(正道稅政)'을 국세행정 지표로 제시했다. '모든 국세행정을 바르게 행사하겠다'면서 부(富)의 변칙적인 세습방지와 기업자금 변칙 유출 방지, 숨은세원 발굴 등을 정도세정의 행심가치로 삼겠다고 했다.
그리고 청장 취임 14일만에 황수웅 대구국세청장을 국세청 차장에, 김성호 경인국세청장을 서울국세청장에 각각 기용했다.
국세청 1급 2자리를 영남출신 1명, 호남출신 1명으로 안배한 것이다.
진용을 새로 짠 국세청은 1999년 9월 1일을 기해 '제2의 개청'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국세청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경인국세청을 중부국세청에 통합시키고, 세무서 35개를 폐지 했다. 국세행정조직을 세목별에서 기능별조직으로 개편했다. 특히 '위민세정' 다짐 차원에서 '납세서비스헌장'을 선포하고, '납세자보호담당관'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대 서민세정은 유화적인 반면 대기업의 세무관리(조사)는 어느 때보다 강도가 셋다.
1999년 9월 중순 보광그룹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에 이어 10월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12월 신동아그룹 최순영 일가 등 대기업 세무조사를 단행했다.
세무조사를 받은 대기업 사주들은 대부분 검찰에 고발됐다. 국세청의 대기업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는 정치권으로부터 강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나라당은 '정치보복'으로 간주 했고, 여당과 정부는 '정당한 세정집행'이라고 일축했다.
국세청은 신용카드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1999년 귀속 연말정산부터 신용카드소득공제를 적용했다. 신용카드 사용을 확대하는 것만이 근거과세를 가장 손쉽게 앞당기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탈세제보 포상금 1억원' 법안발의를 추진했다. 또 '국세청복지후생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눈치보기 근무방지' '법적연가 적극활용' '해외여행기회 확대'를 도입했다. IMF로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취지였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
1999년 9월 1일 국세청이 임시청사로 사용하던 서울 종로2가 종로타워 현관에서 납세자보호담당관들이 제복을 입고 발대식을 하고 있다.
앞줄 좌측부터 황수웅 국세청 차장, 안정남 국세청장, 김성호 서울국세청장.
‘국세청 앞에서 노제(路祭)’ 원하던 안정남 전 청장의 별세
2013.06.12
안정남 전 국세청장이 향년 73세의 나이로 11일 오후 4시경 지병으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서울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갖는다고 한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
안정남 전 청장은 국세청장을 지낸 후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영전했으나, 부동산투기 등 공직자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이 도마에 오르면서 23일 만에 낙마했다.
안정남 전 청장하면 국민들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언론사 세무조사’다.
국세청은 2001년 23개 언론사에 대한 동시 세무조사를 벌였고, 사주를 구속시키는가 하면 거액의 추징액을 부과하는 등 사회적으로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특정 업종을 타깃으로 한 정치적 목적의 조사라는 등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나 언론사도 세무조사에서 성역일 수 없다는 국세행정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안 전 청장은 당시 단행했던 국세행정 개혁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는 국세공무원들의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되어온 지역담당제를 폐지하는 성과를 올렸고, 세무서를 135개에서 99개로 줄였으며, 납세자보호담당관제, 세목별 조직의 개편, 향피제 인사 시행 등 국세행정 개혁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특히 국세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일재원 마련을 역설하기도 했고, 국세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의 표현으로 자신이 죽으면 '국세청사(서울 수송동) 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안 전 청장은 1941년 전남 영암출신으로 건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71년 행정고시 10회에 합격해 국세청에 입문, 국세청 법인납세국장, 광주지방국세청장, 국세청 차장을 거쳐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국세청장에 재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