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꼭 해야 할 일은
가능하면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 내 삶의 신조인데 최근 들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바꾸는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수동적으로 사는 것은 이렇다 할 결과를 얻기 어려웠다. 짧지 않은 삶에서 무엇이 남았나를 돌아보니 일을 만들지 않고 살아온 지난날이 허망하다. 내 믿음이 소극적이고 기도가 간절하지 않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주 느끼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 내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니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생활방식이 문제인 것 같다.
가능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중심이 되어서 일을 만들고 저지르며 사는 것은 어떨까 그려본다. 그러면 좀 더 사는 것 같고 변화가 있고 예상 밖으로 돌출하는 여러 가지 일들로 더 기도하게 되고 어려움 속에 그분이 내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도우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남들은 그렇게 살다가도 이제는 일들을 줄이고 안정적인 삶의 자세로 돌아오는 때일 듯하다.
뭐가 문제인가? 왜 남의 시선에 그렇게 마음 쓰고 매어 있어야 하나.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족한 것이지. 일 만들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활동이 잦아들다 멈춰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 갈 것이다. 점차 몸과 마음이 약해질 텐데, 오는 이도 없고 갈 데도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삶이 되면 어떡하나?
지난 금요일에는 몇 가지 할 일이 있었다. 도서관 일정 중 하나로 시립미술관에 갔었는데 끝까지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이름을 들었던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해설사가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다지 없다. 작품 활동이 무척 왕성한 작가인가 보다. 높이도 꽤 되는 넓은 공간에 그가 기록한 많은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다. 내 무지한 눈에는 그게 그걸로 보이지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내 여러 글들을 대하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끼적여 놓은 것들을 많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더 다양한 내 삶의 기록 같은 그렇고 그런 대단찮은 글들을 양산하는 것이 내게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이 전시된 화가는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나는 내 세계에서 아직 신출내기이다. 나는 내 독특하고 유일한 세계가 아직 구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했음을 안다.
오후에는 한 시인의 작품해설을 들었다.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띄우며 자신의 시들을 설명했는데 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차마 고도’를 접하고 감동과 충격을 받았는지 그에 관한 시들이 많았다. 왜 그렇지 않으랴. 까맣게 높은 곳에 위태롭게 만들어진 길로 차와 소금을 싣고 말과 함께 목숨을 걸고 오가던 길, 외롭고 때론 감격에 젖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도 원숙해지지도 않는 시를 짓는 일과 비슷해 가슴 아리고 눈물이 고였으리라.
소설 수필 동화와는 또 다른 비교할 수 없는 길이 그곳에 있을 게다. 논리에 기대어 땅위를 걷는 듯한 글이나 꿈과 상상이 가득한 동화의 세계도 아닌 남이 보지 못하는 유일하고 독특한 세계를 태생적으로 보아내는 시인들이 무한 부러운 것이다. 내 삶의 지경, 인식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 고통스럽고 때로 후련한 춥고 광활한 작은 생명체들이 숨 쉬는 사막 같은 나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무엇에 눌려 사는 것일까? 꿈과 욕망만 품은 채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무슨 일이었을까? 평소에 한 가지 일도 쉽지 않은데 저녁까지 들를 곳이 있어 간 곳에서는 두 수필가의 짧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든 이들이었다. 수필 한 편을 한 달에 걸쳐 쓴다는 무서운 집념을 펼쳐 들려주었다. 한 주는 소재를 찾고 한 주는 구성을 하고 며칠 쓰고는 두 주간을 다듬는다고 했다. 언젠가 누구에겐가 들었던 일상의 문학화작업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문학화 되지 못한 채 익지 않은 내 글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어쩔 것인가를 묻게 한다. 자신이 없다. 아직은 삶의 기록을 어설프게 쏟아내는 것이 내게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직은 내 글들을 다듬고 싶지 않다. 한가한 일상이지만 날 것 그대로를 써내려가고 싶다. 끝내 다듬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완성인 채로 내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미지의 땅을 돌아다니고 싶다.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는 나만의 발걸음으로 헤매보는 게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어 놓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건 어떨까? 길들지 않는 자유인으로 때로는 부딪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가시에 긁히는 삶을 살고 싶다. 많은 면에 둔하고 여린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며 아픈 마음으로 내 길을 조금씩 걸어보고 싶다.
아직은 관심만 가지고 있는 동화, 알지 못한 채 들여다보는 소설, 먼 곳에 안개 속에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시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내 모습을 본다. 마음 한 편에서 내려놓으라, 욕심이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어느 것도 내려놓고 싶지 않다. 그저 하나라도 깊이 파고 잘하라는 것이 내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잘하지 못해도 손짓해 나를 부르는, 콧날 시큰한 차가움 속에 반짝이는 무언가 있을 듯한 흥미로운 그 세상을 모른 척 살아갈 순 없는 것 아닌가.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어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나 자신이 분명히 모르고 있다는 고백인 셈이다. 쯧쯧,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가능하면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 내 삶의 신조인데 최근 들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바꾸는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수동적으로 사는 것은 이렇다 할 결과를 얻기 어려웠다. 짧지 않은 삶에서 무엇이 남았나를 돌아보니 일을 만들지 않고 살아온 지난날이 허망하다. 내 믿음이 소극적이고 기도가 간절하지 않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주 느끼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 내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니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생활방식이 문제인 것 같다.
가능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중심이 되어서 일을 만들고 저지르며 사는 것은 어떨까 그려본다. 그러면 좀 더 사는 것 같고 변화가 있고 예상 밖으로 돌출하는 여러 가지 일들로 더 기도하게 되고 어려움 속에 그분이 내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도우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남들은 그렇게 살다가도 이제는 일들을 줄이고 안정적인 삶의 자세로 돌아오는 때일 듯하다.
뭐가 문제인가? 왜 남의 시선에 그렇게 마음 쓰고 매어 있어야 하나.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족한 것이지. 일 만들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활동이 잦아들다 멈춰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 갈 것이다. 점차 몸과 마음이 약해질 텐데, 오는 이도 없고 갈 데도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삶이 되면 어떡하나?
지난 금요일에는 몇 가지 할 일이 있었다. 도서관 일정 중 하나로 시립미술관에 갔었는데 끝까지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이름을 들었던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해설사가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다지 없다. 작품 활동이 무척 왕성한 작가인가 보다. 높이도 꽤 되는 넓은 공간에 그가 기록한 많은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다. 내 무지한 눈에는 그게 그걸로 보이지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내 여러 글들을 대하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끼적여 놓은 것들을 많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더 다양한 내 삶의 기록 같은 그렇고 그런 대단찮은 글들을 양산하는 것이 내게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이 전시된 화가는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나는 내 세계에서 아직 신출내기이다. 나는 내 독특하고 유일한 세계가 아직 구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했음을 안다.
오후에는 한 시인의 작품해설을 들었다.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띄우며 자신의 시들을 설명했는데 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차마 고도’를 접하고 감동과 충격을 받았는지 그에 관한 시들이 많았다. 왜 그렇지 않으랴. 까맣게 높은 곳에 위태롭게 만들어진 길로 차와 소금을 싣고 말과 함께 목숨을 걸고 오가던 길, 외롭고 때론 감격에 젖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도 원숙해지지도 않는 시를 짓는 일과 비슷해 가슴 아리고 눈물이 고였으리라.
소설 수필 동화와는 또 다른 비교할 수 없는 길이 그곳에 있을 게다. 논리에 기대어 땅위를 걷는 듯한 글이나 꿈과 상상이 가득한 동화의 세계도 아닌 남이 보지 못하는 유일하고 독특한 세계를 태생적으로 보아내는 시인들이 무한 부러운 것이다. 내 삶의 지경, 인식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 고통스럽고 때로 후련한 춥고 광활한 작은 생명체들이 숨 쉬는 사막 같은 나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무엇에 눌려 사는 것일까? 꿈과 욕망만 품은 채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무슨 일이었을까? 평소에 한 가지 일도 쉽지 않은데 저녁까지 들를 곳이 있어 간 곳에서는 두 수필가의 짧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든 이들이었다. 수필 한 편을 한 달에 걸쳐 쓴다는 무서운 집념을 펼쳐 들려주었다. 한 주는 소재를 찾고 한 주는 구성을 하고 며칠 쓰고는 두 주간을 다듬는다고 했다. 언젠가 누구에겐가 들었던 일상의 문학화작업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문학화 되지 못한 채 익지 않은 내 글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어쩔 것인가를 묻게 한다. 자신이 없다. 아직은 삶의 기록을 어설프게 쏟아내는 것이 내게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직은 내 글들을 다듬고 싶지 않다. 한가한 일상이지만 날 것 그대로를 써내려가고 싶다. 끝내 다듬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완성인 채로 내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미지의 땅을 돌아다니고 싶다.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는 나만의 발걸음으로 헤매보는 게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어 놓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건 어떨까? 길들지 않는 자유인으로 때로는 부딪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가시에 긁히는 삶을 살고 싶다. 많은 면에 둔하고 여린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며 아픈 마음으로 내 길을 조금씩 걸어보고 싶다.
아직은 관심만 가지고 있는 동화, 알지 못한 채 들여다보는 소설, 먼 곳에 안개 속에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시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내 모습을 본다. 마음 한 편에서 내려놓으라, 욕심이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어느 것도 내려놓고 싶지 않다. 그저 하나라도 깊이 파고 잘하라는 것이 내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잘하지 못해도 손짓해 나를 부르는, 콧날 시큰한 차가움 속에 반짝이는 무언가 있을 듯한 흥미로운 그 세상을 모른 척 살아갈 순 없는 것 아닌가.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어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나 자신이 분명히 모르고 있다는 고백인 셈이다. 쯧쯧,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