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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복음: 루카 2,22-40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에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 2,22-40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하느님께 봉헌함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처럼 주님께 봉헌되고 선물이 되기를 청하는 마음으로
초를 봉헌합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묵상해봅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드린다는 것, 바친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를 하느님께 바칠까요? 하느님은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먼지요 티끌이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분이십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 아래 우리 인생은 활기를 띠며 가치와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가 아니라면 우리는 잠시도 제힘으로 서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는 좋은 것이 생겼다면, 감사할 일이 생겼다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상의 선물로 주신 우리 인생이기에, 우리 자신을 수시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이며, 상호적인 것이며, 오고가는 것입니다.
맨날 받기만 하고 드리는 것이 없다면, 그 관계는 절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 보면 그저 하느님께 청하기만 합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어색할 것입니다.
자녀로서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나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드려왔나?
무엇을 봉헌하고 있나?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제대에 봉헌할 초를 깎으며 초가 지닌 상징성을 생각합니다.
초는 언제나 자신을 녹여가며, 자신을 소멸시켜가며 주변의 어둠을 밝힙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주변을 화사하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소멸시켜 가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 강론>
(2024. 2. 2. 금)(루카 2,22-40)
<봉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첫 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라는 율법은 탈출기 13장에 있는데, 탈출기 13장을 보면, 첫 아들을 주님께 봉헌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 (탈출 13,14-16)”
따라서 ‘봉헌’은 ‘해방’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아들’을 봉헌할 때에는 성전에 갈 필요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은 다섯 세켈의 돈을 사제에게 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민수 18,15-16).
그런데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간 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1사무 1,28)
성모님과 요셉 성인도 예수님을 하느님께 바쳤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헌 이야기에는 은 다섯 세켈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아기들처럼 돈을 바침으로써 봉헌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산모의 정결례’를 거행한 것은 레위기 12장에 있는 율법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봉헌하지 않아도 되고, 또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니까 성모님이 정결례를 거행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두 가지 일을 모두 한 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님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의 봉헌도 묵상하는 날입니다.
또 이날 1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것은,
‘촛불’이 봉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서 빛을 내는 것은 봉헌이 어떤 일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1)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봉헌’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늘 우리 자신을, 또 우리의 인생 전부와 우리의 목숨을 봉헌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 봉헌은 기본적으로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그동안 받은 은혜와 앞으로도 받게 될 은혜에 감사드리는 일이 봉헌입니다.
‘감사’에 관해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벨과 카인의 제물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3-5ㄱ).”
‘맏배들’을 바쳤다는 말을 근거로 해서, 아벨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것’을 바쳤고, 카인은 의무감으로 그냥 아무거나 바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은, 아벨의 봉헌만 봉헌으로 인정하셨고, 카인의 봉헌은 봉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감사드리는 마음 없이 의무감으로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봉헌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것’을 바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을 바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
“......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성전 세를 바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봉헌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기적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잡은 고기를 시장에서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면, 그것은 노동을 해서 돈을 번 것이고, 그러면 ‘나의 것’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4) 무엇을 바치든지 간에, 바치는 그 물건이나 돈보다도 바치는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떤 가난한 과부’가 모범적인 예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우리는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다 바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마음과 정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