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타이완 불교계를 대표하는 단체를 물어본다면 싱윈(星雲) 스님의 불광산사, 셩이앤(聖嚴) 스님의 법고산(法鼓山), 웨이주에(惟覺) 선사의 중대선사(中臺禪寺) 그리고 쩡이앤 스님의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봉사 활동상의 조직력과 신속력은 아마도 증엄 스님의 자제공덕회가 으뜸 일듯 싶다.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계신 분이 바로 엄숙한 회색 승복 아래 감추어진 선풍도골(仙風道骨)의기품있는 모습, 자비로운 눈빛에 중생구제의 굳은 원력을 담고 있는 자제공덕회 회주 쩡이앤 스님이다. 스님은 타이완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칭송받고 있다.
쩡이앤 스님의 ‘자비희사(慈悲喜捨)’의 큰 서원(誓願)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제하는 큰 보살행으로 1966년 타이완 동부 지역인 화리앤에서부터 만세에 빛나는 구제사업을 일으켰다. 스님의 ‘보천삼무 (普天三無)’의 뜻을 살펴보면 사람에 대한 스님의 무한한 자비와 큰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마음의 번뇌와 원망, 근심 버리고 만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허공 가득 다함이 없기를.
스님의 이 같은 자비와 사랑의 정신은 타이완 국내 및 해외에서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마다 재현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9년 9월 21일 타이완 중부 지역에 발생했던 리히터 7.3규모의 강진 참사를 들 수 있다. 이 때 대지진이 발생하여 2,318명이 죽고 사회기반시설의 상당수가 초토화 되었는데, 진앙지역 부근 지대인 타이중과 지지 지역에는 구조대원들조차도 접근하기도 전에 2만여 자제공덕회 회원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신속하게 구호물자를 전달하며 구제활동을 펼쳤다. 곧 이어 자제공덕회는 80억원(한화 약 3,200억원)을 모금해 재난 지역에 50개 학교를 건립 기증하겠다는 ‘희망공사'를 발표했다. 2만여 자원봉사자와 1억 6천만원의 기금과 1,630채의 임시 가옥을 건설했던 이 희망공사는, 2003년 4월 마지막으로 50번 째 학교인 차오툰의 이앤펑 초등학교가 완공한 후 막을 내렸다. 자제공덕회는 적극적인 자제위원의 모금활동과 특유의 조직력으로 8백 여 개 학교가 파괴된 중부지역에 50개 학교를 거뜬히 지어 기증했다. 당시 현지 언론은 기자보다 빠른 기동력으로 재난 현장을 찾아간 불교자선단체 ‘정사정사(靜思精舍) 자제공덕회’를 ‘푸른 옷의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특히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ㆍ11테러사건이 발생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기에도 스님은 ‘경세의 재난은 경세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호소하며 10월 중순 경, 천주교, 기도교, 회교, 불교 등 종교단체를 초청하여 세계 평화 기원의 촛불행사를 마련하였다. 또한 2003년 세계적으로 ‘사스’의 먹구름이 드리워졌을 때, 자제공덕회는 ‘사랑으로 세상을 적셔 함께 질병을 구제하자’ 라는 구호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소식(素食)) 운동을 펼치며, 선행을 쌓아 천재와 인재, 질병을 없애자고 호소하였다.
쩡이앤 스님의 일대기는 자제공덕회의 성장과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자제공덕회의 자선, 의료, 교육, 인문 등의 ‘4대 지업(四大志業)’의 배경과 상황 등을 살펴보면 더욱 더 쩡이앤 스님의 투철함과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사회사업의 여러 면을 보듬고 있는 이 4대 지업은 자제공덕회가 막 설립되었을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4대 지업이 완성되어 오늘날의 규모가 된 과정 속에서 충분히 그 안에 녹아 있는 쩡이앤 스님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쩡이앤 스님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2개월 전인 5월 4일에 태어났다. 고향은 타이완의 타이중 칭수이란 곳이다. 어렸을 적에는 숙부 호적에 편입되어 양부모님을 따라 펑위앤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아버지는 타이중의 여러 곳에서 극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장녀였던 스님은 똑똑하고 영리하여,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1952년 15살 때, 스님의 효성과 자비심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이 일어났다. 어머님이 그만 위궤양으로 수술을 할 지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시절에는 수술이 매우 위험한 것이었기에, 스님은 어머니를 위해 ‘관세음보살’을 읊조리며, “만약 어머님의 병이 나으면, 전 12년을 덜 살아도 좋습니다. 또한 소식(素食)을 하겠습니다. 어머님을 오래 살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였다. 그 효심에 하늘이 감동했음인지, 어머님은 스님의 정성스런 간호아래, 수술도 하지 않고 기적처럼 병이 나았고, 그 때부터 스님은 줄곧 소식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한창 활동 중이시던 부친이 하루 만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스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다. 이때 부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이 곳 저 곳의 절을 찾게 된 것이 불법(佛法)과의 인연을 맺게 된 원인이 된다. ‘도대체, 삶이란 어디서 왔다 죽으면 어디로 가지?’ 라는 의문이 생명에 대한 탐구의 계기가 되어 마침, 자운사(慈雲寺)의 시우따오(修道) 스님께 불법을 공부하게 된다. 쩡이앤 스님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인간 행복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해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여인이 가정에서 장바구니를 드는 것도 행복일 테지만,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일에는 마땅히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비심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전 인류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회로 확대해 천하의 중생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헛된 삶이 아닌 진정한 삶이 아닌가!”
1961년 9월,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출가로 뜻을 굳혀, 수도스님과 함께 타이똥(臺東)의 루이에(鹿野)산의 낡은 왕모(王母) 사당에 들어가 낡은 《법화경》으로 구도의 수행을 시작한다. 산에는 물도 전기도 쌀도 기름도 없었고, 주민의 공양도 받지 않은 채 두 수행자는 밭에서 농부들이 수확하고 남은 땅콩이나 산나물을 모아 와서 물에 끓여 먹었다. 밤에는 주민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10월에는 일본어판 《법화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날이 추워져, 겨울을 날 만한 옷이 없었고, 이불도 변변치 않아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주적인 생명을 향한 자비심으로 충만했던 쩡이앤 스님은 유발(有髮) 제자로 출가하며, 자비와 사랑이란 화두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게 된다. 이후 몇 번의 삭발 출가가 좌절되자 스님은 조용히 수행할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루이에를 떠나 대만의 북부, 중부, 동부 등으로 만행하는 우여곡절 끝에 화리앤에 머물게 되었지만 삭발해 줄 은사가 없어, 스스로 삭발한 후 본격적인 출가생활을 하게 된다. 그 때, 화리앤의 쉬총민(許聰敏)이란 노거사와 인연을 맺어 수참(修參)이란 법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해 스님의 나이가 25세였다.
1963년 2월, 쩡이앤 스님은 타이뻬이시 임제사에서 열린 수계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은사가 없어 명부에 등록할 수 없었다. 수계식이 열리기 얼마 전 쩡이앤 스님은 우연히 《태허(太虛) 대사 전집》을 사서 읽은 인연으로 인슌대사(印順大師: 태허대사의 뒤를 이어 ‘인간불교’를 제창한 대만 불교계의 최고 원로)를 뵙게 된다. 쩡이앤 스님이 공경심으로 찾아뵈니 인슌스님은 어렵지 않게 은사가 되어주겠다고 응답했다. 수계식이 열리기 바로 전이라 급박한 시간이었지만 인슌대사는 쩡이앤스님을 위해 간소한 스승과 제자의 예를 치루고 그녀에게 ‘쩡이앤(證嚴)’이란 법명과 ‘혜장(慧璋)’이란 자(字)를 내리며, 간략한 법문을 설한다.
“너와 나의 인연이 수승(殊勝)하구나. 출가를 했으니, 매 순간 불교와 중생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
32일 간의 비구니 구족계(具足戒) 수계법회를 마친 뒤에 쩡이앤 스님은 그해 5월 화련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보명사 뒤쪽에서 당시 불교 대덕의 인정을 받던 한 노거사의 발심으로 4평 남짓한 소박한 목재 가옥에서 기거하면서《법화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였다. 매일 《법화경》을 읽고 매달마다 《법화경》 한 권씩을 사경하며 중생을 위해 기도하였다. 신도들로부터 공양을 받지 않아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에 항상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 과일이나 꽃도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공부하며, 매달 음력 24일이 되면 대회향으로 연비(燃臂; 향불로 팔을 태우는 의식)하여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1963년 10월, 스님은 화리앤의 자선사(慈善寺)에 가서 처음으로 《법화경》을 약 8개월간 강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4명의 출가 제자가 사제의 연을 처음으로 맺었다. 현재 정사정사의 많은 원로 출가 제자와 속가 제자들은 이 시기에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던 분들이다. 뒤에, 스님은 제자 덕사(德慈) 스님 및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보명사에 돌아와 기거하며 함께 수행하게 된다. 이때가 1964년 가을이었다. 스님과 제자들은 ‘첫째 경참(經懺)을 서두르지 않고, 둘째 법회를 열지 않으며, 셋째 탁발하지 않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수행 청규(淸規)를 세웠다. 스님은 제자들에게도 자급자족의 정신을 갖도록 해 소박한 수행생활을 하도록 가르쳤다. 지금까지도, 자제정사의 모든 지출은 여전히 상주스님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자제공덕회의 예산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966년 인슌대사는 타이베이 문화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지아이(嘉義)의 묘운난야(妙雲蘭若) 도량에 마땅한 주지스님이 없어 쩡이앤스님이 제자를 데리고 가서 맡아 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화리앤에서 수년간을 지냈던 터에, 평상시 스님을 따르던 두 노인과 30여 명의 신도들이 스님이 화리앤에 남는 것을 원했기에, 결국 인연에 따라 화리앤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해 자제공덕회의 기원이 되는 두 가지 뜻밖의 경험을 접하게 된다.
1966년 어느 날, 스님은 화리앤의 한 진료소로 위출혈을 일으켜 수술을 하게 된 신도를 찾아갔다가 병실을 나오면서 병원 바닥에 피가 낭자한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환자가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한 원주민 임산부가 난산으로 병원에 왔다가 의료비와 보증금이 없어 다시 들것에 실려 나갔다고 했다. 이때 젊은 쩡이앤 스님은 “두 생명이 같은 생명인 줄 모른단 말인가? 이곳에 생명의 소중함이 과연 있단 말인가?” 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스님은 ‘병고가 생기는 것은 바로 가난 때문이다.’ 라는 결론을 얻어, 그 자리에서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된다.
“기금을 모으는 방법을 강구해서 가난을 구제해야겠다. 빈곤하고 병이 많아 의지할 곳 없는 동부 주민을 위해 당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
자제공덕회의 창립 인연은 이렇게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된다. 마침 화리앤 해성중학교의 세 수녀님이 스님을 전도하기 위해 찾아 왔고, 종교의 교주와 교지(敎旨), 교의 그리고 인생 등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박애(博愛)와 부처님의 자비(慈悲)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다. 수녀님들은 떠나기 전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며 스님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벌레의 영혼에까지 미치는, 일체생명을 사랑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이 확실히 위대함을 알게 됐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박애는 짐승을 제외한 전 인류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회 속에서 교회와 병원, 양로원을 지어 사람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비록 자비로 세상을 구한다지만, 사회에 대해 무슨 공헌을 했는지요?” 쩡이앤 스님의 심정은 갑자기 복잡해졌지만, 대신 한 가지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다. “불교도는 본래 겸허한 마음이 있어서 선을 행하더라도 남에게 알리기 싫어한다. 많은 사람이 각각의 선행을 하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진행할 뿐이다. 단지 조직을 만들지 않았을 뿐, 사실상 불교의 잠재력은 오히려 클 것이다.”
스님은 이러한 불자들의 선행의 힘을 조직적으로 구성하기로 결심하여, 일단 구세제인(救世濟人)의 자선 불사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스님의 출가 본래의 뜻은 명리(名利)를 떠난 것이었건만, 돈이 없어 생명이 죽어가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하다 보니, ‘돈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라는 금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한들, 환자의 위급한 그 시간에 의사의 손길이 닿지 못한다면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스님은 돌연 경전의 한 구절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게 되었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고통과 재난을 구해 주듯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마음을 가진 500인이 각처에 흩어져 천수천안관세음보살처럼 중생의 아픔을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500인 중생의 손이 모이면 한분의 천수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을까? 경전에 파묻힌 관세음보살님을 중생의 모습으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아들게 되면 하나의 법회가 되고 도량이 되어, 중생 하나 하나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스님의 새로운 발상은 전통 불가 수행과는 또 다른 관점, 즉 500명 단위로 조직된 단체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역할을 대행함으로써, 출세간의 정신을 다시 입세간으로 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1966년 4월 보명사에서 역사적인 ‘불교극난극복자제공덕회’가 설립 조직되었던 것이다. 자제공덕회의 자선 빈곤 구제 사업은 여섯 명의 상주 스님들이 각각 매일 영아용 신발을 하나 더 만들고, 회원 30명에게 ‘대나무 저금통'을 나누어 주어 그들이 매일 시장에 장을 보러 가기 전에, 50전을 아껴 저금통에 모으면서 기금을 만들었다. 그때 하루에 매번 50전을 모으고자 하니, 동참하던 회원 한 명이 차라리 한 달에 15원을 기부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스님께 건의했다. 하지만 쩡이앤스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바라는 건 ‘매일’입니다. 매일매일 저금을 하는 그 순간에 남을 돕겠다는 좋은 마음이 일지요. 그럼 한 달에 30번 그 마음을 일으키고 발원하는 셈이지요. 그건 만약 한 달에 15원을 기부하여 좋은 마음을 그저 한 번 일으키고 마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단순한 모금이나 기부의 단체가 아닌, 그런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개발시키고, 보살도를 실천 유지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가르치는 스님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루에 한번 50전의 보시로 그 선행의 마음은 새겨지고, 또한 50전은 그들의 마음을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50전으로 과연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를 의심했지만, 30명의 회원은 꼬박꼬박 한 달에 450원씩을 저금했고 스님들도 영아용 신발을 팔아 번 720원을 모아 불교극난극복자제공덕회는 매달 1170원의 빈곤 구제의 기금을 마련하였다. 이 공덕회의 미담은 아주 빠르게 화리앤의 여러 시장에 전해져 참여하는 상인과 손님들이 점점 많아져,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가지신 관세음보살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고통과 재난을 구해주듯이’ 공덕회의 기능은 날이 빠르게 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1966년 5월 14일, 정식으로 자제공덕회 전신인 ‘불교극난극복자제공덕회‘가 조직되었다. 자제공덕회가 막 창립되었을 무렵, 쩡이앤스님과 제자들은 여전히 20평이 못되는 보명사에서 비좁게 살고 있었다. 가내수공업 제품의 제조로 생활을 지탱해 나가며, 한편으로는 공덕회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1967년 가을, 스님의 속가 어머님은 스님을 위해 현 정사정사(靜思精舍)의 토지를 매입하여 시주하셨다. 하지만 스님과 제자들은 자력갱생의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여 정사에 관련된 모든 확충공사는 모두 스스로 마련하였고, 토지대장으로 은행에 대출을 받아 완성하였다. 정사정사는 11차례의 중건을 거쳐, 1999년에 비로소 완전한 규모를 갖추었다. 청정하며 장엄하고 아담하지만, 전혀 화려하지 않은 전 세계 자제인의 마음의 고향인 정사정사가 완성된 것이다. 가난을 구제하고 병자를 치료하며, 교육의 장을 열어 준 쩡이앤스님과 자제공덕회의 사회에 대한 봉헌은 이미 매우 깊은 사랑과 보살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스님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님은 사람의 심성을 정화화하기 위해서는 인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문화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과 자제공덕회는 ‘인문’ 분야에도 시각을 돌리게 된다.
쩡이앤 스님은 98년 1월 대북, 화련 등 5개 지역에 위성방송,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갖춘 ‘대애(大愛)TV’를 개국했다. 이를 통해 쩡이앤스님은 사심 없이 사랑을 베푸는 ‘대애사상’을 실천하고 있으며, 격주간 신문 《자제도려(慈濟道侶)》나 중문ㆍ영문ㆍ일문 등 3개 국어로 발간하는 월간 잡지 《자제》 등을 발간하며 불교의 자비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올해 초 자제공덕회는 타이페이의 꽌뚜(關度)에 ‘자제인문지업중심(慈濟人文志業中心)을 건설하여 기존에 설립했던 잡지, 방송국, 출판 부문 등 문화 사업에 관련된 사업 부문을 이곳으로 옮겨와 좀 더 체계적인 인문 환경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의 정화에 앞장서고 있다.
쩡이앤 스님의 당초 자비의 마음은 ‘한 발 한 발 또박 또박 내딛으며 발자국을 내듯이’ 실천되어져, 2004년 12월까지 이미 2만 2,419명의 위원에 1만 1,837명의 자성대원, 전 세계적으로 400백여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미 6개 병원과, 종합대학, 방송국, 잡지 등 산하시설 직원 수만 2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직을 갖춘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를 통해 보살행을 펼치고 있다. 쩡이앤스님은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기에 그들의 본래 성품을 계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부처님께서 설한 ‘인성이 본래 선하다[人性本善]’는 사실을 믿는다. 모든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사랑과 자비심을 가졌듯이 중생 역시 그러하다. 부처님께서 큰 지혜를 지녔듯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이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 사람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습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부처님과 똑같은 자비심을 가졌기에, 그들의 심성을 계발하기만 한다면 가장 선량한 마음, 가장 진실한 즐거움을 누리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돈이 있어서 행복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빈궁과 질병, 고독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부유한 이들이 타인을 위해 보시를 베풀면 모든 이들이 더욱 행복해질 것이란 사실을 알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진실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경계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참된 부를 가르치는 것은 바로 심신의 정화를 의미하게 된다고 한다. 쩡이앤스님의 중생구제는 이처럼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뇌를 제거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사원융(理事圓融)의 지혜로 지구촌 각 지역의 좋은 분들과 함께 복전(福田)을 일구어, 수많은 마음의 연꽃을 심어 큰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함께 건설하길 희망하는 스님은 이렇게 발원한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시장바구니를 만들어 중생의 육체를 공양(供養)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지혜로써 충실히 만들고 자비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것입니다.”
쩡이앤 스님의 ‘인간불교‘에 대한 제창과 그 실천은 실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비록 스님이 열반하고 나면 조직의 운영을 어떻게 지속해 나가야 할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이지만, 스님의 철저한 사고력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자비로운 영혼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은 자제공덕회 회원뿐만 아니라 불자들과 선량한 시민들의 남은 과제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혜롭게 사랑으로 서로 돕고, 고난의 소리를 들으면 바로 고통을 해결해 주며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 이들이 가는 곳은 집집마다 편안함과 곳곳마다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쩡이앤(證嚴)스님의 법어집 《아침 명상록》 중에서 《아침 명상록-靜思語》 지은이 : 쩡이앤(證嚴), 감수 : 김상근, 옮긴이 : 이상미, 김성우, 2007년, 하늘북 出刊
2011 11 7 웹에서 서핑한 자료들로 꾸몄습니다 출처 :삼보제자 원문보기▶ 글쓴이 : 삼보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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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채영의 풍경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도반 채영
첫댓글 큰스님께서 지난 금요법회에서, " 자제공덕회의 회주이신 증엄스님을 맨토로 생각하신다"고 하신 말씀과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보셨다"는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大선지식이신 큰스님께서 그리하셨다는 말씀에서 '下心 ' 이라는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스님의 넓으신 마음을 다시 한 번 더 느낀 큰 법회였고 법문이었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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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을 직접 보는듯 순간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유익한 정보 참으로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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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맚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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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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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살아있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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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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