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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3장 1절 ~ 7절
주 그들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들을 위해 그를 그들에게 보내셨으므로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주 그들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고하는 것을 마쳤더라. 1)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Jeremiah had made an end of speaking unto all the people all the words of the LORD their God, for which the LORD their God had sent him to them, even all these words, 1)
예레미야는 이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음도 하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보내짐은 그들의 심판의 공의를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때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교만한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네가 거짓되이 고하는도다.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집트에서 기거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 는 말을 하라고 너희를 보낸 것이 아니며 2)
Then spake Azariah the son of Hoshaiah, and Johanan the son of Kareah, and all the proud men, saying unto Jeremiah, Thou speakest falsely: the LORD our God hath not sent thee to say, Go not into Egypt to sojourn there: 2)
아사랴와 요하난 그리고 교만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의 생각을 우상으로 삼고 그대로 관철하는 과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하나님의 뜻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인데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 하나님을 알지못하여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대적하도록 너를 충동시켜, 우리를 칼데아인들의 손에 넘겨서 그들로 우리를 죽이게 하고, 또 우리를 바빌론으로 사로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하더라. 3)
But Baruch the son of Neriah setteth thee on against us, for to deliver us into the hand of the Chaldeans, that they might put us to death, and carry us away captives into Babylon. 3)
이렇게 근거가 없는 판단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암몬인의 왕 바알리스와 이스마엘의 계략을 눈치챘던 유능한 군인인 요하난은 갑자기 상황을 오판하고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판단은 곧 틀릴 가능성이 높은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으로 느껴집니다. 앞서 나타난대로 요하난은 유능한 군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유대에 남아서 바빌론의 군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런 대비없이 적에게 노출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의 생각이 간절해도 그것은 우리를 죽이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이 간절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요하난의 망상처럼 돌이나 나무에 사람이 소원을 비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푸라기를 잡아서는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푸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간절하지만 지푸라기를 잡는 이유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잡느니 차라리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돌과 오래된 나무에 비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간절함이란 세상에 대한 간절함인 것입니다.
좋은 직장과 사람들의 관계가 아무리 간절해도 백신을 맞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삶이 백신을 거부함으로 중단되는 것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서를 쓰고 백신을 맞는 촌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기가 죽기보다 싫은 것입니다. 이는 사탄이 넣어준 생각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요하난처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내재된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요하난과 아사랴와 유대 사람들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간절함이 우리의 귀를 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양심의 요구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와서 우리의 순종을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요하난은 그동안 양심에 순종하여 살아왔어도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하지 못하여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오게 될 것이고, 그때를 지금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요하난과 그들은 그달랴와 칼데아인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 바빌론 군대에게 추궁당할 것에 대한 대비가 전혀없는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군인이 무방비로 남아있는다는 것은 저의 인지상정으로 보아도 매우 선택하기 힘든 결정이긴 합니다.
그러므로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대의 모든 대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유다 땅에서 거하라는 주의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더라. 4)
So Johanan the son of Kareah, and all the captains of the forces, and all the people, obeyed not the voice of the LORD, to dwell in the land of Judah. 4)
이집트로 가라는 지시는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자신의 생각입니다. 자신의 마음안에서 합당하게 여겨진 것일 뿐입니다. 요하난의 주장대로 유대땅에 남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고, 바룩의 선동이었다면, 이집트로 가라는 것은 누구의 지시인가요? 결국은 하나님은 없고, 자신의 주장만이 남은 것입니다. 즉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없으며, 자신들이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불신앙보다도 더 가혹한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고 자신의 살길로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믿음이 없는 자가 자신의 길로 갔으면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도 있으나 요하난의 일행은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살길로 갔기 때문에 살 가능성이 전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와 타협하여 우리 자신의 길 즉 사탄이 제시하는 길로 가는 것은 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대의 모든 대장들이 유다의 모는 남은 자들을 데려갔으니 그들이 쫓겨났던 모든 민족들로부터 유다 땅에 거하려고 돌아온 자들, 5)
But Johanan the son of Kareah, and all the captains of the forces, took all the remnant of Judah, tha were returned from all nations, whither they had been driven, to dwell in the land of Judah; 5)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Two women shall be grinding at the mill;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KJV 마태복음 24장 40절 41절
So the last sha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for many be called, but few chosen.
KJV 마태복음 20장 16절
위 말씀에서 요하난과 그의 군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람들을 데려간것이 took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take는 택함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번역이 아닌 의역에 가까운 것입니다. 택함은 took가 아닌 chosen으로 기록됨은 킹제임스성경의 견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요하난이 말씀에 불순종함의 길로 사람들을 끌고 간것이 take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데려감이 구원이 아닐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며, 저의 의견은 거기서 멈춥니다. 성경말씀의 기록앞에서 우리의 생각은 잠시 내려놓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즉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과 왕의 딸들과 경호대장 느부살아단이 사판의 손자요 아히캄의 아들인 그달랴와 함께 남겨 둔 모든 사람들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라. 6)
Even men, and women, and children, and the king's daughters, and every person that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had left with Gedaliah the son of Ahikam the son of Shaphan, and Jeremiah the prophet, and Baruch the son of Neriah. 6)
그런데 요하난과 그의 군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대땅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그의 친척인 바룩까지도 데리고 이집트로 향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바빌론왕 느부캇넷살도 예레미야를 풀어주었는데 요하난은 강제로 이집트로 끌고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백신을 강요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던 집단 동일시 현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압제입니다. 백신을 맞지 않음이 배신이 되어 사회로부터 배척당할 이유나 근거는 없습니다.
요하난에게도 그들의 마음에 불확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불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에 대한 강박으로 강제로 모두를 끌고 이집트로 가는 모습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그들이 주의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리하여 그들은 타판헤스까지 갔더라. 7)
So they came into the land of Egypt: for they obeyed not the voice of the LORD: thus came they even to Tahpanhes. 7)
다바네스 [ Tahpanhes ]
‘흑인의 요새’란 뜻. 애굽 북동쪽 국경 지대에 있는 성읍(렘 2:16). 수리아와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높은 장벽으로 둘러쳐진 요새지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멸망한 유다 백성은 바벨론이 파견한 총독 그달랴를 살해하고 요하난의 인솔하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끌고 이곳으로 피신하였다(렘 43:7-9).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이 성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 경고하였다(렘 43:8-11; 44:1; 46:14; 겔 30:18). [네이버 지식백과] 다바네스 [Tahpanhes]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지도로 보니 기브온에서 타판헤스, 다바네스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어보입니다. 요하난이 안전하다고 느낄 만하다는 것이 공감이 됩니다. 저는 인지상정을 가져서, 포도원 일꾼이나 요하난의 마음에 공감을 갖게되는 것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예가 타시스 지금의 스페인으로 배를 타고 가려했던 요나가 생각납니다. 그래도 요하난은 요나보다는 스케일이 작은 듯하나 요나는 홀몸이었고, 요하난은 그의 군대와 유대 사람들을 끌고 갔기 때문에 작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결론으로 사람의 인지상정은 공감은 가지만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닥칠 순종에서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얻으리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의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장 25절 26절
요하난은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생명에 대한 소망 그리고 군인으로 쌓은 생존의 원칙등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생명의 유익보다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더 커야 순종이 가능합니다. 내가 살기위하여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순종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 세상을 얻고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기록되기를 우리의 혼을 잃지 않아야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보다도 소중한 것이 우리의 혼이며, 소멸될 육체보다 영원히 살수 있는 우리의 혼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먼저 매일 양심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요하난은 양심에는 순종하였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여 멸망하였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양심에 순종하여야 하지만 때로는 불순종할 수는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어질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순종해야만 합니다. 요하난과 그 일행들이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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